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본주의는 얼마나 더 천박해지려는 걸까 …




토니 키틀러도 얘기했다. 마샬 맥루한이 진지하게 얘기한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말보다는 농담으로 얘기한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이어 그는 얘기한다. ‘미디어의 진실은 은폐됐다’라고.

인간은 경험으로 구성된다. 경험의 도구는 감각이다. 기존의 인간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으로 자신의 외부 세계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더 있다. 미디어와의 접촉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그것이 미디어다. 도시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은 미디어라는 환경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미디어는 ‘접하는’ 게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로 도시에 사는 현대인을 구성하는 외부세계의 중요한 한 축이 미디어라는 거다. 문제는 미디어가 맥루한의 말처럼 단순하게 ‘메시지’ 곧 정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인은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기보다는 ‘감각의 만족’을 더 얻는다. 더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욕망을 얻고, 그 욕망의 만족을 얻으며 산다. 그래서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어넣는다.

살아본 적도 없는 타워팰리스에 대한 욕망, 들어본 적도 없는 뉴칼레도니아 여행에 대한 욕망, 맛본 적도 없는 푸와그라에 대한 욕망은 기존의 오감이 준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욕망의 배후에는 언제나 자본이 숨어 있다.

모든 욕망이 다 채워질 수는 없다. 건강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장기매매를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천박해질 때는 어김없이 ‘시장’이라는 만병통치약을 통해 채워져서는 안되는 욕망이 채워질 때다. 미디어가 이 음험한 욕망을 부추길 때 우리는 미디어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절제되지 않는 욕망을 전파하는 미디어는 위험하다.

미성년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사회의 합의다.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는 그래서 화간이든 뭐든 간에 ‘청소년보호법’에 저촉된다. 미성년자를 욕망할 수야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합의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남몰래 집구석에 숨어 혼자 해야 한다.

미성년 아이돌들이 미디어에 나와 섹시한 춤을 춰대는 것이 나는 그래서 음험해 보인다.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부추기는 뒤에는 그래서 거대 기획사라는 자본이 숨어 있고 이 자본은 어김없이 채워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시장에 유통시키는 거다. 미성년 아이돌이 살을 드러내고 엉덩이와 가슴을 흔드는 것에 열광하는 짓이 이제 더 이상 창피하고 불온한 짓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미성년 성폭행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미수다에서였나? 프랑스 패널이 나와서 얘기했다. 프랑스에서 성인 남성이 미성년 아이돌 이름을 줄줄이 외우다가는 손가락질 받는다고.

사랑 혹은 결혼도 교환가치가 돼 버렸다. 여자는 남자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차와 넓은 집을 제공한다. 그래서 남자의 중요한 스펙은 직업과 연봉이고 여자의 중요한 스펙은 미모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성형과 다이어트다. 조건을 갖춘 남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아름답다는 것에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존재하지만 그런 다양한 아름다움은 자본에게는 불리하다. 모든 제품에는 규격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내다팔아야 하는 자본에게는 규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규격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이 만들어내고 성형외과는 그 규격을 전파한다. 성형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스타워즈의 씨스리피오(C-3PO) 같은 얼굴이 언젠가부터 아름다운 얼굴이 되어 있다.

문제는 생존이다. 생존이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랑 혹은 결혼이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교환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내다 팔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최근 뉴스를 보면 OECD 최고 남녀 임금 격차가 우리나라였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끝없이 천박해지고 있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