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이동진 기자의 이명세 감독 인터뷰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가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라고 수상 소감을 쓴 걸 본 적이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지. ‘나는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이다’라고 나도 말하고 싶어. 사실 최근에 어느 자리에서 약간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도 안 웃더라고. 진짜 머쓱해졌지.(웃음)” – 이명세 감독

그래서 저도 머쓱한 말 한마디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조금 더 풀어쓰자면, 저는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하는 영화 관객입니다. Select, See, Share. 세상의 모든 건 과연 세 가지로 이루어졌군요. 더군다나 S만 세 개 씩이나 되시겠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주창하며 개인의 누드 사진까지 끄집어내 까발리던 언론 매체들이 요즘 덮어주느라 바쁜 모 기업집단을 연상시켜서 ‘기분이 나쁩니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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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순수한 영화 관객, 즉 유료 관객(Paying Moviegoer)만이 순수한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업계에 젖줄을 대고 있는 기자나 평론가, 그외 관계자분들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봐야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무관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만 골라 볼 수 있는 ‘영화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이들입니다. (영화 선택의 자유를 가진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써보겠습니다)

특정 영화를 보고 싶은 이유는 사람마다 천차 만별이겠죠. 저도 때로는 그다지 땡기는 영화가 아닌 데도 ‘봐둬야 할 영화’, ‘봐줘야 할 영화’라는 판단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영화 관람에 할애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시간적 여유를 감안하여 제 과거의 경험과 볼 수 있는 영화들에 관한 정보들을 취합해 그 중 가장 보고 싶은 영화만을 골라 봅니다. 여기서 영화 선택의 절대 기준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느냐가 되겠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2시간의 백일몽을 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는 건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일과도 유사합니다. 낯익은 곳에 반복해서 찾아가는 것도 좋은 여행일 수 있지만 특히 영화 관람은 이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입니다. 나의 감각과 사고를 새롭게 해주는 시청각적 체험을 하는 것이 제가 영화 관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니 영화 보는 일이 즐거우려면 그 영화가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완성도’를 갖춰야 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내용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틀에 박힌 상업 영화들을 지양하고 결과적으로 작은 영화들을 주로 골라 보게 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개별 작품이나 영화 이론을 해설하거나 누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영화 관객으로서 좋은 영화 한편을 보고 난 기쁜 마음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블로그에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것도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누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이 ‘영화 관객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화 관객이 특정 영화에 대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좋다, 싫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저의 영화 글쓰기는 언제나 ‘내가 그 영화를 보는 중에 좋았느냐 싫었느냐’를 명확히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 영화를 보는 일이 즐거웠던지 즐겁지 않았던지, 그 이유를 좀 더 찾아보는 일이 저의 영화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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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이 말은 다른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게 당부해두는 말입니다. 지난 한 주 저는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하는 데에 평소와는 다른 경우들을 경험했습니다.

– 이명세 감독의 <M> :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 않았는데 비평적인 관점에서는 뛰어난 영화
–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 않았는데 만든 이의 사정을 고려하면 투정부리기 힘든 영화 + 감독, 주연배우 무대인사
– 인디스토리 초청 <판타스틱 자살소동> : 내 돈 내고 보지 않고 공짜로 본 영화인데다가 영화를 만든 이들과의 대화 시간까지 참석한 영화

위 세 편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쓸 때마다 저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으로서 해당 영화를 이야기하려는 저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리된 표현이 <M>은 ‘동시대 관객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영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저수지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독립영화’, 그리고 <판타스틱 자살소동>은 ‘세 작품이 각자 다른 색깔을 가진 영화'(라는 적당한 발림)이었습니다. <M>은 비교적 제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적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수지에서 건친 치타>와 <판타스틱 자살소동>은 여전히 저 스스로에게 완전하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부끄러울 일은 없게 썼지만 역시 다른 때보다 직설적이지 못했습니다.

영화 관객이 공짜로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만든 이들과 접촉을 갖는다는 건 그 영화에 대해 100% 솔직하지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재삼 확인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아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내내 머리 속을 맴돌던 그 얘기를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됐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내 개인의 경험과 직관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며,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었던 그대로 이야기하는 영화 관객이다. 나는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글을 쓴다. 굳게 다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세요. 그 얘깁니다.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영진공 신어지

[가사 검열] Howard The Duck

오늘의 가사 검열은 노래가 아니라 영화 소개가 되겠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는 1986년 개봉작인 헐리우드 영화 <Howard The Duck>.  Lucas Film이 제작하고 유니버셜이 배급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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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요사이 유행처럼 제작되고 있는 Marvel Comics 원작 영화의 선두주자이며,
개봉 당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까지 받은 최초의 Marvel Comics 원작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지금은 거물이 된 Tim Robbins가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고, <Back To The Future>에서 MIchael J. Fox의 엄마로 나왔던 Lea Thompson이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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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은 얼떨결에 지구에 오게 된 오리 행성의 평범한 샐러리맨 Howard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코메디 SF물인데,

걸작영화도 아니고 숨겨진 보석 같은 영화라고 할 수도 없는 이 영화이지만 한 번 보게되면 좀체로 미워할 수 없는 영화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영화의 Ending Scene을 검열토록 하겠다.

그럼 모두들 즐감~ ^.^

Howard The Duck (1986)
Directed By Willard Huyck


영진공 이규훈

질리언 암스트롱, <나의 화려한 인생>

호주의 유명 여성작가 사라 마일즈 프랭클린의 사랑받는 원작소설, [나의 화려한 인생]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이것은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라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19살 소녀가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을 목적으로 썼다는 이 책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지점, 영국의 귀족제도 따위를 그대로 들고 온 사람도 있었지만, “(원주민들을 내쫓거나 죽이고) 저 너른 호주 땅을 개간하느라” 여성의 노동력도 필요로 했고, 그러한 개간을 통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쉽게 부자가 되기도 하였고, 혹은 영국 본국에선 신분이 높았건 말건 이곳에서 황무지에서 뒹굴며 일하는 소위 ‘개척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황무지에서 외롭게 자라던 소녀가 또래의 몇 안 되는 여자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로맨틱한, 그러나 로맨틱하지 않은 엔딩으로 끝나는 소녀소설이 바로 [나의 화려한 인생]이었다. 이 책은, 1903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출판된 뒤 큰 인기를 끌었고, 사라 마일즈 프랭클린은 ‘마일즈 프랭클린’이라는 필명으로 그 뒤 두어 권의 소설을 더 썼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아는데, 하여간 호주의 권위있는 문학상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일즈 프랭클린 상’이라는 걸 보면, 호주에서 마일즈 프랭클린이 받는 사랑이 매우 크단 걸 알 수 있다. 질리언 암스트롱의 데뷔작은 바로 호주의 이 대표적인 소설, [나의 화려한 인생]을 원작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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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 데이비스와 샘 닐의 멋진 연기와 화학반응이 빛난다


 19세기의 사람들이 그대로 호주로 이주한 만큼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얼핏 제인 오스틴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독립심이 강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제도가 정착되지 않고 그 모든 제도보다 ‘개척’이 먼저였던 호주라는 환경 때문이리라. 제인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돈많고 잘난 남자와 결혼을 통해 해피엔딩을 맞는 반면, 시빌라는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 대신, 그리고 목장과 황무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땅을 개간하는 개척자 여성이 되는 대신 작가가 되는 길을 택한다. 가난과 고난을 무릅쓰고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택하는 시빌라의 선택은, 그녀가 거부했던 소위 ‘호주의 개척자 농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오래 전 이미 나이가 든 주디 데이비스의 영화 한 편을 보고 그녀에게 반한 적이 있었는데(<사랑의 금고털이>라는 소품에서 조연이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한국에서 내가 볼 수 있음직한 다른 영화가 보이지 않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녀의 젊고 어린 시절의 영화를 이런 식(영화제에서 ‘보는’ 것뿐 아니라, 번역작업을 한 인연…)으로 접하게 되다니. 게다가 내겐 <피아노>에서 사이코틱하고 약간 배나온 아저씨로 처음 만나 그대로 각인돼 버린(나이 드실수록 웬지 얼굴에 심술보가 붙어있는 것 같은 인상…) 샘 닐이 이토록 매력적이고 단아한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조금 쇼킹했고.  하여간 둘의 화학반응이 매우 좋아서, 시빌라가 나무 위에서 꽃을 따다가 처음 해리 비첨(샘 닐)과 만나는 장면에서 뒤로 넘어가게 웃었고, ‘격한’ 베개 싸움을 포함, 서로 감정이 오고가는 장면들을 매우 즐겁게 웃으며 보고 작업했다. 매력적이고 활달하고 젊은, 주디 데이비스가 열연하는 빨강 머리의 아가씨 시빌라의 모습은 빨간머리 앤과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거씨 대고모님의 말대로, 시빌라 때문에 다른 양가집 규수들이 모두 ‘핏기없은 나무토막’으로 보이니. 여염집 처녀가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에 올라가 꽃을 따고, 노래를 부르며 사과를 와삭 베어무는 것도 어쩜 꼭 닮았다. 제인 오스틴과 빨간머리 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


영진공 노바리

썸머 타임머신 블루스 (Summer Timemachine Blue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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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의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같이 아롱아롱거리는 센스가 돋보이는 땀내나는 여름영화. 비록 소탈하면서도 유쾌 발랄하고 이쁘고 큐티한 매력을 지닌 완소 우에노 주리양이 맡은 캐릭터가 그닥 비중있지 않으며 여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흔해빠진 해변의 비키니 아가씨조차 나오지 않고, 시작부터 후덥지근한 남정내들이 화면을 누비고 다녀 영 불쾌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영화는 일본 영화 특유의 유쾌한 B급 센스를 보여준다.
 
지구의 지도자 존 코너를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온 T-800의 범지구적 사명감 따위는 가볍게 코웃음 치듯 한여름 에어콘 바람을 쐬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에어콘 리모컨이 고장나기 전 시간으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로 SF동아리 부원들의 절박한 생존본능이 영화전반에 구구절절 수놓여 있다. 시간의 인과율과 타임머신이라는 시공간적 소재를 잘 꼬았다가 재밌게 풀어놓고 있는데 영화가 흐를수록 하나씩 밝혀지는 이야기들은 마음에 거친 웃음의 쓰나미를 일으킨다. 가까운 미래 1인 1타임머신의 시대를 예견하는 듯 소박하기 그지없는 타임머신의 꼬라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진공 self_fish

소설 “파피용”을 통해서 본 과학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기상이변, 새로운 전염병의 등장, 핵무기 등 인류는 내일 당장 하느님의 나라로 승천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스팩타클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똥줄타는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인류는 우주 탐사를 한 이래로 우주 저 너머 제 2의 스위트 홈을 꾸릴 만한 행성을 찾고 있다. 그나마 만만한 태양계 안에서는 이 한 몸 뉘일 만한 곳이 없으니 지금 당장은 멀어서 못가지만 우선은 찾아놓고 보자는 심정으로 인근 은하계까지 눈을 돌려보지만 멀기도 멀거니와 행성에 초거대 사이키 조명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니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는 행성을 관측할 방법은 전무하였다. 그러나 불굴의 정신의 소유자들인 천문학자들은 열심히 해골을 굴린 끝에 한가지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태양은 가만히 자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행성들 간의 인력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태양 다음으로 큰 두 번째 형님인 목성의 인력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태양의 진동주기인 12년 주기로 흔들리며 태양과 비슷한 크기와 밝기의 별을 찾으려 하였다. 오랜 관찰 끝에 진동하는 별은 찾지만 아쉽게도 태양과 비슷한 주기의 별을 찾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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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99년에 촬영한 태양을 지나가는 수성의 모습이다. 이렇게
행성이 별을 지나갈 때 밝기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진동하는
별의 밝기의 변화를 관찰하면 그 별을 공전하고 있는 행성의 크기를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발견한 진동하는 별들. 발견한 별들 중에는 4.2일을 주기로
흔들리는 별도 있었다. 이는 별을 흔들 정도로 커다란 행성이 엄청난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태양을 목성이 4.2일만에 한바퀴
도는 꼴이라고 할까. 이렇게 전혀 생각지 못한 발견에 당시
천문학계는 화들짝 놀랬다고.



제 2의 스위트 홈을 찾는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지만 영화나 소설들은 이런 매력적인 소재를 놓칠리 없으니 지금까지 많은 SF장르에서 제 2의 지구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인기있는 소재였다. 이번에 출간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파피용’ 역시 인간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막되먹은 본성으로 인해 막장으로 치닫는 지구를 탈출해 새로운 행성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 2의 지구까지 천 년이 걸리는 여행. 짧지 않는 기간을 우주선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하는 14만 4천명의 인간들. 이들은 지구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우주선 안에 구축하려 한다. 그래서 그려지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 하지만 공산주의 이론이 고달픈 현실을 바꿔보려는 선한 가슴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일그러진 결과들을 초래했듯이 소설 속에서도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전복되고 지구에서 인류가 보여주었던 폭력적인 역사들이 우주선 안에서 고스란히 재연하게 된다. 




같은 소재를 다룬 여타의 SF소설에 비한다면 이번 베르나르의 작품은 그다지 특별함을 보여주지 못하며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종교적인 비유와 결말 역시 진부하다. 특히 미국 sci-fi 채널에서 방영중인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비슷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아주 높은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미 ‘배틀스타’를 본 독자라면 ‘빠삐용’은 꽤나 싱거울 듯 하다. 이런 실망스러운 작품성은 예외로 두고 눈길을 끄는 것은 작품에서 인류가 탈출하기 위해 건조한 우주선이 광자를 이용해 움직인 다는 점이다. 광자를 이용한 우주선은 현재 기초단계의 연구가 진행 중인, 결코 허무맹랑한 이론이 아니다.




빛은 무엇일까? 이 뒷골 땡기는 질문에 일찍이 맥스웰 옹은 ‘빛은 전자기파’임을 주장하셨고 아인슈타인 옹은 ‘빛은 에너지 덩어리(광양자)’라고 주장하셨다. 두 천재의 주장은 실험으로 증명되었고 결국 빛은 전자기파이며 동시에 광자로 행동하는 것이 들통나 버렸다. 빛이 에너지 덩어리라는 말은 곧 빛을 받는 물체는 빛으로부터 압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에는 왠지 몸이 무겁다고 느끼지 않았는가? 그건 바로 태양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광자로 인해 압력을 받아서…..는 아니고. 그건 단지 기력이 허해서 그런거고…..일반적으로 빛의 압력은 극히 약해서 일상 생활에서는 느껴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공기 저항이 없는 우주에서는 근소한 빛의 압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혜성의 꼬리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빛의 압력과 태양풍의 영향으로
태양과는 반대쪽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 발사한 탐사선 ‘하야부사‘. 2005년 소행성 ’이토카와‘에 착륙해
최초 소행성 탐사라는 큰 업적을 달성했는데 당시 ’하야부사‘가
’이토카와‘에 착륙하려 접근했을 때 소행성으로부터의 받는 중력보다
태양빛으로부터 받는 압력이 훨씬 강했다고 한다.




이런 빛의 압력을 이용하여 현재 우주 탐사선 계획이 진행중이다. 탐사선에 돛을 달고 태양빛의 압력으로 요트처럼 추진하는 것으로 ‘파피용’에서 보여지는 이론과 같다. ‘파피용’에서는 태양계 내에서는 태양열을 저장하고 광자의 압력을 이용해서 나아가고 빛이 닿지 않는 태양계 외부에서는 비축해놓은 태양열을 이용하는데 현실에서 역시 광자의 압력을 이용하는 탐사선 계획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서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기초 실험단계에 있으며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에서는 2004년 지름 10미터 돛을 우주에 전개시키는 실험에 성공하였고 같은 연구가 미국 등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계발이 성공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쉽게(?) 화성 밖으로의 탐사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연구가 진행중인 금속박으로 된 돛을 가지고 있는 우주 범선의 모습.



광자를 이용한 우주선 연구와 별개로 화성을 대상으로 지구화 연구도 진행 중이다. 화성에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켜 대기 온도를 상승, 내부 얼음을 녹여 결과적으로 지구처럼 거주 가능한 별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는 탈출할 공간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지구를 살릴 획기적인 행동은 하지 못하고 있다.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한 지구의 앞날은 일찍부터 예상되었지만 그에비해 우리의 행동은 정작 바뀐게 별로 없다. 미국은 여전히 기후협약을 하지 않겠다고 배짱부리고 있으며 환경정책은 언제나 계발논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핵무기는 폐기되지 않고 인류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하든, 아니면 안드로메다로 이주하든 지금의 인류라면 어딜가나 지구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탈출이 희망이 될 수는 없다. 

노아의 방주는 지구인에게는 희망의 씨앗이겠지만 우주에게는 불행의 씨앗이지 않을까?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