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 히트” (1981), 로렌스 캐스단의 감독 데뷔작


참 의아하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어떤 영화 때문에 졸지에 “로렌스 캐스단”이 “로맨틱 코미디의 귀재” 로 한때 불렸던 것일까? 『프렌치 키스』 때 그런 문구를 동원해 홍보를 했던 것 같은데, 『우연한 방문객』 때문인가? 아니면 『죽도록 사랑해』? 아니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캐스단 하면 언제나 『보디 히트』가 가장 먼저 언급되곤 한다. 새끈한 시절의 “윌리엄 허트”와 역시 새끈한 시절의 “캐슬린 터너”가 치정극의 주인공들로 나온다. IMDB를 찾아봤는데 이 영화가 데뷔작이란다. 이런, 결코 데뷔작같지 않은 데뷔작이다. 이렇게 능글능글할 데가 있나.

영화는 ‘치정극’, 그리고 ‘팜므파탈’이라는 단 두 단어로 설명이 충분할 만큼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이 예상 가능한 것의 과정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엮어가고 있다. 정말로 그녀는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일까? 정말로 그녀는 그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정말로 그녀는 그를 이용한 것인가? 혹은, 정말로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모든 답을 다 알면서도,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의심을 하게 된다.

역시나, “잔느 모로”나 “페이 더너웨이”처럼 서늘한 미녀과에 속하는 “캐슬린 터너”가 서늘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고 팽팽한 피부의 “윌리엄 허트”는 매우 섹시하다. 영화를 보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남자를 정말로 사랑해 버렸고 게다가 알고보니 팜므파탈이 아니라 가련한 희생자였던데다 비참한 죽음을 맞는 『차이나타운』의 “페이 더너웨이” 꼴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그녀는 그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속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까지 위장해 더이상 추적과 의심을 받을 필요 없이 이국적인 곳에서 삶을 즐기고 있다.

고전 누아르에서 팜므파탈은 언제나 주인공 남자에게 파멸을 맞곤 했다. 나는 이 영화가, 결국 그녀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마음에 든다. 물론 ‘승리’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게,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믿고싶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을, 그의 진심을. 대체로 똑똑한 팜므파탈이 나오는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의심하지 않고 모든 걸 다 바치고,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기가 앞서 배신당해주는 남자주인공들이 마침내 여주인공에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듯 굴다가도 자기가 손해보는 것같으면 의심을 시작한다. 그러게 진짜 사랑은 바보들만 하는 것이다. 혹은 진짜 사랑할 때 바보가 된다.

숨막히는 밤, 숨막히는 유혹

대체로 이런 식의 스릴러는 인간의 신뢰와 배신에 대해 다룬다. 세상은 너무 순진하게만 살 수는 없다. 그런 경우 멍청함은 불행을 부르고 그는 결국 상대의 사악함 탓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엄밀한 계산의 와중에도 사람은, 누군가를 믿고 싶어한다. 그 믿음이 성취될 때, 막대한 돈을 능가하는 행복을 함께 얻는다. 많은 이들이 아름답고 똑똑하며 착하지 않은 그녀들을 욕하면서도 그녀들에게 매혹된다.

하지만 그녀들의 배신은, 말하자면 테스트이다. 그녀들은 사랑의 깊이를 테스트한다. 그의 사랑이 과연 세월에 금방 시들게 될 육체에만 홀려있는지, 아닌지. 손해와 상처를 감수할 자세가 되어있는지. 정말로 그녀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그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으로 그녀들에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그림자 살인”이 조선으로 간 까닭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실은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추리극이다. 시작은
그럴싸하다. 시커먼 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시신 한 구가 누군가의 손에 운반된다. 시체는 누구일까? 시체를 운반하는 자가
범인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시체는 고관대작의 아들로 밝혀지고 의학도 장광수(류덕환)가 해부실습을 위해 주워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장광수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니 그가 바로 홍진호(황정민)! 홍진호는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고안한
도구들로 진범 찾기에 나선다.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여러 모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다.
충무로 보증수표 황정민에, <놈놈놈>의 조화성 미술감독이 참여한 볼거리 가득한 경성, 그리고 화려한 액션까지.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추리는 없다. 영화의 모든 패를 던져버리는 초반에 다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홍진호의 등장은
<차이나타운>(1974)의 기티스(잭 니콜슨)와 캐릭터 맥락이 일치한다. 남편이 집나간 사이 불륜을 벌이는 부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벌거벗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찍어대는 한심한 사립탐정, 하지만 소싯적 지방검사를 지낸 적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정의감 따위 엿 바꿔 먹고 돈(혹은 여자)에 혹해 사건을 맡게 되는 점 등 두 인물은 판박이인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통해 <그림자 살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마주서게 되는 것.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렇다!)

추리가 주가 되는 작품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게임오버다. <그림자
살인>처럼 홍진호가 기티스의 영향 하에 있고, 홍진호와 장광수의 관계가 홈즈․왓슨 콤비를 연상시켜도, 순덕의 존재가
<CSI 과학수사대>의 벤치마킹일지라도 설정은 설정일 뿐 오해하지 말지이니, 이에 관계없이 예측 불가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추리극의 재미요, 백미다. 그래서 추리를 다루는 작가는 종종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인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해 흥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그림자 살인>에도 관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추리에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 문제일 뿐. 안타깝게도
<그림자 살인>의 작가들은 추리극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가령, 범인의 정체를 초반에 노출하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혼란을 줄 목적이라지만 제2,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복선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호기심을 자아내는
미스터리? 그런 거 없다.

대신 영화는 액션과 경성 풍경에 승부수를 띄운다.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는 초반 액션장면에 대해 길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걸 보면 <그림자 살인>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추리에
대한 부족한 능력치를 강력한 볼거리로 메워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자 살인>뿐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추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를 보면 유독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김대승의 <혈의 누>(2005)가 그랬고, 김미정의 <궁녀>(2007)가
그랬으며, 이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DNA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중시되고 초자연적인 사고가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과학과 증거가 뒷받침되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태생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법. 하여 한국인이 만드는 추리물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 얼개도 굉장히 약한 편인데 아마 그런 난점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가리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가령, <그림자 살인>의 배경은 조선 중에서도 황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 부르는
1900년대 초반 경성이다. 전쟁과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이 유입됐던 시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자연스럽게 한 몸에 공존하며 문화충돌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요는 근대와 반(反)근대가
난립했던 시대의 이중성만큼 앙상한 추리 서사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다. 추리극의 면모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성보다 정에 호소함으로써, 과학보다 초자연주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합리주의와는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궁녀>이다.

<궁녀>는 <그림자 살인>의
순덕 이전 이미 내의녀 천령(박진희)을 등장시켜 과학수사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물론 <그림자 살인>과 달리
<궁녀>는 배경이 정조시대지만 (극중 정확한 시대가 언급되지 않지만 정황상 유추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신문물을
들이는데 관대했고 개혁책을 앞세워 고문(古文)을 옹호하는 보수 세력과 대립을 이뤘다는 점에서 경성이 갖는 시대의 이중성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궁녀> 역시 궁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초반엔 천령의 과학수사를 앞세워
추리극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극을 해결한다.

<
그림자 살인>은 <궁녀>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 영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궁녀>처럼
시대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면죄부 삼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논리적인 사건 해결을 통한 지적 유희의 전달보다 일제를 향한 민족적 복수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결국 ‘타락한’ 일본인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인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이성보다 복수심에 기대 합리주의를 무효화하는
민족주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살인>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라든지 소품들은
사건의 단서 혹은 복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능력한 추리력을 감추려는 볼거리 혹은 일본을 제압하는 의미로써 작용한다.
사건 해결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은청기나 만시경 같은 신기한 도구들은 물론이요, ‘총’을 든 홍진호가 ‘칼’을 든 일본인을
이기는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얼마나 좋은가.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줘요.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죠. 그렇다고 회고담 같은 건 아닌데, 우리 영화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과거를 다루기 때문이죠.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봐야죠.” 조선으로 간 추리극 <그림자 살인>은 정확히 반대다. <그림자 살인>은 추리력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영화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