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 철학은 떡밥 … 그 보다는 재회의 감동

<공각기동대>(1995) 이후 무려 9년만에 만들어진 속편 <이노센스>도 주인공은 바트나 토구사가 아니라, 변함 없이 쿠사나기 소령이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곁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 복음서가 <공각기동대>였다면 <이노센스>는 그 이후 예수를 사랑하던 자들의 이야기인 사도행전이고 바울의 서신들이다.

복음은 이미 <공각기동대>에서 완성되었으니 <이노센스>의 세계관과 존재론에 새로운 발전이 있을 이유가 없다. 주제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노센스>는 2편이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해설서나 찬송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내러티브의 측면에서는 일종의 에필로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가 있다. 다시 성서로 치자면, 복음서 가운데 유일한 후일담에 해당되는 요한복음 21장이 바로 <이노센스>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도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러 나가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낚았더랜다. 요한복음 21장은 특히 디베랴 바닷가에 베드로와 도마, 그리고 다른 몇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에 예수가 ‘다시 나타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반복해서 묻고 앞으로 해야할 일을 다시 가르친다.

쿠사나기 소령에 대한 바트의 감정은 연인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또는 부처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졌던 경외감의 요소가 짙게 깔려있다. 극중에서 바트가 ‘나의 수호천사’라고 일컫듯 쿠사나기는 바트의 예수이고 성모 마리아이며 부처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노센스>는 그런 대상에 대한 오랜 그리움과 재회의 감격, 그리고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이별의 애틋함의 감정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공각기동대>의 오랜 팬들은 작품에 담긴 심오한 철학적 질문과 비주얼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쿠사나기 소령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팬들에게 <이노센스>는 가슴 벅찬 재회의 감동을 선사하는, 무척이나 고마운 영화다.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리노로 성장해서 백조처럼 무대 위를 치솟아 오르던 순간 만큼의 감동이다.

<이노센스>의 이런 측면은 메시아적 내러티브에만 천착함으로써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매트릭스>의 속편들과 크게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겐 <이노센스>가 선보이는 화려한 그래픽과 사운드의 완성도나 대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존재론적 경구들의 심오함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항상 화려한 말의 설득 보다는 따뜻한 손 한번 잡는 것으로 쉽게 감동과 변화의 순간에 이르곤 하기 때문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