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피로연”,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학부시절, 노년심리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노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을 ‘우내성경애조유의’ 라고 외웠다. 기억력 나쁜 내가 아직도 이건 잘 기억하는걸 보면 참 신묘한 기억법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진다(우).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외모도 삭아버려서 아무도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다가,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점차 밀려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니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늙으면 내향적이 된다(내). 사실 내향성과 우울증은 거의 같이 가는 증상인데 사람들은 침울해지면 밖으로 나도는 대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다. 그게 내향성이다. 평소에 매일같이 친구 불러내서 술 퍼먹던 사람도 우울해지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우울한 자의 유일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니까.

또한 성역할이 바뀐다(성). 대부분 남자 노인들은 여성적이 되고, 여자 노인들은 남성적으로 바뀐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이유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서는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한다.

사실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역할에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데 (그래서 실직한 남자는 심리적으로는 거세된 남자와 비슷하다) 그 사회적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노년기에 남자가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주도권을 놓으면 누군가 그걸 다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여자노인이 하기 쉬우니 여자가 남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늙으면 사람이 경직되어 뻣뻣해진다(경). 신체적으로도 유연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모험심이 줄어들며, 도덕적으로도 경직되어간다. 늙은 개는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한다가 아니라 새 재주를 못 배우는 개가 늙은 개란 얘기다.

늙으면 또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늘어난다(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못 찾는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쓸데없는 물건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니까. 내가 예전에 입었던 옷들, 읽었던 책들, 샀던 물건들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쌓아둘 만큼 정체성의 역사가 길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늙으면 조심성이 늘어난다(조).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늙으면 몸이 특히 뼈가 약해져 잘 부러지는 데다 부러진 뼈가 잘 붙지도 않는다. 정정하던 노인도 한번 뼈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가버리시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활동을 계속 해야지 정신도 온전한데 병원에 오래 누워 있다보면 활동을 못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덩달아 몸도 약해지면서 결국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말년 병장보다는 노인들이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후대에 뭔가 유산을 남기려 하고(유)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의). 사실 유산은 자식을 위해서 남기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유산은 재물인 경우도 있지만, 정신이나 전통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유산상속의 욕구인 것이다. 사실 자식은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산이자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를 낳는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이런 욕구들을 채우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일단 험한 꼴 볼 때까지 오래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거니와, 한해라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비교우위를 갖는 동네이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좀 적었고, 변화가 없는 사회이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별 흠이 되지도 않았고, 후손들이 대부분 고분고분 말을 들어줬으니 전통이라는 유산도 전수하고 삶의 의미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에는 노년이 매우 고달파진다. 순환이 반복되는 사회에서야 한해라도 오래 살아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게 득이 되지만, 작년 다르고 내년 다른 세상에서는 축적된 경험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금방 닥쳐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경직성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돈을 빼고는) 정신적 유산을 받길 원치 않는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오래 살기까지 하니, 그 고달픈 노년을 이전 세대보다 몇 십년이나 더 지속해야 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노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진짜 삶의 진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유산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공수래 공수거라는 진실을 어떻게든 기만해보려는 눈가리고 아옹질이라고 본다. 전통이 제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결국 매 세대마다 결국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전통은 이전세대의 것이 아니라 당대의 것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자손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않는데 손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유전자의 입장에서야 자손이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자손은 그냥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녀라는 화살을 미래로 쏘아보내는 활일 뿐이다. 자녀는 당신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와호장룡』으로 유명해진 “이안”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영화 『결혼 피로연』은 바로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아니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매끈하게 살고 있는 여피족 게이 남자와 그의 미국인 애인(물론 남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게이 남자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전수 받기를 바라고, 자기가 남긴 유산이 지속된다는 증거를 보여주길 다시 말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당연히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행여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아버지의 끝없는 성화에 못이긴 아들은 가짜 신부를 하나 구해서 가짜결혼식을 열어 아버지를 초대한다.

드디어 유산을 남기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날아온 아버지. 그러나 눈치만 100단이 되어버린 노인네는 점차 일이 자신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에겐 사실을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생물학적인 손주를 임신까지 한 명목상의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진짜 애인인 사이먼을 며느리로 인정한다. 아버지가 해변에서 사이먼과 산책을 하다가 건네는 붉은 돈봉투는 바로 그걸 상징한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버지는 빈손으로 대만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 노인네가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금속탐지를 받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평론가 정성일은 그 장면을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 모습은 항복한 패잔병처럼 처연하기보다는 마치 하얀 학이 날개를 펴드는 것처럼 우아했기 때문이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선이지 ……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속세에서 뒹굴어 댈 때, 신선은 학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