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정체감 유형의 차이, 세상의 차이: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에게는 누구나 정체감(Identity)이 있다. 정체감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같은 질문도 역시 이 정체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내 이름은 누구이고, 나는 남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사람 구경하는 것과 만화와 게임과 영화를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식으로 답한다. 이게 바로 내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James Marcia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과 1980년에 미국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면담을 한 결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분류했다.

첫 번째 방법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부터 부모가 가라는 학교로 진학하고, 부모가 사귀라는 친구를 사귀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가 지정하는 직업을 택하고, 부모가 골라주거나 부모의 심사를 통과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의심이나 후회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나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 의심이나 후회없이 열심히 살지도 않는 방법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기대를 뒤집어 엎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결국 꿈을 접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확산(Identity difused)이라고 부른다. 정체감이 한군데에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꿈과 실제 삶이 다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방법은 결정하거나 어디에 속하기를 미루고 이것저것 탐색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간다거나, 여기저기에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하고(단 자기가 원해서) 정규직을 갖기를 피한다거나, 연애는 여러번 하는데 누구와 정착하기는 미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도 정체감 유형중의 하나로 정체감 유예(Moratorium)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건 결국 뭐든 일단 미루고 보겠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방법은 사회나 주변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찾고 갈 길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라고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 하지 않는 짓을 하는 모난 돌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을 많이 맞는다. 즉 고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알콜중독도 많고 속버리고 심장이 고장난 사람도 많다. 물론 용기와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중 어떤 방법이 정체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면, 정체감 유실이 최선이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이미 한번 살아본 부모의 말을 듣는게 최선이란 말이다.

뭐, 꼴에 사춘기라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시키는대로 하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체감 유실이라도 해주는게 편하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더라도 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정체감 성취가 제일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그럴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한다면, 정체감 유실이나 확산은 최악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선배들의 생각은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오락실에서만 게임을 할 수 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가 프로게이머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제작비 1억원 시대의 영화판 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평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판의 룰에 적응할 수 있겟는가. 이전과는 다른 룰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남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남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싶어한다. 나 스스로 독립해서 험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친구』에서 상택이가 선택한 것도 결국 정체감 확산의 삶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기한 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결국 상택(서태화) 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상택이 자신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준석(유오성)이와 동수(장동건)다.

언제나 준석이가 뭘 했고, 동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상택이 본인의 이야기는 그 인생을 갈라놓은 극장 사건 빼놓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는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상택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준석이와 동수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범생이 이야기꾼은 오직 마음 속에만 그런 꿈을 담아두고 몸은 부모와 주변에서 기대하는 학삐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실, 1960-70년대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거의다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먼 곳에 파랑새가 날아다녀도 결국 꿀꿀하고 칙칙한 현실과 살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다른 삶을 살기는 두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택이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준석이도 동수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라.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가업인 장의사도 버리고 부모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갔던, 정체감 성취에 제일 가까웠던 동수는 수십방의 칼침을 맞고 죽어버린다. “좋건 싫건 시키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고생한다.” 그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자아감 성취를 향하던 동수

그런데 한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다른 정체감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현수(권상우)는 상택이처럼 우식(이정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현수는 반에서 우식이의 위치는 별로 원치 않지만 은주(한가인)를 차지하는 모습만은 뼈저리게 원한다. “내가 아주 힘들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었다.” 라는 말은 현수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다음에 현수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변신을 한다. 존재감 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사상 최고의 폭력사건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평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건 현수는 운동신경도 좋았고 집요한 열성파였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을 싸움 준비로 방향만 조금 바꾸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현수의 정체감은 최소한 유실이나 확산의 유형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범생이 출신으로 정체감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녀석이 현수다. 나중에 정말 그가 정체감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현수의 이 반항은 『친구』에서처럼 처절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퇴학을 당하고 재수를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세상에서 그 정도라면 처벌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결국 시대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세상이 『친구』 시절보다는 조금 느슨해지고, 이전의 룰이 먹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에 현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삶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편안히 기댈 대상이나 가치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삶 말이다. 그건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주 고달픈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자유가 무조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유의 무게를 짊어지고 스스로 노력할 용기가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행복이 찾아올 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