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V For Victory, 승리의 V를 위해

 

2008년의 대한민국에 이 영화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공포와 증오

공포는 복종을 낳고 복종은 방조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종과 방조의 아래 어디쯤 어두운 곳에서는 증오가 함께 자란다.
공포의 원천에 대한 증오와 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공포 속에서 안주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정체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질기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지라 빛을 모른다.
빛을 모르니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도 모른다.
다만 그 증오는 터져버릴 때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이다.

V는 증오이고 복수이다.
V는 눈 먼 증오이고 복수이다.

사랑과 믿음

증오는 파괴를 부른다.
되 갚아 줘야 하기에 부셔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포의 원천과는 공존할 수 없기에 뿌리까지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포의 원천이 사라지면 증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증오가 새로운 세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사랑과 믿음으로 새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포와 방조에 짓눌려 감겨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와 남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시 싹 틔워,
너와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vey는 사랑이고 믿음이다.
Evey는 힘겹고 어렵게 사랑과 믿음에 눈을 떠야 할 당신과 나이다.

V가 처음 모습을 보인 건 1981년 영국에서이다.

그 시절 영국은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수상의 자리에 오른 마거릿 대처가 혹독한 밀어붙이기로 사회 전반을 휘몰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엄격한 도덕과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누진세를 폐지하여 긴축재정을 편성하면서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였고 거의 모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실행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그녀는 1982년에 느닷없이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유발하여 국면 전환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노동조합과 끊임없이 대립하여 무력화 시켜나갔는데, 그녀의 재임기간 중 영국 내 최대 노조였던 석탄노조는 거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무참히 깨졌다.

경제부흥을 기치로 집권 11년 동안 공공분야에 대한 국고지원 대폭 삭감, 복지예산 대폭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을 몰아붙이며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발로 물러나게 된다.

V는 대처의 집권 초기에 “대처리즘”의 음산하고 잔인한 내음을 감지한 Alan Moore와 Dave Lloyd의 만화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7년 동안 10권 분량의 작품 속에서 V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공포와 증오로 대체된 사회에 대한 복수(Vendetta: 복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감행하였다.

V의 출현 배경에 대해 Alan Moore는 1988년 캐나다 판 “V for Vendetta”의 서문 속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It’s 1988 now. Margaret Thatcher is entering her third term of office and talking confidently of an unbroken Conservative leadership well into the next century. My Youngest daughter is seven and the tabloid press are circulating the idea of concentration camps for person with AIDS. The new riot police wear black visors, as do their horses, and their vans have rotating video cameras mounted on top. The government has expressed a desire to eradicate homosexuality, even as an abstract concept, and one can only speculate as to which minority will be the next legislated against. I’m thinking of taking my family and getting out of this country soon, sometime over the next couple of years. It’s cold and it’s mean-spirited and I don’t like it here anymore.”

“이제 1988년입니다. 마가릿 대처는 수상 3선 임기에 들어섰고 깨어지지 않을 보수의 리더십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신념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막내 딸은 일곱 살이 되었고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 격리수용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사화하고 있습니다. 새로 조직된 시위진압 경찰과 그들의 말은 검은 투구를 쓰게 되었고 그들의 차량 꼭대기에는 회전하는 비디오 카메라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비록 추상적 개념이긴 해도 동성애자를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다음 표적은 아마도 소수민족이 될 듯합니다. 나는 이, 삼 년 내에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려 생각 중입니다. 이 곳은 춥고 잔인한 기운이 가득하여 더 이상은 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Alan Moore의 소회는 Evey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큰 공포와 증오가 짓누르고 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은 2008년. V는 1981년의 우리가 아닌 2008년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1981년의 우리에게 V의 메시지가 공포를 이겨내는 증오의 힘과 공포의 원천에 대한 복수를 전하는 거라면, 2008년의 우리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전하지 않을까.

암울했던 시절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부정되던 공포를 이겨내고 증오의 힘을 모아 원천을 타격했던 동력이 Vendetta(복수)였다면, 이제 그 V는 사랑과 믿음을 원천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승리의 Victory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엔딩,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영진공 이규훈


잡담.
1.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Guy Fawkes는 실존인물이다. V가 쓰고있는 가면도 Guy Fawkes 가면이다. 그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자 1605년 11월 5일에 의회 건물 지하에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했으나 일당 중 밀고자의 밀고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혔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2. 원작 속 Norsefire 집단의 구호는 “Strength Through Purity, Purity Thorough Faith(국가의 힘은 순결성에서, 순결성은 종교적 신념에서)” 이지만 영화에서는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국가의 힘은 단합을 통해, 단합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