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에이전트”,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주인공 핀 역을 맡은 “피터 딩클리지”, 굉장히 낯익은 배우라 생각했는데 막상 imdb.com 필모그래피에 낯선 영화들만 있습니다. 결국 저 역시 이 사람을 그냥 ‘난장이 배우’로 봤던 것일까요. 신체상의 특성이 필요한 역에 언제나 조연으로 출연하다가 드디어 주연을 맡는구나! 라면서 축하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편견이란 놈의 위력은 셉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졸지에 뉴저지의 낡은 역사에 가게 된 핀. 정신없고 산만한 사고뭉치 아줌마 올리비아와 연일 시끄럽게 말 거는 조와 엮이게 됩니다. 핀은 난장이이고, 올리비아는 좀 정신 나간 아줌마고, 조는 이민 2세에 핫도그 파는 청년이죠. ‘성별과 연령과 장애와 상처를 넘어선 우정’이라고 혹자들은 나이브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아니 딱 그들로만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난쟁이이고 아들을 잃은 후 정신이 나가버린 아줌마이며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는 이민 2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들 약점이 있고 주류 사회에 결코 낄 수 없는 ‘헛점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과, 소위 자신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설정과 줄거리,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갖게 된다는 영화는 세상에 넘쳐나고 흔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영화가 제 기대 이상이었고 어필을 했던 건 배우들의 호연 탓이겠죠. 감독이 차분히 연출을 쌓아가는 솜씨도 꽤 안정적이고요.

핀과 올리비아가 서로 상처를 뱉어내며 결국 오열하는 장면에서 같이 울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어떨 땐,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결국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를 할퀴어대고, 결국 그 앞에 허물어져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거죠.

소소한 하나 하나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오히려 강력한 방어기제를 갖고 더욱 무뚝뚝하게 굽니다. 핀의 도피처는 기차였고, 올리비아의 도피처는 그림이었지요. 남의 친절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합니다. 때론 나의 친절은, 다른 이에게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가면의 제스처이기도 해요. 남 앞에서 적당히 빵긋빵긋 웃으면, 상대는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기술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때로 그 상처를 한 잔의 술이나 한 개피의 담배로 겨우 폭발 직전 상태로 진정시키며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 상처들이 ‘낫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상처를 하나쯤은 가슴 깊이 숨겨둔 채, 그저 혼자 있을 때 혼자서만 분출하다가, 다른 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을 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상처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상처를 가리는 기술이 늘고 방어기제의 기술이 세련되지는 것에 불과한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저 혼자 아프고 저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철딱써니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몰라요. 남들의 웃음 속에서 아픔을, 상처를, 절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 웃는 얼굴 뒤에 나보다 더 큰 상처를 꾹꾹 억누르고 있으려니, 라는 상상은 절대로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

약해빠지고 아무 대책 없고, 이를 악물고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는 게 오늘의 희망사항인 사람이 단지 남에게 폐끼치고 싶진 않다는 이유에서 상처를 숨기면, 상처가 없는 줄 알고 상처를 하나둘, 셋, 계속 안겨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뻔뻔한 인간들은, ‘당신은 강하니까 잘 버텨낼 거예요’ 같은 말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실은 내가 주는 상처 버텨내라고 강요의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죠.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는 피상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그만큼 아파봐야 알까요? 아니요, 자기가 그만큼 아프면, 이 바보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아픈 줄 알고 날뜁니다.

어찌됐건 이들은 그럭저럭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친구가 됩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나눠마시는 모습은 진부한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핀과 올리비아와 조에게 각자 서로 친구가 생긴 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정체감 유형의 차이, 세상의 차이: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에게는 누구나 정체감(Identity)이 있다. 정체감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같은 질문도 역시 이 정체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내 이름은 누구이고, 나는 남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사람 구경하는 것과 만화와 게임과 영화를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식으로 답한다. 이게 바로 내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James Marcia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과 1980년에 미국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면담을 한 결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분류했다.

첫 번째 방법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부터 부모가 가라는 학교로 진학하고, 부모가 사귀라는 친구를 사귀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가 지정하는 직업을 택하고, 부모가 골라주거나 부모의 심사를 통과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의심이나 후회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나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 의심이나 후회없이 열심히 살지도 않는 방법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기대를 뒤집어 엎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결국 꿈을 접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확산(Identity difused)이라고 부른다. 정체감이 한군데에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꿈과 실제 삶이 다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방법은 결정하거나 어디에 속하기를 미루고 이것저것 탐색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간다거나, 여기저기에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하고(단 자기가 원해서) 정규직을 갖기를 피한다거나, 연애는 여러번 하는데 누구와 정착하기는 미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도 정체감 유형중의 하나로 정체감 유예(Moratorium)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건 결국 뭐든 일단 미루고 보겠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방법은 사회나 주변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찾고 갈 길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라고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 하지 않는 짓을 하는 모난 돌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을 많이 맞는다. 즉 고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알콜중독도 많고 속버리고 심장이 고장난 사람도 많다. 물론 용기와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중 어떤 방법이 정체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면, 정체감 유실이 최선이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이미 한번 살아본 부모의 말을 듣는게 최선이란 말이다.

뭐, 꼴에 사춘기라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시키는대로 하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체감 유실이라도 해주는게 편하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더라도 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정체감 성취가 제일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그럴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한다면, 정체감 유실이나 확산은 최악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선배들의 생각은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오락실에서만 게임을 할 수 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가 프로게이머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제작비 1억원 시대의 영화판 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평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판의 룰에 적응할 수 있겟는가. 이전과는 다른 룰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남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남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싶어한다. 나 스스로 독립해서 험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친구』에서 상택이가 선택한 것도 결국 정체감 확산의 삶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기한 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결국 상택(서태화) 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상택이 자신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준석(유오성)이와 동수(장동건)다.

언제나 준석이가 뭘 했고, 동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상택이 본인의 이야기는 그 인생을 갈라놓은 극장 사건 빼놓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는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상택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준석이와 동수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범생이 이야기꾼은 오직 마음 속에만 그런 꿈을 담아두고 몸은 부모와 주변에서 기대하는 학삐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실, 1960-70년대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거의다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먼 곳에 파랑새가 날아다녀도 결국 꿀꿀하고 칙칙한 현실과 살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다른 삶을 살기는 두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택이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준석이도 동수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라.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가업인 장의사도 버리고 부모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갔던, 정체감 성취에 제일 가까웠던 동수는 수십방의 칼침을 맞고 죽어버린다. “좋건 싫건 시키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고생한다.” 그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자아감 성취를 향하던 동수

그런데 한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다른 정체감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현수(권상우)는 상택이처럼 우식(이정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현수는 반에서 우식이의 위치는 별로 원치 않지만 은주(한가인)를 차지하는 모습만은 뼈저리게 원한다. “내가 아주 힘들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었다.” 라는 말은 현수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다음에 현수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변신을 한다. 존재감 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사상 최고의 폭력사건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평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건 현수는 운동신경도 좋았고 집요한 열성파였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을 싸움 준비로 방향만 조금 바꾸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현수의 정체감은 최소한 유실이나 확산의 유형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범생이 출신으로 정체감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녀석이 현수다. 나중에 정말 그가 정체감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현수의 이 반항은 『친구』에서처럼 처절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퇴학을 당하고 재수를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세상에서 그 정도라면 처벌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결국 시대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세상이 『친구』 시절보다는 조금 느슨해지고, 이전의 룰이 먹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에 현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삶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편안히 기댈 대상이나 가치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삶 말이다. 그건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주 고달픈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자유가 무조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유의 무게를 짊어지고 스스로 노력할 용기가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행복이 찾아올 뿐이다.



영진공 짱가

 

영화 속의 멘토와 멘티들

1.
멘토: 인생의 등대

멘토(Mentor)는 원래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커스의 교육을 맡긴 친구의 이름이다. 오디세우스가 20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장성한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아 나서자, 오디세우스의 수호신 아데나(그리스 신화에서는 미네르바)가 이 멘토의 모습을 하고 텔레마코스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 앞에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Mentor라는 이름을 친구, 선생, 상담자, 조언자, (진짜 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에 맞춰 멘토의 지도를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고도 한다.

멘토와 멘티 관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당신에게도 아마 멘토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당신을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하다면 그는 당신의 멘토이다. 당신의 멘토가 잘 되면 당신이 행복하고 그가 실망하면 당신도 우울해진다. 당신과 당신의 멘토는 심리적으로 거의 동일체이기 때문이다. 멘토는 꿈이기도 하다. 어떤 멘토를 가진다는 것은 그 멘토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는 거다. 꿈 정도는 아무런 경험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꾸는 꿈은 애매모호하고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멘토가 없으면 구체적인 꿈도 갖기 힘들다. 당신의 꿈을 대표하는 당신의 멘토를 통해서 당신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슨 노력이 필요한지, 그 꿈을 실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등을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멘토는 한번에 보통 하나씩만 갖는다. 멘토가 여럿이라고 해도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멘토는 결국 하나다. 그 이유는 추구하는 꿈이 두 개일 수는 없는 이유와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로 갖는 멘토는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다. 그 이후에 손윗 형제나 자매가 멘토가 되기도 하고, 유명한 연예인이 멘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선생님이나 선배, 혹은 성공한 사람들이 멘토가 된다. 인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꿈을 찾고 자기만의 삶의 목표와 방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결국 부모라는 멘토를 벗어나 새로운 멘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발달사는 멘토와의 만남과 결별인 셈이다.

멘토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이 놀랍고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그는 당신이 꿈꾸어 왔던 삶을 살고 있고 그와 함께라면 당신도 그 꿈을 실현할 것처럼 보인다. 당신에게 멘토가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당신과 당신 멘토와의 간격이 너무 멀고 당신이 멘토의 세계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멘토로부터 감화를 많이 받고 많은 것을 배워서 점점 성장해갈수록, 당신 멘토와의 간격은 줄어든다. 그리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혹은 봤지만 그냥 넘어갔던 멘토의 어두운 부분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게 된다. 그리?어느 시점이 지나면, 당신은 더 이상 그 멘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까지 도달한다. 즉, 당신이 성장할수록 당신의 멘토는 당신에게 덜 중요해진다. 삶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그리고 언젠가 결별이 일어난다.

물론 모든 멘토와 멘티(Mentee: 멘토의 지도를 받는 사람)간의 관계가 이렇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어떤 멘토는 알면 알수록 더더욱 대단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멘토는 처음부터 불완전함을 보이지만 그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힘이 그의 매력이기 때문에 계속 그 가치가 유지된다. 하지만, 멘토와 멘티간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느냐는 그 멘토가 얼마냐 훌륭하냐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멘티가 어디까지 성장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멘티가 추구하는 삶이 바로 멘토의 삶 그 자체라면 그는 그 멘토와 결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상이 눈에 보일 때 그는 결국 어떻게든 멘토를 떠나서 새로운 멘토를 찾게 된다.

2.
영화 속의 멘토와 멘티들

멘토와 멘티 관계가 워낙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 멘토 결별과 만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도 종종 나온다.

우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 대부분은 멘토와 멘티 관계를 이야기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멘토가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일 때도 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필립 느와레”)는 어린 소년 토토에게 영화의 세계를 알려주는 멘토의 역할을 한다. 토토가 영화에 대한 꿈을 꾸고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알프레도 덕분이었다.

친구가 멘토인 경우도 있다. 영화 『친구』에서 동수(장동건)와 준석(유오성)이의 관계가 그렇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장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에게서는 도저히 꿈을 발견할 수 없었던 동수는 자기를 위해서 싸워준 준석이를 멘토로 삼았다. 그래서 준석이가 가는 곳에 같이 가고 준석이가 하는 일을 언제나 같이 한다.

멘토는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영화 『더티댄싱』에서 주어진 규칙을 따르는 법 밖에 모르던, 하지만 그 규칙 속에서는 삶의 재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있던 소녀 베이비(“제니퍼 그레이”)에게 댄서 조니 캐슬(“패트릭 스웨이지”)은 멘토가 된다. 조니를 통해서 베이비는 자기에게 주어진 틀을 깰 용기와 기회를 얻는다.

『타이타닉』의 주인공 로즈(“케이트 윈슬렛”)에게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시 멘토다. 단 며칠 간의 만남뿐이었지만 그녀의 향후 인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무덤덤했던 나도 할머니가 된 로즈가 잠을 자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사진들(말도 타고, 여자 비행사도 되고, 결혼도 하고…)을 천천히 보여주던 마지막 장면에서만은 좀 찡 했다. 그 사진들은 도슨이 죽어가며 당부한 당신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다 해야 한다던 유언을 그녀가 실행했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변화가 비록 아주 얄팍한 연출이었다고 해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삶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하던 소녀가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그냥 감동스러웠던 거다.

멘토는 그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다. 영화 『플래툰』에서 주인공 크리스(“챨리 쉰”)에게는 두 멘토가 있다. 하나는 선을 상징하는 엘리아스(“윌리엄 데포”), 다른 하나는 악을 상징하는 반즈(“톰 베린져”)다. 둘다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죽는다. 반즈의 꼼수로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장면은 베트남 전쟁에서 선의가 죽어버리고 악의만 남았다는 감독의 시선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멘토와의 결별 방법중 하나를 보여주기도 한다. 멘토와의 결별을 가장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이 바로 죽음이니까.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버드 콕스라는 배역으로 또 등장한 “찰리 쉰”은 아버지라는 멘토를 버리고 증권가의 거물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를 멘토로 삼는다. 하지만 결국 이 새 멘토에게서 자기 꿈의 어두운 면을 깨달은 버드는 게코를 버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에서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반복된다. 자신만만한 변호사 케빈(“키애누 리브스”)는 자기의 꿈을 이루어줄 것 같던 거물변호사 존 밀튼(“알 파치노”)를 찾지만, 결국 그가 악마라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어쩌랴 그 악마를 선택한 것은 자기 내면의 욕망이었던 것을… 이렇게 멘토와의 만남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 자체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경우도 있다.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의 대부 돈 비토 꼴레오네(“말론 브랜도”)를 아버지로 둔 아들 마이클(“알 파치노”)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동시에 범죄조직 두목인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그가 택한 건 아버지의 어두운 면이었다.

3.
근데 스타워즈, 너 너무 심하지 않니?

멘토와 멘티의 관계가 영화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워낙에 그런 영화가 많기 때문에 이 주제를 다루려면 최소한 멘토-멘티 관계에 대해서 좀 깊이 생각해보고 남들이 하지 못했던 변주를 만들어야 이게 제대로 먹인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스타워즈』시리즈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스타워즈의 멘토계보를 함 보자.

1977년작 『스타워즈 ep4 : 새로운 희망』에서 멘토는 오비완 케노비 이고 멘티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인데 이때만 해도 스페이스 판타지라는 장르에 어울리는 이 관계는 참신하기까지 했다. “포스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라는 오비완의 가르침은 꽤나 그럴듯한 메시지였다.

1980년작 『스타워즈 ep5 : 제국의 역습』에서 멘토는 요다 선생이고 멘티는 루크 스카이워커.  뭐니뭐니해도 “내가 니 애비다” 라는 다쓰베이더의 커밍아웃이 화제였다, 여기서부터 조짐이 불길해진다. 아버지는 최초의 멘토여야 하고 그 멘토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원수가 되기도 한다. 생애 최대의 원수가 자기 아버지라는 건 그 이후 『데블스 애드버킷』에서도 등장하는 구조지만, 여기선 정말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1983년작 『스타워즈 ep6 : 제다이의 귀환』은 뭐 이전까지 나온 멘토 전부 등장, 아버지와의 화해. 좋다. 마지막 편이니 다 정리해야 한다고 쳐주자.


그리고 나서 한참 뒤인 1999년에 등장한 『스타워즈 ep1 : 보이지 않는 위협』은 완전히 멘토와 멘티 판이다.

여기서는 이전에 나왔던 멘토들의 멘토까지 등장하는데, 콰이곤 진은 오비완 케노비의 멘토, 요다는 콰이곤 진의 멘토고, 오비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멘토다. 근데 아나킨은 다쓰베이더가 되어 오비완을 죽이게 되고, 같은 오비완의 제자인 루크는 다시 아버지와 대결 한다. 요다는 이후 아나킨의 사형 뻘 되는 카운트 두쿠(“크리스토퍼 리”)와 대결하고… 여기쯤 되면서 영화는 얽히고 설킨 멘토와 멘티 관계와 그 와중에 서로 원수가 된 멘토와 멘티간 싸움들로 점철된 영화로 변신한다. 한 두개의 관계 정도면 뭐 이해도 되고 그런 운명의 장난이!!! 라는 감흥이라도 주겠지만. 이렇게 떼거지로 나오면 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여기쯤에서 이 전체 시리즈는 별들의 전쟁인 『스타워즈』(Star Wars)가 아니라 멘토끼리의 전쟁, “멘토워즈”(Mentor Wars)로 변신한다.

4.
멘토와 진짜 결별한다는 것은?

다 좋다. 멘토와 멘티는 언젠간 결별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멘토를 가지고 있고 그 멘토와 멘티 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다. 내가 생활하던 동네에서도 그렇게 얽힌 관계들, 사형과 사제 관계들을 어디가나 마주칠 수 있다.

하지만 그 관계의 형성과 결별은 그 하나 하나가 드라마다. 멘토관계의 형성은 사람이 꿈을 찾고 그 꿈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걸 뚫고 나갈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짜릿함과 설레임의 드라마다. 결별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맘먹고 자기 멘토와 결별하지 못한다.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커지는 틈새와 메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임계치에 이르면 당사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장면에서 서로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별이 일어난다. 이건 한번에 하나씩만 얘기해도 충분할만큼 큰 드라마란 말이다.

근데 그걸 이렇게 한 판에 다 벌려놓아 버리면, 각각의 드라마는 의미를 잃고 그냥 돌고도는 세상 이야기 쯤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 멘토 이야기에 기초해 세워졌던 캐릭터의 무게도 사라지고 말이다.

과유불급. 이 멘토워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