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껍질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한번이 되었든 수십번이 되었든 어떤 모양이든지간에 사랑을 하고 만들고,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붙박이장처럼 붙여 들여놓고 살기 마련이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일 또한 실수와 오발의 연속이며 유치한 이기심과 알량한 속셈의 퍼레이드다. 누구라고 그 혐의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동화같은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이 원해서 만들어 지는 것. 화면 안의 해피엔딩-영원히 행복했답니다-은 악성 변비환자의 내일 아침 쾌변처럼 이상향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워져있던 얇디 얇던 콩깍지는 햇빛에 직격당한 흡혈귀의 피부처럼 재가 돼버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마련이고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밤잠을 설치고 심박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던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100원짜리 망치게임의 두더지 대가리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순간, 꿈같던 사랑은 구질구질한 현실로 돌변하고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전혀 남남이던 사람을 순식간에 내 반쪽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감정의 반대편은 이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조작한다. 유치한 짓거리지만 인간은 그렇게 한다. 내가 쪽팔렸던 부분, 내가 싫었던 부분을 싸그리 들어내 봉투 속에 꼭꼭 눌러담아 폐기 처분하고 좋은 기억, 아름다운 기억들만 붙박이 장속에 예쁘게 정리해 넣어 두고 가장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커다랗게 찍어내 철퍼덕 붙여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인다. 내 사랑은 아름다웠네, 내 사랑은 달콤하고 짜릿했네라고.


 


니체가 말한 망각의 축복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편리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랬던 것”으로 바뀌고 아예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림으로써,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추억 : 사랑편]은 완성된다.


사랑은 어쩌면, 뿌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커피처럼 망각으로 덮인 기억 속에서만 달콤한 것일지도.

조엘(“짐 캐리”)도 언젠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냈을 거다.
기억을 제거하는 따위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녀가 남긴 필름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여 가슴떨리게 만들던 그녀의 모습과 귓가에 속삭이던 설레이는 단어들과 예쁜 기억들만으로 만든 추억편을 완성했을 거다.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처 정리를 못했을 뿐. 그는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지근지근 정리하고 골라내고 지워내서 예쁜 이야기책을 완성했을 거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책을 혼자 몇번이고 반복해 읽다보면 또 , 그는 예정된 실패는 까맣게 잊게 되었을 것이고(잊기를 원했으므로),


 


그렇게 스스로 골라내 꼭꼭 담아 버린 것들을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사랑했던 시간보다 몇배의 아픔을 견뎌내던 시간들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그는 클레멘타인을 생각나게 하는 또다른 누군가(기억이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다시 클레멘타인이 되지는 않았을거다)에게 더듬거리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비슷한 지점의 그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아마도.”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유치해도 인간은 그렇게 한다.


 


 


 


영진공 신어지


 


 


 


 


 


 


 


 


 


 


 


 


 


 


 


 


 


 


 


 


 


 


 


 


 


 


 


 


 


 


 


 

“이터널 선샤인” (2004), 네가 내 곁에 있든 없든 난 괜찮아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껍질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한번이 되었든 수십번이 되었든 어떤 모양이든지간에 사랑을 하고 만들고,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붙박이장처럼 붙여 들여놓고 살기 마련이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일 또한 실수와 오발의 연속이며 유치한 이기심과 알량한 속셈의 퍼레이드다. 누구라고 그 혐의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동화같은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이 원해서 만들어 지는 것. 화면 안의 해피엔딩-영원히 행복했답니다-은 악성 변비환자의 내일 아침 쾌변처럼 이상향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워져있던 얇디 얇던 콩깍지는 햇빛에 직격당한 흡혈귀의 피부처럼 재가 되 버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마련이고 진실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밤잠을 설치고 심박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던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100원짜리 망치게임의 두더지 대가리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순간 꿈같던 사랑은 구질구질한 현실로 돌변하고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전혀 남남이던 사람을 순식간에 내 반쪽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감정의 반대편은 이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조작한다. 유치한 짓거리지만 인간은 그렇게 한다. 내가 쪽팔렸던 부분, 내가 싫었던 부분을 싸그리 들어내 봉투 속에 꼭꼭 눌러담아 폐기 처분하고 좋은 기억, 아름다운 기억들만 붙박이 장속에 예쁘게 정리해 넣어 두고 가장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커다랗게 찍어내 철퍼덕 붙여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인다. 내 사랑은 아름다웠네, 내 사랑은 달콤하고 짜릿했네라고.

니체가 말한 망각의 축복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편리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랬던 것”으로 바뀌고 아예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림으로서,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편의 [추억 : 사랑편]은 완성된다.
사랑은 어쩌면, 뿌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커피처럼 망각으로 덮인 기억 속에서만 달콤한 것일지도.



조엘도 언젠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냈을 거다.
 

기억을 제거하는 따위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녀가 남긴 필름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여 가슴떨리게 만들던 그녀의 모습과 귓가에 속삭이던 설레이는 단어들과 예쁜 기억들만으로 만든 추억편을 완성했을 거다.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처 정리를 못했을 뿐. 그는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지근지근 정리하고 골라내고 지워내서 예쁜 이야기책을 완성했을 거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책을 혼자 몇번이고 반복해 읽다보면 또, 그는 예정된 실패는 까맣게 잊게 되었을 것이고(잊기를 원했으므로) 스스로 골라내 꼭꼭 담아 버린 것들을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사랑했던 시간보다 몇배의 아픔을 견뎌내던 시간들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그는 클레멘타인을 생각나게 하는 또다른 누군가(기억이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다시 클레멘타인이 되지는 않았을거다)에게 더듬거리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비슷한 지점의 그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아마도.”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유치해도 인간은 그렇게 한다.

영진공 거의없다

 

“예스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Yes해야 하는가.


부엉이의 입을 틀어막아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예스맨”이 생각보단 흥행이 별론가보다. 나는 영화 볼 여건이 좋지 않은 아줌마지만 그래도 짐캐리께서 나오신다는 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짐 캐리 작품의 경우, 남들이 범작이라 하더라도 나는 늘 기대이상의 만족감을 가져왔다.)

짐캐리의 코메디는 젠체하지 않으면서, 잘난척 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코메디와 철학적 질문이 따로 놀아서 영화의 톤(Tone:어조, 분위기)이 왔다리 갔다리 중구난방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은 질문대로, 코메디는 코메디대로 서로 조화되어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

이번 예스맨도 나는 정말 좋았다.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짐캐리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아주 미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 *




1.
우리는 원래부터 예스맨인걸

사람들이 예스맨에 땡겨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과속스캔들은 제목이 안티”라고 하던데, 사실 예스맨도 제목이 안티다.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한다니. 그게 뭐 대한민국 살면서 특별한 상황이겠는가. 도저히 이게 코메디의 소재가 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총체적 예스맨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응애응애 하고 태어나서, 겨우 5세 이하일 때만 “시져~ 안대~”를 외쳐보다가,(허긴 요샌 조기교육 열풍으로 5세 이전에도 ‘싫어’와 ‘안돼’를 외칠 자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가선 사랑의 매를 맞으며 일제고사에 yes,
대학다니면서는 높은 등록금에도 yes,
시위 현장에 나가서는 물대포를 맞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도 yes,
방송법이 날치기 통과되어도 yes,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예스를 외쳐야 하는 비운의 예스맨들이 아니던가.

아니, 그냥 아주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봐도 그렇다.
직장인들, 가기싫은 회식도 yes, 생산성 없는 야근도 yes, ‘까라면 까’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Yes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영화의 컨셉을 보면 질리는 게 먼저지, 절대 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No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노맨(No Man)”이라는 영화가 나오면 누구든지 보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2.
짐 캐리는 누구에게 Yes라고 하는가

하지만, 짐캐리가 억지로 “yes”를 하게 되면서, 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yes”를 하게 되는지를 보면 “그 예스”와 “이 예스”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 캐리의 yes는 소수자를 향해있다. (영화의 배경이 소수자들의 집합소인 LA라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그가 첫번째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는 노숙자다. 남에게 yes라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할 사람. 그런 소수자에게 yes를 할 수 밖에 없음으로 해서, 차를 태워주고, 핸드폰을 빌려주게 된다. 그 이후, 그가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들도 거의 대부분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후에 여자친구가 되는 앨리스는 제도권의 금융맨이 상대할 리 없었을 폭주족 히피이며, 옆집 할머니는 성적인 농담이 가미되어 약간 희화화 되긴 했지만 하루종일 말상대 할 사람 없는 독거노인이며, 그가 소액대출을 해주게 되는 이들은 작은 자영업을 하는 신용등급이 낮은 자들이다. 심지어 맘에 없는 휴일 근무 요구에 대해 “yes”라고 말하게 하는 상대인 노먼역시 보스의 외피를 입긴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면 ‘불쌍한 독거 중년’이다.

그의 yes는 효율과 효용을 떠나 (아놔~ 왜 갑자기 ‘실용’이라는 말이 떠오르냐) 누구에게나, 어떤 질문에나 동등하다. 그래서 효용,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하지 않을 ‘한국말 배우기’와 휴일을 ‘네브라스카 링컨에서 보내기’에 기꺼에 yes라고 한다. 그래서 그 덕에 틱틱거리는 한국인 노처녀에게도, 자살을 시도하려는 히스패닉에게도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마이너들에 대한 편견 없는 yes.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3.
예스맨이 기부천사보다 아름다운 이유

예스맨의 러닝타임 2/3쯤 이르러 칼(짐 캐리)의 행보를 보면, 히피인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노숙자 쉼터에 가서 무료배식 봉사를 하며, 대출 허가 도장을 쾅쾅 찍어대며,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이 아닌 담에는 쓸모도 없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이라는 소수인종과 더 가까운 소통에 성공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짐 캐리의 표정이다.

이때 짐 캐리는 결연하지도 않고, 성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즐겁게 임한다. 그가 하는 yes는 자동에 가까운 yes이기 때문에, 자신의 yes가 소수자들을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 또한 찾아볼 수도 없다. 소수자에 대한 ‘yes’를 ‘베푼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숙자인 닉과도, 한국 노처녀 수미와도 그는 대등한 친구의 위치일 뿐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칼은 몇백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강요된 Yes Man


예스맨의 막바지에 이르면 꼭 No해야하는 일에는 No를 해야한다는 것이 예스맨의 철학이라는 것도 볼 수 있다. 나의 편견이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땐 스스로에게 No Man~ No Man~ 야유를 보내본다. 꼭 No라고 대답해야 할 때인가? 그렇다면 자신있게 No라고 외쳐보련다.


Yes해야 할 때와 No해야 할 때를 알고 외치는 자의 앞뒷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진공 라이

<이터널 선샤인>, 나를 기억해 줘

“발렌타인데이는 카드회사가 만든 날로 사람들 기분을 엿같이 만든다. ” –조엘-
오늘은 발렌타인데이, 조엘은 회사를 땡땡이 치고. 몬타우크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서로의 존재 자체를 잊게 되지만 한때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에서 둘만의 속삭임을 영원히 삭제하는 것으로 사랑, 그 끝의 뼈아픔을 달래려 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삭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엘은 슬픔에 휩싸인다. 그리고 자신도 역시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다.

조엘은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한 시간들을 회상하고, 영화는 이야기의 그곳부터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며 그들의 숨막힐 듯한 사랑의 순간을 보여준다.

오늘 밤이 지나면 넌 내 기억에서 사라져.
어떻게 나를 먼저 지울 수 있니.

그렇게 조엘은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과 재회하게 된다.  수 많은 추억들은 삭제되고, 그녀와 달콤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이 그에게 와 닿는다. 그리고…

“제발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취소할래요. 내 말 들려요!!”
소리쳐 보지만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조엘은 발렌타인데이날 몬타우크로 향한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리 기분파도 아니면서 그저 아침에 눈을 뜰때 찝찝했을 뿐인데..라고 주절이며 클레멘타인을 처음 만난 그 곳으로 걸음하게 되는 조엘.

그는 몬타우크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바로 잊혀졌지만 잊혀지지 않은 클레멘타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연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는, 잊었던 순수와의 만남이 황홀하다.

그러나, 현실은 …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