자끄 드레: “수영장”, <과거사진상규명위>, <영진공 66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7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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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실제 연인이었던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
나무, 새, 하늘, 다양한 자연풍경자연풍경을 찍어서 180도 뒤집은 화면 위로, 자막이 일렁이며 지나갑니다. ‘수영장’은
물의 이미지니까요. 미셸 르그랑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오프닝 자막이 끝나고 나면, 화면은 곧장 수영복만 입은 나신의
장-뽈(알랭 들롱)이 수영장 가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뜁니다. 햇볕은 짱짱하고, 선글라스를 쓴 채 누워서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도
별 대꾸없이 카메라쪽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하늘로 향하는 그는 옆에 놓인 컵에 담긴 술을 누운 채 목구멍으로 붓습니다.
곧이어 그 고요를 깨는 풍덩! 소리와 함께 마리안(로미 슈나이더)이 헤엄쳐 옵니다. 부유하고, 여유로우며, 나른한 여름 휴가의
어느 한 장면. 그리고 이 커플에게, 마리안과 과거가 있을 것이라 의심되는 해리(모리스 로네)가 딸 페넬로프(제인 버킨)과 함께
찾아옵니다.

영화는 딱 이 네 사람간에 오고가는 함축적인 대사와 끈끈한 눈빛, 이 안에서 오고가는 심리전으로 흘러갑니다. 그저 친구
사이라는 해리와 마리안은 이상스러울만치 – 페넬로프가 역겨워할 만큼 – 다정해 보입니다. 페넬로프를 흘깃거리는 장-뽈의 시선은
처음엔 딱히 다른 의미를 품고 있지는 않아 보이지만, 해리와 마리안을 의식하며 점점 끈적해집니다. 해리는 유난스럽게 딸을
과시하며 한편으로는 슬쩍슬쩍 마리안에게 스킨쉽을 건네지요. 마리안은 딱히 거부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몸과 분위기를 가진
페넬로프는 어른들의 시선엔 아랑곳없이, 무심하고도 조용하게 수영장을 거닙니다. 처음엔 물가에 가지도 않은 채 원피스만을 입던
소녀는 조금씩 몸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원피스 수영복, 그 다음엔 비키니 수영복 위에 해변용 자켓, 그리고 비키니 수영복.
페넬로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공식적인 커플인 장-뽈과 마리안의 애정표현은 농도가 짙어집니다. 그 가운데 점차
페넬로프의 눈은 장-뽈을 향합니다. 이들은 각자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 한가롭고 그저 시선으로만 교환되는 은밀한
욕망의 기호들은 어떤 사건을 예비해 놓고 있는 걸까요?

화면은 조용하지만 이들의 침묵 혹은 정겨운 ‘사교적’ 말투 아래로 흐르는 심리적 대립은 꽤 격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함이 없는 대화가 알고도 모르는 척, 혹은 모르지만 아는 척 떠보고, 말을 돌리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거나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굳이 하는 “파편적인 대화”라는 것은 이들의 눈빛, 작은 제스추어를 통해 표현됩니다. 영화의 후반, 넷이 모두 모여
먹는 저녁식사씬은 이 심리적 갈등이 가장 정점에 이른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대립도 뭣도 없는 이 장면은 화면 가득히
팽팽한 긴장으로 넘쳐납니다. 장-뽈, 마리안, 해리가 소리없이 벌이는 전쟁은 서로 탐색전과 떠보기와 아무렇지 않은 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제 열여덟살인 페넬로프는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성숙했다 한들, ‘어른들’의 이런 대화를 가엽게도 견뎌내지
못하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먹고, 식사 품평을 하고, 제스추어를 취하고,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장-뽈의 대화법은 가히
‘도망자의 천재’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가엾게도 페넬로프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선은 오직 장-뽈에게 고정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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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 인물별 바스트 원샷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전체샷으로.

이 조용한 전쟁은 결국 파국의 사건으로 이르게 됩니다. 술에 취한 채, 말하자면 이들 사이에 오가던 암묵적인 대화법의 관습을
깨고 그것을 ‘입에 올려버린’ 해리에게 장-뽈은 폭발합니다. 영화 내내 조용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막판에 커다란
사건으로 폭발하는 영화 설정은 지금도 그리 드문 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1969년작이란 말이죠. 그런 식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건 확실히 옛날영화가 더 잘 합니다. 요즘 관객은 영화의 2/3 이상이 소위 ‘따분한’ – 그러나 그걸 과연 ‘따분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기저에 이렇게 격렬한 대립들이 오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 대사와 눈빛의 작은 기호로 진행되는 걸 못
참아하니까요. 하긴, 이 영화도 그래서 준비해 놓고 있는 게 육체의 향연이긴 합니다. 알랭 들롱의 단단한 육체, 제인 버킨의
미성숙과 성숙의 기호가 섞인, 가늘고 쭉쭉 뻗은 육체, 로미 슈나이더의, 매우 작고 동글동글하지만 관능적인 완숙미가 있는 육체.
특히 로미 슈나이더의 몸매는 제게 기묘한 경탄을 주었는데요. 그녀는 소위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글래머’는 아닙니다. 키가
굉장히 작고 아담해요. 가슴이 터질 듯 빵빵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몸 곳곳에 작고 단단한 근육들이 붙어있고, 이것이 전반적으로
동글동글하면서도 다부진 인상을 주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이더란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제인 버킨의 몸매는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마르고 긴 체형으로 좀더 ‘모던’하다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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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버전 포스터같습니다. 꽤 고전적(...)이죠.
나이가 들면서는 ‘완전범죄’에 꽤 매력을 느끼는지라, 결국 물증이 없어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을 보며 기뻐했더랍니다.
아마도 영화 말미 마리안이 장-뽈에게 말하는, “당신을 모르겠어,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사람 같아.”가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요약해 주는 대사이겠지요. 하지만 마리안과 장-뽈은 ‘공범’이 되었고, 결국 마리안은 장-뽈을 떠나지 못합니다. 한배를 탄
운명이 됐어요. 좀더 현대적 영화라면 기어코 마리안은 장-뽈을 떠나겠지만, 그럼에도 전 마리안이 ‘사고친 남자 의례껏 뒷수습
해주는 전통적인 여인’이라기보다는,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자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았답니다. 공식적으로 장-뽈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해리의 희롱을 거부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팜므파탈로서는 좀 부족하고 미숙해 보였지만, 그 사건 이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진짜 팜므파탈이 됩니다. 그리고 전 나이가 든 뒤로는 이런 ‘무서운 확신범’들을 꽤 좋아하죠. 페넬로프 앞에서 ‘성숙한,
성인 남성’처럼 보이던 장-뽈은 마침내 마리안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나서는 갑자기 초라하고 작은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리안이 뒷수습을 다해 주니까. 영화 내내 그가 보여주었던 대화법이나 처세는, 그러니까 성인의 것이 아니라
방어기제였던 셈이에요. (해리와의 싸움 장면에서 장-뽈의 많은 과거들이 절제된 대사들을 통해 튀어나옵니다.) 마지막 장면,
마리안의 품에 안긴 게 아니라 마리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왠지 그 작고 아담한 마리안 앞에서 굉장히 작고 불안한 소년처럼
보이지요. 아마도 이것이 성인인 척하는 남자의 본질 – 몸만 큰 소년 – 일 겁니다.

ps. 이 영화의 음악은 위에서도 썼듯 프랑스의 국민 영화음악가 미셀 르그랑이 맡았고, 각본에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참여했네요(원안 각색). 역시… 장-클로드 카리에르는, 말하자면,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각본가입니다.

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