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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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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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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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데이빗 크로넨버그, <폭력의 역사 History of Violenc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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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한국포스터가 더 마음에 듭니다만.
작고 구석진 시골마을, 성실하고 사람 좋고 따뜻한 가장네 가게에 강도가 들고, 이들을 물리친 톰(비고 모텐슨)은 졸지에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실립니다. 그런데 수상한 자들이 몰려와 가게에 죽치고 앉아 톰을 ‘조이’란 이름으로 불러대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엄한 사람을 착각하고는 이렇게 무서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 톰은 정말로 ‘조이’란 이름의 킬러였던 것일까요?

존 와그너와 빈스 로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는 한 남자의 폭력의 역사를 들추면서 폭력의 본질을 흥미롭게 고찰합니다. 사실 우리는 폭력에 무조건적 적대감과 반감을 갖고 있고 폭력을 뿌리뽑아야 할 악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폭력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성의 힘을 통해 폭력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필요 때문일 겁니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은 나쁘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폭력은 자신과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더이상 그토록 폭력에 의존하여 인생을 꾸려가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폭력에는 언제나 공격과 방어라는 양측면이 있으며, 이 경계는 때때로 매우 모호해지곤 합니다. 공식적으로 방어를 위한 정당방위의 폭력이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 폭력이 실제로 발현된 방식은 공격에 의해서일 수도 있으며, 이를 위한 적정한 선이라는 것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일단 ‘폭력’이란 것과 담을 쌓고 살던 톰의 가정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폭력과 접하게 되는지, 이 가정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는 역사를 주욱 봅시다. 주의드릴 점은, 여기 ‘넘버링된 부분’에서 제가 말하는 폭력은, “폭력은 나쁜 것”과 같은 가치평가를 배제한 채 공격이든 방어든 정당방위든 가리지 않고 언급하며 일단 살펴볼 것이란 점입니다.

1. 톰의 강도 처치 : 이 집에 처음 들어오는 폭력의 존재로, 철저하게 저항/방어로서의 폭력입니다.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 톰은 그들에게 가진 돈 전부를 제안하지만, 톰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자신의 직원이 강도 중 하나에게 강간 위협을 받았을 때죠. 바로 저항이자 방어로서의 이 폭력은 이후 톰의 가정에 계속해서 크고작은 폭력을 불러오는 일종의 시작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바를 넘어 잽싸게 두 강도를 처치하는 톰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가 방어이고 어디까지가 과도한 건지, 아주 살짝 모호한 지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잭의 쌈짱 때려눕히기 : 1번의 톰의 행동에서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폭력은 원래 전염성이 매우 크고 빠르며, 점점 강도가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1년 내내 학교의 짱으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단 한 번도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지혜롭게 상황을 빠져나갔던 톰의 아들은 여느 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에게 분노의 주먹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애가 입원해서 그 부모가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뛸 정도로 패주거든요. 물론 잭이 택한 폭력 역시 그러한 저항과 방어의 성격이 크지만, 잭이 취한 방법은 과연 정당한 걸까요? 심정적으로야 얼마든지 이해가 가지만, 이 아이가 1년 동안 너무나 현명하게 잘 피해온 걸 생각해 본다면 잭의 폭력의 발산이 낯설고 정도를 넘어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 애는 잭을 놀려대며 쳐보라고 했을 뿐, 먼저 주먹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3. 톰의 잭 뺨 때리기 : 2번 상황이 만든 잭과 톰의 갈등 상황에서 다시 하나의 폭력이 추가됩니다. 함부로 대드는 잭의 뺨을 톰이 참지 못하고 친 것이죠. 자 여기에 도달하게 되면, 이전의 폭력이 정도가 지나쳤다곤 해도 어쨌건 정당방위의 형태를 띄던 것과 완전히 다른 국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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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대응을 폭력으로 할 것인가, 다른 방법으로 할 것인가?

4. 톰의 악당 처치, 잭의 총기발사 : 집앞에서 그 수상한 자들, 즉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의 일당이 제안하는 차 뒷자석에 앉기 전, 톰은 잽싸게 옆엣 놈을 선제 공격하고 잔챙이 악당들을 처치하지만 가슴에 총을 맞고 칼 포가티와 몸싸움을 벌이며 위기의 순간을 맞습니다. 이 순간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게 잭입니다. 잭은 아버지의 엽총을 포가티에게 쏘고 아버지를 구해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부자간의 화기애애한 화해로 흐르진 않습니다. 톰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비로소 톰이 숨겨온 과거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잭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총을 쏘긴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 악당이었다는 것도, 상대가 악당이었긴 해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구한 대신, 아버지의 죄의 짐을 물려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5. 에디에 대한 톰의 난폭한 행동 : 집안에서 4번의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에디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고, 톰은 이전과 달리 ‘조이’의 모습으로 에디를 매우 난폭하게 대합니다. 에디의 목을 조르고, 톰을 외면하고 그냥 계단을 올라가려는 에디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고요. (음, 아마 넘어뜨렸던 거 같은데…) 사실 이 장면이 결국 부부강간으로 이어질 줄 알고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는데 뜻밖에 사태가 반전되네요. 매우 폭력적으로 시작했던 두 사람 간의 대립은 오히려 에디가 주도하는 굉장히 거친 섹스로 순식간에 변모하고, 섹스가 끝난 뒤 톰은 계단 밑에 초라하게 남겨집니다. 이 장면의 카메라의 구도와 편집이 재밌습니다. 처음엔 두 사람의 풀샷으로 시작하지만 곧 카메라는 이들에게 밀착해 특정 부위들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결국 이걸 저 계단 위에서 계단 밑 톰을 카메라로 잡는지라 정말 ‘섹스 뒤 초라하게 남은 궁상남’ 장면으로는 순위권에 들 장면.

6. 악당 소굴로 들어가 처치 : 뭐 이후는 자신의 과거와 절연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달려간 톰이 자신을 죽이려는 형 리치와 그의 부하들을 모두 ‘입이 떡 벌어질 솜씨’로 차례로 처치하는 장면. 사실 저 4번에서도 톰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음… 그러고보니 1번에서도 그랬네요. 그러니까 톰은 원래 정말로 솜씨가 좋은 킬러였던 겁니다. (그 재주를 썩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사실 그런 재주는 그냥 썩혀버리는 게 훨씬 낫습니다.)

정리해 보면, 이 영화에서 톰의 가족 구성원들이 연관된 폭력씬은 총 6곳입니다. 이 영화는 사실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속에 들어있는 폭력에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도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사태가 그렇게 끔찍하게 흘러가고 또 총으로 깨진 턱이랄지 이런 걸 또 다 보여주기 때문에 끔찍하지만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어떤 쾌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사실 폭력엔 매혹과 혐오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폭력씬을 다룸에 있어 혐오감을 강조해 폭력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끌어내거나, 죄책감을 느낄 건덕지는 애초에 차단시키고 순수한 쾌감(주로 시각적인)에만 몰입하게 해주는 게 일반적인 영화들의 패턴입니다만,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씬은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보여주고 자극하며, 우리가 통칭 폭력이라 부르는 것들의 다양한 이면과 그 복잡한 결을 짧고 굵으며 단순한 이야기 안에 꽤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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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사용된 스틸. 폭력의 두 가지 얼굴.

이 영화를 통해 폭력이 가진 두 얼굴, 즉 자상한 얼굴의 보호자와 피냄새에 굶주린 야수가 사실은 한몸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고, 이와는 별개로, 죄로 물들었던 과거는 완전히 돌이키지 않고 감추기로 무마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이 영화의 ‘톰/조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바로 킬러 조이/성실한 가장 톰의 두 얼굴로 유지돼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특히 저 5번에서 제시되듯, 폭력의 시도를 폭력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저지하는 것보다 다른 제3의 방법으로 그 폭력을 무화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겠죠. 이 영화 전체에서 보듯, 최초의 폭력은 계속해서 연쇄적인 폭력을 일으키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의 자리가 비워진 식탁에서, 모든 폭력들을 목격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한 막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접시를 놓습니다. 느림보 님이 지적하신 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들어온 자를 과연 여전한 가장으로 식탁에 맞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영화는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는 에디와 그런 에디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한 톰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버립니다. 저는 이 가정이 결국 톰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것이 이제껏 우리가 폭력을 받아들인 방식이니까요. 비폭력을 외치고 폭력을 범죄시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만, 합법적인 폭력조직 – 군대 – 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의 아이러니한 삶입니다.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톰/조이는 듀나님이 지적하신 대로, 폭력을 매우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폭력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결국 폭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책은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통제하느냐가 될 것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ps. 극장에서 끊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싶네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정말 몇 년만에 중앙시네마에서 영화를 봤는데, 지금은 미로스페이스에서만 그것도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합니다. (8월 20일까지군요.)

ps2. 비고 모텐센도 좋지만 마리아 벨로가 너무 멋집니다. 제가 굉장히 선호하는, 약간 서늘하고 지적인 타입의 미녀. <코요테 어글리>에서 바 주인언니로 나왔던 분이군요.

ps3. 에드 해리스 분량이 너무 짧아요. 칼 포가티 죽었을 때 “애개, 에드 해리스 벌써 아웃이야?” 이러면서 아쉬워했다는… 하긴, 드물게 ‘악당’으로 출연해주신 윌리엄 허트의 출연분량은 훨씬 더 짧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