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크레더블 헐크 (The Incredible Hulk), “속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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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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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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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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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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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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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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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영진공 노바리

ps1.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2.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3.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4.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

짜장당과 짬뽕당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한다면 설레발일까?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 중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60명,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이 40명이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에 따라 정당을 만든다. 짜장당과 짬뽕당.

투표를 하니 6:4로 짜장당 승리. 결국 이 나라의 음식은 짜장으로 통일된다. 짬뽕당 사람들은 5년을 눈물로 짜장만 먹는다. 5년 후 다시 투표. 역시 6:4로 짜장당 승리. 눈물의 짜장 천하. 계속 반복되는 역사. 결국 이 나라엔 짜장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짬뽕당 사람들은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 숫자를 늘려야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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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광장에서 짬뽕 퍼포먼스를 벌이고, ‘월간 짬뽕’을 창간하는가 하면, 국제 짬뽕 심포지엄도 개최한다. 짬뽕의 도와 짬뽕의 아젠다와 짬뽕의 미래를 설파하고 설득한다.

그런데 짜장당 사람들도 가만 있을 리가 없다. 그들도 짜장 이벤트를 열고 월간 ‘짜장과 사회’를 창간한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권당인 짜장당 사람들은 청계광장의 짬뽕 퍼포먼스를 도로를 점거한 불법시위라며 경찰을 동원해 ‘합법적’으로 막는다. ‘월간 짬뽕’ 사장을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로 ‘합법적’으로 교체한다. 짜장을 비방한 사람들은 명예훼손이라고 ‘합법적’으로 고소한다. 이뿐이 아니다.

짜장 전문 기업들은 그들이 후원하고 제작하는 CF, 영화, 음악 등에 짜장을 마구 집어넣는다. 영화 속 모든 연인은 이제 짜장면 집에서 데이트를 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드라마 속 아빠. 애들아 간짜장 사왔다. 우리 아빠 최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간짜장으로 구현된다.

학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 갑자기 오토바이 여러대가 등장하더니 교실 안에 짜장을 풀어 넣는다. 마지막에 박히는 카피. 사랑을 배달합니다. 홍콩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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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짜장은 단순히 정당과 요리의 문제를 넘어 사람들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자 행복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짬뽕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매번 투표할 때마다 짜장당을 찍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혹은 투표를 하건 말건 짜장 같은 세상에 변화가 있겠냐며 투표일 날 놀러간다. 그렇게 놀러가 봤자 끽해야 홍콩반점.

이런 사회를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의 타칭 붉은 무리들도 민주주의를 누리고 산다. 거짓말 말라고? 그들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우리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믿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믿고 있다.

일당 독재 국가 북한. 그런데 민주주의라니? 그들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

노동자의 의사를 대신해주는 게 조선 노동당. 그런데 북한은 전국민이 노동자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은 전국민의 의사를 대신해준다. 조선 노동당의 일당 독재라기보다 조선 노동당을 통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거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들은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언론의 자유도 물론이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 이외의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분명 독재다.

하지만 짜장당과 짬뽕당 속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살리진 못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월간 짬뽕’ 사장에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가 임명되면서 부서졌고, 집회의 자유는 짬뽕 페스티발을 경찰이 막으면서 사라졌고, 표현의 자유는 인터넷에 떠도는 쥐짜장이란 말이 모욕죄라며 관계당국이 처벌을 강구하는 순간 증발했고, 출판의 자유는 국방부가 불온도서 목록을 공개하는 순간 날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합법’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있어서, 이곳의 집회, 출판, 언론, 결사, 표현의 자유는 ‘합법적’으로 아직 살아 있다.

짜장에, 짜장에 의한, 짜장을 위한 꼭두각시가 돼버린 유권자.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선택으로 투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투표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애들에게 외친다. 애들아. 아빠가 간짜장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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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들은 일당 독재 때문에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곳 민주주의 속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일까 아닐까? 이 역시 민주주의다. 그렇지만 짜장당 독재나 마찬가지인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사회. 그것은 제도가 있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완성해 가는 것이다.

원로 언론인 정경희 선생이 여의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여론을 과점하고 지배하는 언론 권력이 편파 언론으로 국민을 최면상태로 만들어 이기도록 한, 다시 말해 언론독재 하에 선출된 정권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요리가 있다. 짜장 뿐만이 아니다. 짬뽕, 라면, 떡볶이, 김밥, 튀김, 오돌뼈, 닭똥집, 꼼장어 등등등. 그것들을 찾거나 상상하는 노력없이 짜장 뿐인 세상이 싫다며 등 돌려 앉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우리의 잘못이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