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애벗 핸더슨 세이어(Abbott H. Thayer, 1849~1921)


 


 

일찍부터 그림에 눈을 떠 무려 열여덟 살에 화가생활을 시작한 뉴잉글랜드 출신의 화가 세이어는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여자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많은 여학생과 여조교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신비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성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1887년 자신의 딸 메리의 초상화를 그리며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은 것을 계기로 여성의 등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Angel.




 


 

그러나 세이어는 자나깨나 머릿속에 여자생각만으로 꽉 차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자 말고도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것은 술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Monadnock in Winter.




 


 

세이어는 어린 시절 뉴햄프셔의 깡촌에서 자연에 푹 빠져서 지냈으며 오듀본의 [아메리카의 새 Bird of America]를 탐독하는 등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그는 여자도 좋아했지만 자연도 즐겨 그리곤 하였다.

 


그런 세이어에겐 언제부턴가 야생동물들을 그리면서 자꾸 뭔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많은 동물들이 등은 짙은 색이고 배는 흰색이나 옅은 색으로 되어있는데, 햇볕 아래서는 등이 무슨 색깔이든 간에 털이 빛을 반사시켜 하얗게 빛나고, 반대로 배는 그늘이 지면서 본래의 보다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동물들은 보다 평평하게 보이며 윤곽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동물들이 평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세이어의 눈에는 이것이 유독 더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나 보다. 세이어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동물들의 이러한 배색과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하였고 1896년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정리하여 [오크 The Auk]라는 자연사 잡지에 [보호색의 기본 법칙 The law which underlies protective colo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동물들의 배가 밀가루라도 바른 듯 하얗색을 띄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 방어피음 원리


 


 



동물들은 그늘이 지는 배 쪽의 색깔은 밝게 하고, 어두운 색의 등은 빛을 반사시켜 새하얗게 함으로써 빛이 비칠 때 대비효과를 줄인다. 그 결과 배경과 더 구분이 되지 않고 상쇄시키는 배색을 띄도록 진화한 것이다. 이런 동물들의 배색을 방어피음(防禦被陰, countershading)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생물학자는 세이어의 방어피음 개념을 환영했고, 세이어의 이론은 1902년에 [네이처]를 통해 영국 대중에게도 전해졌다.



 


 


 


“자연은 하늘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경향이 있는 부위는 가장 검게 하고 그 반대쪽은 가장 희게 하는 식으로 동물을 칠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회화와 생물학이라는 은하 두세 개는 너끈히 들어갈 법한 학문 간의 거리를 꿰뚫으며 화가로서 생물학적 성찰을 이룬 것이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평생을 연구에 매달려도 과학법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비해,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세이어의 은폐색 법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과학법칙을 가지게 되었다.

 


본업이 아닌 이들이 본업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이루는 이런 뭐같은 상황은 정말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일명 ‘신은 공평하다’라는 회피기제를 보인다. 이쁜 애들은 머리가 나쁘다던가 저 잘생긴 놈은 분명 발냄새가 고약할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어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생존본능 말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런 편견들은 일정부분 들어맞는다. 완벽한 사람이란 신조차 용서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 세이어는 어땠을까? 암내가 심했을까? 성격이 심한 무좀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림도 잘그리고 머리도 좋은 외계인이었을까?


 


 


 




연기, 감독, 그림, 노래, 작사, 작곡 등 못하는게 없는 구켈란젤로 구혜선양. 

그녀는 외계인일까? 


 



 


 


다행(?)스럽게도 세이어가 중대한 과학법칙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는 과학자적인 기질과는 매우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빠져있었고 심각한 열등감에 따른 자기과시와 자만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자연계의 원리인 ‘방어피음’ 개념에 심취하여 자신이 고고한 식견을 가진 화가라는, 걸리면 약도 없다는 왕자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종종 망언을 내뱉고는 했다.


 


 


 


“물론 그런 모방을 판단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따라서 나는 전문가로서 모방 여부를 판결한다.” (Thayer, 1911)


 


 


 


아들인 제럴드와 함께 쓴 대작 [동물계의 은폐색](1909)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쯤, 그의 왕자병은 정점에 이르렀고 듣기에도 민망한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우리 책은 이론이 아니라 라듐의 엑스선처럼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계시를 전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알다시피 화가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 글에 들어가는 그림을 직접 그려 넣듯이 세이어도 자신의 재능을 썩힐 리가 만무했다.

 


그는 생물들의 무늬는 오로지 은폐색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그런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선 그 동물들 대부분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보였지만 말이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