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한국의 코엔 형제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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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보면 참 대단들하시죠. 멜러나 액션 장르만을 따로 놓고 동호회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지만 공포 영화는 어딜가나 별도의 동호회가 있고, 그야말로 B 무비의 수호성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열성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십니다. 저는 예전부터 판타지 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내용의 영화들을 선호해온 터라 공포 영화들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공포 영화냐 아니냐 하는 구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관객에게는 재미있느냐 아니냐, 잘 만들었냐 아니냐, 그리고 만족스럽냐 아니냐의 구분이 있을 뿐이죠. 더군다나 요즘처럼 장르 간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절에는 공포 영화 아닌줄 알았는데 슬래셔 무비에서나 볼 법한 끔찍한 장면이 튀어나와 보던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경우나 공포 영화인줄 알았느데 좀 다른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됩니다.

<기담>은 말하자면, 보는 사람 간도 떨어지게 만들면서 공포 영화 이상의 성취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링> 보다는 <주온>에 가까울의 노골적인 비주얼을 서슴치 않기 때문에 ‘우아한 공포’라는 말에 너무 안심하고 계셨다가는 큰 코 다치는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저는 아직도 코가 얼얼하군요…) 기본적으로 <기묘한 이야기>와 같은 에피소드 구성이라는 점도 제가 예상했던 바와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담>을 구성하는 3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1942년 개화기의 안생병원이라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야기들로, 서로 간의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비교적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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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이 공포 영화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크게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많은 한국형 공포물들이 잡으려다가 놓치곤 하는 두 마리 토끼, 즉 서스펜스와 멜러를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 편의 에피소드가 모두 초현실적인 현상를 기초로 하는 무서운 이야기들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하나 같이 남녀 간의 사랑과 운명을 기본 정서로 깔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김태우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김보경은 늦깍이 신인의 발견이라 할 만큼 무척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고 <기담>이 공포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해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김보경은 <친구>에서 여고 밴드 레인보우의 보컬이었던 그녀로군요)

두번째는 평론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형식미에서의 성취입니다. <기담>은 음향 효과와 끔찍한 비주얼로 끝장을 보는 전형적인 공포물이 아니라 미술이나 편집, 심지어 배우들의 대사 톤까지 일관된 연출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영화 초반에 특히 오랜만에 모습을 보여준 전무송씨의 대사가 좀 어색하다고 느꼈었는데요 이건 영화를 보는 동안 거의 모든 배우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었습니다. 약간 비현실적인 대사 방식은 어쩌면 판타지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형식 요소의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관건은 색다른 대사 전달에 관객을 적응시키느냐 아니면 끝까지 어색하게 들리도록 하느냐인데 <기담>의 경우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자에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우들의 기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어색한 부분들을 비주얼과 플롯 전개 방식으로 충분히 만회하고 있는 영화가 <기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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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 크리딧에서 “감독 정가형제”라는 글자가 유난히 크게 들어오더군요. 그 전까지는 단순히 형제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라서 그렇게 붙였나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크리딧을 보는 순간 코엔 형제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코엔 형제를 목표로 하는구나 싶었죠. 그리고 영화 속에서 코엔 형제의 흔적을 찾아보게 됐습니다. 사실 에피소드 구성의 공포물인 <기담>을 놓고 ‘한국의 코엔 형제가 등장했다’라고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데뷔작이 성공을 하고 어느 정도 여건이 된다면 충분히 그 정도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선보였다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전개되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에서는 <위대한 레보스키>를 떠올리며 와, 멋지구나 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포물의 결말은 <혈의 누>에서 군중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하늘에서 말도 안되게 핏물이 떨어지던 장면입니다. <혈의 누>는 멜러 전문인 김대승 감독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걸작이 되었을 시나리오였는데 전반적으로 허술한 만듬새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 높게 쳐주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 마지막 장면 만큼은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담>이 2% 부족하다고 느꼈던 건 아마도 그런 정도의 마지막 방점을 원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칫 <어메이징 스토리>식으로 늘어놓기만 할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완성된 구조로 엮어내는 정가형제의 솜씨는 벌써부터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영진공 신어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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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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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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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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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