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재발견: 이거슨 판타지판 <파업전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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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봤습니다. 제가 VOD로 처음 본 영화입니다.
집에 설치된 케이블TV가 VOD 서비스도 제공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동안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죠. 그러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빌려 보기로 했습니다. 하필 동네 비디오방에 DVD가 다 나가서 결국 테이프를 빌려왔죠. 근데 이 뭥미, 테이프를 넣고 틀어보니 거의 몇 년간 DVD만 가끔 보고 테이프는 틀어본 적 없던 우리 콤보 데크께서 그쪽 데크의 정줄을 살짝 놓으셨더군요. 화면은 그럭저럭 나오는데 소리가… -_-;;; 테이프 클리너(이것도 몇 년 된 물건)도 돌려보고 이것저것 해봐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이미 빌린 거 반품하기도 그렇고, 대신 볼 다른 것도 없고, 난감해하다가 VOD에 눈을 돌렸죠.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처음으로 VOD 버튼을 눌러서 월정액 1만원을 결재하고는 캐치온디맨드의 VOD로 마침내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길다.

어쨌든 이런 긴 사연을 거쳐 보게 된 <해리포더와 불사조기사단>, 정말 놀라웠습니다.
개봉당시에 극장에서 보았을 때는 이 영화가 이런 영화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그러냐고요? 이 영화의 설정들을 하나씩 살펴보죠.

설정1. 어떤 재난이 왔으나 오지 않았다고 우기는 정부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재난은 14년 전에 이미 한번 일어난 바 있습니다.
볼드모트는 이미 지난 편에서 환생했습니다. 세상은 또 다시 위기에 처한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마법부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악착같이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이를 경고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처벌하려 듭니다.

설정2. 그 정부는 위협에 처해서 방어를 한 사람을 금지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과도하게 처벌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그 위협은 알고 보니 정부에서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해리포터가 머글동네에서 금지마법을 쓴 이유는 디멘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과 사촌을 방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금지마법을 썼다는 사실만 가지고 해리를 처벌하려고 할 뿐, 왜 그 마법을 써야 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디멘터는 마법부의 통제를 받는 존재들이니 해리가 디멘터 때문에 마법을 써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들의 실수가 드러나게 되지요.

설정3. 실제 문제의 원인은 따로 있으나 정부에서는 엉뚱한 다른 인물을 배후로 지목합니다.
네, 볼드모트가 모든 일의 원인이지만 정부는 뜬금없이 시리우스 블랙을 모든 일의 배후라 주장합니다. 아즈카반 대량탈옥도 그 탈옥범 중에 시리우스의 친척이 있다는 이유로 시리우스 블랙이 배후조종자라고 찍어버리죠. 그 탈옥범이 볼드모트의 하수인이라는 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 아닙니까?
2007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무슨 이따위 말도 안되는 설정이 다 있냐?” 싶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위기가 왔는데도 그걸 부정하며 생사람을 잡겠나 싶었죠. 게다가 그 위기는 이미 한번 겪어본 거라 징후를 잘 알고 있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아무리 정부가 사실을 부인하는데 매달린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애들까지 협박하고 처벌하겠다고 달려들겠나 싶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초기 설정에 공감할 수 없었으니 영화를 보는 내내 데면데면 했었죠.

근데, 2008년 지금, 이 영화의 설정은 더 이상 비현실적인 이야기도, 남 얘기도 아닙니다.
너무 너무 실감나게 다가오는, 바로 이 시대의 이야기죠. 그 실감은 호그와트 학교에서 벌어지는 상황 묘사에서 극에 달합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설정1. 정부는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교육시스템에 몰아넣습니다.
정부의 얼굴마담으로 학교에 파견된 엄브릿지 여사는 마법방어술을 실습이 아니라 이론수업으로 전환합니다. 이유는 학생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어서입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방어술을 배우지 못하면 밖에 나가서 흑마술사에게 정말 죽습니다. 결국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학생들을 죽이는 짓이 되는거죠. 어떤 교육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데, 그 교육의 성취도로 모든 것을 평가하면 학생들은 결국 쓸모없는 교육에 시간을 낭비하고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이 바로 그 결과물이 아닐까요.

설정2. 정부의 새로운 지침은 금지, 금지, 금지입니다.
복도에서 남녀칠세 부동석을 실시하고, 마법을 실제로 쓰는 것도 금지하고, 모든 것을 금지합니다. 금지령은 98개에 달하죠. 왜냐고요? 이 모두가 “올바르고 건전한 학생”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저항하면 스스로 손등에 글자 파넣기 벌을 받습니다.

설정3. 정부의 새로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교사나, 정부의 지침에 저항하는 교사는 걍 퇴출입니다.
학생들에 대한 처벌도 지극히 잔혹합니다.

예지술사인 트릴로니 선생은 한심한 예언을 한다고 퇴출됩니다. 학생들을 잔혹하게 체벌한다고 항의하는 맥고나걸 선생은 충성심이 의심된다는 경고를 받죠. 그리고 마침내 덤블도어 교장까지 퇴출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퇴출시킨 이들은 사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트릴로니 선생의 예언은 볼드모트가 그렇게 애를 써서 찾으려고 하는 열쇠였습니다. 맥고나걸 선생과 덤블도어 교장이야 말로 세상을 어둠의 힘으로부터 지켜낼 인물들이고요.

설정4. 정부의 또 다른 교시는 배신입니다.
네, 이 정부의 교육방침은 배신을 가르칩니다. 배신하고 신고한 학생에게는 상을 줍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협력할 것이 아니라 배신하라.” “상대를 짓밟고 올라가라.” “바로 그것이 옳은 것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어른이 할 짓이 아니고, 정말로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이 있을까 싶었죠. 하지만 중요한 몇몇 학생들이 이에 협력하지 않자, 아예 심문을 하죠.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 …

설정5. 정부의 얼굴마담께서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띈 표정입니다.
돌로레스 엄브릿지의 모든 행동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온화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위와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에, 그녀는 더욱더 무시무시하고 가증스럽죠. 조안롤링이 실제로 이런 인물을 경험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돌로레스 엄브리지 여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온 사방에 혐오감을 유발합니다. 학생들을 모두 앉혀놓고 손등에 글자 파넣기 체벌을 가하면서 평온하고도 자애로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둘러보는 엄브릿지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죠.



이런 무시무시한 인간을 … 씨바 롤링은 천재여 …

솔직히 몸이 후덜덜 떨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우리는 해리포터와 친구들이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하는지 가슴을 졸이며 보게 됩니다. 거기에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을테니까요. 그들이 찾은 해결책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고요. 근데,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동시대성을 담은 영화가 아니라 선동물이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해리포터와 친구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볼까요?

대응1. 해리포터는 먼저 혼자서 사실을 사실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얼굴마담 엄브리지는 해리포터에게 자기 손등을 파내며 반성문을 쓰는 형벌을 가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반성문의 문구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겁니다. 진실을 말한 아이에게 바로 그 진실을 무시하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지독한 학습법이 또 있을까요? 그 결과 해리는 좌절하고 홀로 고독에 빠집니다.

대응2. 해리포터는 친구들과 연대합니다.
하지만 그런 해리를 친구들은 놓아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덤블도어의 군대’라는 이름의 연대를 결성하게 됩니다. 해리는 혼자서 짜증내는 아이에서 친구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책임감있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믿음은 마지막 순간 그를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합니다. 볼드모트 군대에겐 없고 해리 네에겐 있는 ‘그것’은 바로 우정 혹은 동료애였던 것이죠.

대응3. 이들은 원래 자기들이 해야 할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비밀장소에서 진짜 자기들이 배워야 할 것들, 진짜 마법방어술을 스스로 배워갑니다. 학교가 금지한 것을 배울 때 학습 동기는 지독하게 높아지고 효과도 배가됩니다. 이들은 친구들의 성취를 보며 자기도 할 수 있다 혹은 해야 한다는 동기를 얻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또한 그 경쟁은 나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이 살기 위해서 벌이는 것이기에 서로의 성취를 축하하고 진심으로 부러워해줍니다. 그 비밀의 장소 밖에서 어떤 괴상한 교육이 진행되는지와 비교되면서 진정한 교육의 모습이 무엇인지 눈물나게 보여집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저항 다음에 조직적인 저항이 만들어진다는 원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

대응4. 일부는 정부의 금지를 그냥 깨버립니다.
위즐리네 쌍둥이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학교가 병신이 되자 그냥 탈학교를 선택합니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크게 한방 엿을 먹이고요. 이들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일까요? 아닐것 같네요. 이들은 이 소동을 통해서 자기네 상품의 충성스런 고객을 확보했습니다. 이들이 마지막에 사라지면서 남기는 메시지는 자기네 브랜드입니다. 이제 위즐리는 단순히 짓궂은 장난감을 파는 이들이 아니라 저항정신의 상징이 된거죠.

영화는 마침내 해리네 친구들이 볼드모트 군대와 싸우고, 그들이 비록 이기지는 못해도 그들의 노력 덕분에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무능한 정부당국자들은 이 모든 일이 벌어질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 정부당국자들이 말만 믿고 넋놓고 있었더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 했다는 거죠. 여튼 뒤늦게야 사실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후속편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니까요.



  이들의 승리!

자, 이 영화의 결말은 무슨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이야기가 될겁니다.
학교와 정부가 헛소리를 하면 순응하지 말고 저항하라.
혼자서는 어려우니 동료와 조직을 만들어서 저항하라.
그리고 정부가 내놓은 허황한 금지는 무시하고 깨부셔라.
헛소리를 하는 인간은 그들이 어른이든 애이든 진실을 모르는 자들이고 진실을 모르면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허수아비일 뿐이다.
진실에 따라서 움직여라. 진실이 힘이다.

이거, 보통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청소년 판타지판 <파업전야>에 가깝습니다. ㅎㅎㅎ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은 2007년 7월에 개봉했습니다만,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공중파 TV에서 방송되지 않고 있습니다. 보통 1년이 지나면 연말특집 편성에 들어갈 만한데 말이죠. 혹시 그 이유가 이 불온한 내용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들도 한번 다시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 개봉당시에는 관객평가가 안 좋았습니다.
다들 저와 비슷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때는 못 보았던 두근두근한 감성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이렇게 위안을 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2008년은 이 영화를 재발견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절라 씨바 조또) “고마운” 한 해였다고요.


영진공 짱가


“언론노조의 총파업을 지지합니다.”

영진공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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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국가의 신화 … 2008년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제사면-인권위원회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날(Amnesty International)의 노마 강 무이코(Norma Kang Muico) 조사관이 오늘(2008. 7. 18)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발견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보고(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했다. 한국정부는 경찰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적법한 수사와 처벌, 그리고 징집된 전경들이 시위현장으로 내몰리는 것에 대한 재고를 권고했다. 엠네스티의 권고는 강제성이 없는 것이기에 특별한 변화가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의견을 내기는 힘들다. 18일 오전 국회에 출석한 한승수 총리가 물대포 사용을 ‘안전’한 진압장치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후 최루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자세한 사항은 여기)고 한다. 이것이 2008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일상화된 권력집단의 물리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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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로고>

  지난 10년간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폭력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게 아니다. 각 사업장, 재개발 마을, 거리 노점상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은 지난 10년간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었다. 폭력의 주체는 전경이 되기도 했지만 사업주와 용역관계를 맺는 폭력집단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동자가 없이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많게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인 시위가 경찰에 의해 전면적인 폭력으로 해산되는 사태는 15년 가까이 만에 처음이기에 놀라움과 두려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무리해서 단순화 시켜보면 계약관계로 맺어져있다. 현대사회의 규모가 직접정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가-정부는 국민을 대리한다. 이 간단한 법칙은 사실 실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신화를 꾸준히 생산한 발원지는 국민-시민이 아니라 이들을 통치하는 국가-정부이다. 폭력의 역사로 점철된 국민국가 200여년을 가리고 포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국민국가는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들어진 신화’는 국민국가의 ‘헌법’을 통해 천명되고, ‘교육’을 통해 유포된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지만 이 신화가 잠깐씩 현실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87년이 그러했다. (지금의 촛불집회도 비슷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자) 쉽게 말해 만들어진 신화를 어느새 진실이라 믿는 사람들에 의해,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모여 신화가 현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화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인간의 힘이란 때로 신화도 현실로 살짝 현신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신동엽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말 할 때 그 하늘은 그렇게 잠시 만들어진 신화가 현실에 잠시 실현되는 그 때이다. 그 현신을 본 사람들이 얻는 상징적 힘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신화의 거대한 물줄기는 어느새 다시금 시냇물만도 못한 크기로 작아져 스며들어버린다. 만들어진 신화도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는 정말 신화로 작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열망이 1987년 이후, 이렇게 더 급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의 매진으로 바뀐 것, 혹은 2004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100만명의 촛불이 결국 2MB정권을 창출한 것 역시 배신이나 잘못된 굴절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 신화(=국가는 국민에 의해 구성되고 만들어졌다)이기 때문이다. 워낙 신화라는 것의 작동원리가 그런 것이니까. (이에 대해서는 질베르트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이 좋은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제는 2008년 한국은 이런 신화조차 짓밟히고 부정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신화를 만들고 퍼뜨린 권력이라는 장치가 신화를 믿게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신화대신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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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과 국가의 계약을 통해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정당성의 근원이 무오류의 어떤 ‘법칙’이 아닌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무오류의 법칙이란 신앙과 같다. 르네상스 시기가 근대의 미명이 될 지언정 근대라고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근대는 계몽주의적 진보를 믿는 사회이며, 계몽주의의 바탕은 계약에 의한 사회구조를 담보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과학이 신의 영역과 바톤 터치를 한 모양새를 갖는다. 즉 과학적 법칙이 밝혀지면 이 현상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원인은 물론 미래까지도 확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무오류성의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비교문화적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자나 종교 맹신주의자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다. 근대는 이 무오류성을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는 올드 패션드 맑시스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근대의 ‘계약’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신화이며, 이는 일종의 전-근대 사회가 가졌던 무오류성의 무엇(신앙, 왕권, 무소불위의 과학)의 대치물이다. 탈/후기 근대에 이르러서 바로 이 계약도 무오류한 것이 아니라는 성찰성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무오류한 계약 자체를 의심하고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난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지게 되는 것도 계약의 무오류성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이해관계를 넘어선 인권의 중요성, 또는 인간 이외의 환경이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 성찰적 깨달음에서 연유한다.  

  말이 좀 많이 돌았다. 이제 한국 사회로 다시 돌아와보자. 2008년 들어 수많은 토론 자리에서 듣게 되는 야당의 이야기; 속단하지 말고 믿고 따라와다오, 국민여러분 저를 믿고 맡겨주시시오,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지금은 위기니 지도력이 필요한 때, ….. 여기에는 계약의 기본이 되는 상호간의 검토나 건설적 토론의 틈이 들어설 수 없다. 믿고 따르라…. 믿고 따르면 되지, 왜 시비를 거냐, 심지어 좌파적 사고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니라 계약을 이행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계약 내용에 대한 재검토와 이행과정에 대한 검수가 필요한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정부는 계약이 아닌 무오류의 신앙을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꺼내 놓는다. 그것이 모든 정권, 권력의 속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도가 지나치다. 한국의 ‘근대화’를 외치던 누구의 시대가 자꾸 떠오른다.

  시작에서 이야기한 엠네스티의 지적과 동시에 나오는 총리의 발언이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계약 진행사항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제3자의 감사가 이뤄질 때, 근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계약은 다시금 돌아보고 점검하고 수정하고 진행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전근대적 신앙의 세계에서는 제3자의 말은 우리를 해하는 세력의 얘기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사고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엠네스티의 지적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이기는 커녕 반드시 분쇄시켜야 할 악의 무리의 악의 발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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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근대 자체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근대가 작동되는 과정에 담긴 수많은 폭력과 억압이 문제이며 그 해결책은 근대의 여러 측면에 소소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담겨있다고 믿는 편이다. 근대는 여전히 역사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근대에서 진일보한 세계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에겐 전근대적인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타협과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없애야 할 악으로 보인다. 문제는 무오류성의 확실성이 갖는 죽은 기운이다. 무오류한 과학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단한다. 여기에는 불확실성이 가지는 건강한 생명력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믿고 맡기면 모든 것은 다 잘되게 되어있다는 신앙심에는 불확실성이 들어가서도 안되고 허용되지도 않는다. 즉 무오류의 신앙은 도덕과 같은 권위를 획득하고, 이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계약은 불확실성의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재계약, 계약 수정, 나아가 계약 파기라는 불확실성이 작동할 수 있다. 신앙이 아닌 인문-사회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의 작동이 가져오는 역동적인 가능성을 연구하고 의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회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 2008년 사회계약이라는 신화를 책 속의 신화로 봉인하고 무오류의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정부와 사회계약 신화를 현실로 만들려는 시민들의 대립은 슬프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를 한국의 문제로만 볼 것인지 혹은 더 큰 세계와의 연결점을 찾아 글로벌 시대의 시민의 문제로 만들 것인지는 시민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전-근대로 회귀하려는 정부는 분명 시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홍수와 밀물을 만나 역류하는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그 잠시를 지나면 다시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영구한 역류란 있을 수 없다.


영진공 헤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