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파리, 세 명 앞에 놓인 한 개의 바나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그들의 악몽이 우리의 꿈이다.”

검은 복장의 경찰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하얀색 곤봉.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미처 완성되지 못한 바리케이드들. 거리는 구역질 나는 최루탄의 푸른 연기로 뒤덮혔고 주인 없는 벽엔 혁명의 상상력이 담긴 낙서들로 가득찼다.

68세대 씨네필인 베르톨루치는 열기 가득한 1968년 파리 한복판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세 남녀의 사적인 공간들, 이들의 사랑. 영화. 토론 그리고 팔딱거리는 분노의 감정은 고스란히 스크린에 쏟아졌다.

단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세 청춘 남녀의 적나라한 매력, 영화 <몽상가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미국인 유학생 매튜는 시간의 대부분을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보기’ 에 할애한다. 그는 어느 날 이란성 쌍둥이 테오와 이자벨을 만난다. 같은 나이 같은 취미를 가진 그들이 친구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우리는 영화에 미친자들로 불렸다. 그 중 탐욕스러웠던 난 늘 화면 바로 앞에 앉곤 했다. 이미지가 살아있는 한 가장 먼저 느끼고 싶었다. 뒷줄을 통과하기 전에, 그리고 여기저기 전달되어 닳고 작아져서 영사실로 돌아가기 전에…그 만큼 영화에 빠진 우리의 현실감각은 무뎌져 갔다.”

부모님이 휴가 차 집을 비우자 테오와 이자벨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매튜에게 함께 지낼 것을 제안했고, 이들 셋의 미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이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재연하고 제목을 맞추는 게임을 즐기는가 하면, 영화 속 장면을 실제 행동에 옮겨도 보면서 굳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 매튜는 차츰 이자벨의 매력에 빠져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여느 남매와는 다른 밀접한 어쩌면 성적인 관계마저도 의심되는 테오와 이자벨을 먼 발치서 지켜보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매튜는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이 쌍둥이 남매와 동등하고도 더 깊숙한 관계를 욕심내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마치 한 사람이 둘로 나뉜 것 같아. 그리고 나도 이제 그 일부가 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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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일찍이 난장판이 된 집안에 비상금은 동이 나고, 급기야 먹을 것도 바닥이 난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테오는 집 앞 쓰레기더미를 뒤지지만, 세 명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턱 없이 부족해 보이는 작은 바나나 하나를 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매튜는 자못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나나를 집어 든다. 과연 저 작은 것이 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날 찰나 매튜의 손에 들린 바나나는 정확히 셋으로 쪼개지고 세 명 모두는 웃음을 터뜨린다. 바나나를 정확히 3등분한 매튜의 손끝에는 쌍둥이와 하나가 되고싶다는 욕망이 묻어났다.

청춘 남녀의 야하지만 아름답고, 노골적이지만 흥분되는 삶과 관계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와 저렇게 욕심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날엔 나도 먹음직스런 바나나에 ‘매튜의 마술’을 부려보고 싶다.


영진공 애플

광복 63주년 그리고 KBS

[편집자 註]
2008년 8월 15일은 광복 63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현재 국민으로부터 5년간 권력을 위임받은 이와 그 주변을 맴도는 세력들은 굳이 이날을 “건국일”이라 주장하며 광복의 의미를 가리려 애쓰고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일”이 아니다.  이 날은 1919년 건국 이후 임시로 존재하였던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날이며 동시에 이승만 행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그리고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광복절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잘 살아있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치며 오히려 경제를 죽이고있는 그들은 이미 세워져있던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강변을 하고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걸 그들은 실용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용이 아니라 궤변이고 완장질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터져나온 KBS 사태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광복 63주년을 맞아 <영진공>이 나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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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은 방송법 50조 2항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이사회 재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임명’이다. 단순히 ‘임명’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장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해임할 수 없다. 왜냐면 대법원장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에 의하지 아니 하고는 파면될 수 없다고 헌법 106조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S 사장 해임에 대해서는 법에 명시된 게 없다. 그러니까 해임을 시키지 못하는 직책이라면 대법원장처럼 ‘파면될 수 없다’고 법에 명시돼 있는데, KBS 사장의 경우는 법에 그처럼 명시된 게 없으니 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청와대 측 주장이다.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2000년 방송법 개정 전 구 한국방송공사법은 ‘대통령은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임면할 수 있다’고 해놨다. 그걸 개정하면서 ‘임명한다’고 지금처럼 바꾼 것이다.

‘임면’과 ‘임명’의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임면’은 임명 뿐 아니라 해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다시 말하자면 법 개정 전에는 대통령이 ‘임명’과 ‘해임’을 모두 할 수 있었지만 이걸 ‘임명’만 할 수 있게 법을 바꿨다는 게 청와대 주장에 반대하는 측의 해석이다.

무엇이 법적으로 타당한지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감사원은 정연주 사장의 부실 경영을 이유로 KBS 이사회에 해임재청을 요청했고, KBS 이사회는 그걸 가결시켜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대통령은 거기에 사인했다. 그리고 정연주는 해임됐다.

하지만 법조항 어디에도 KBS 사장을 ‘해임재청’할 수 있는지 나와있지 않고, 위에서 살핀대로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한지는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감사원과 KBS 이사회와 대통령은 일사천리 처리해 버렸다.

이게 옳은 순서일까? 이처럼 법리 해석의 문제가 남아 있는 사안이라면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먼저 대통령에게 KBS 사장 해임권이 있는지 법무부나 법제처에 문의하는 게 먼저다.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이 이 나라 법 정신에 부합한지 따져보고 행동하는 게 순서인 거다.

하지만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법 위반이 아닌지 선관위에 문의하게 만들었던 현 집권당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심각한 위법일 수도 있는 일을 자신들 뜻대로 처리한다.

MB 정부가 KBS 정연주 사장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백분 이해한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KBS 정연주 사장을 잘랐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법에 의거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는 게 문제이며 혹은 심각한 법적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실행해 버렸다는 게 문제다.

법은 권력자의 해석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것이 수십년 독재를 견뎌내고 빚어낸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
MB가 정연주를 해임했다. 정연주는 법정에 끌고 가겠다고 했다. 관측을 보니 법률적으로도 정연주가 이길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여러갈래다. 법률이야 어떻든 간에, 상식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사법부가 그간 내려온 법상식은 비상식이었다.

오마이뉴스에 KBS 기자가 쓴 글처럼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자를 수 있다면 KBS 사장의 모가지는 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얘기다. 자기 모가지를 쥐고 있는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공영 방송은 관영 방송이 된다.

절차상으로는 KBS 이사회의 해임 청구에 대통령이 동의한 모양새다. KBS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정권이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장악한 KBS 이사회에게, KBS 사장을 자를 명분을 주기 위해 감사원이 또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감사원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검찰이 또 어떤 오바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가 감사원, 검찰에 덧붙여 KBS까지 자기 발 아래 나와바리 관리 들어가는 과정을, 타임머쉰 타고 우리는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정연주 해임에 대해 찬성하거나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두 부류인데 하나는 좌파 빨갱이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는 ‘인민의 방송’을 하지 않은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코드 인사답게 좌우 양쪽의 미움을 받는다.

빨갱이를 싫어하는 꼴수구든, 인민을 사랑하는 꼴진보든 간에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 둘이 치고받고꺽고물며 싸우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기장과 공정한 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지금 이 경기장과 룰 모두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있다. 독립성이 생명인 검찰, 감사원, 공영 방송이 MB 아래 도열하는 중이다.

“훗, 우리 편 안 들어주더니 거참 고소하다”

고소함은 잠시. 이젠 경기마저 사라질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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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처음 그들(나치)이 공산당을 잡아들였을때,
난 공산당이 아니어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조원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카톨릭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개신교였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그때는 저항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Martin Niemoeller


영진공 철구

인크레더블 헐크 (The Incredible Hulk), “속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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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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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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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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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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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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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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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영진공 노바리

ps1.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2.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3.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4.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

짜장당과 짬뽕당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한다면 설레발일까?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 중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60명,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이 40명이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에 따라 정당을 만든다. 짜장당과 짬뽕당.

투표를 하니 6:4로 짜장당 승리. 결국 이 나라의 음식은 짜장으로 통일된다. 짬뽕당 사람들은 5년을 눈물로 짜장만 먹는다. 5년 후 다시 투표. 역시 6:4로 짜장당 승리. 눈물의 짜장 천하. 계속 반복되는 역사. 결국 이 나라엔 짜장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짬뽕당 사람들은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 숫자를 늘려야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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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광장에서 짬뽕 퍼포먼스를 벌이고, ‘월간 짬뽕’을 창간하는가 하면, 국제 짬뽕 심포지엄도 개최한다. 짬뽕의 도와 짬뽕의 아젠다와 짬뽕의 미래를 설파하고 설득한다.

그런데 짜장당 사람들도 가만 있을 리가 없다. 그들도 짜장 이벤트를 열고 월간 ‘짜장과 사회’를 창간한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권당인 짜장당 사람들은 청계광장의 짬뽕 퍼포먼스를 도로를 점거한 불법시위라며 경찰을 동원해 ‘합법적’으로 막는다. ‘월간 짬뽕’ 사장을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로 ‘합법적’으로 교체한다. 짜장을 비방한 사람들은 명예훼손이라고 ‘합법적’으로 고소한다. 이뿐이 아니다.

짜장 전문 기업들은 그들이 후원하고 제작하는 CF, 영화, 음악 등에 짜장을 마구 집어넣는다. 영화 속 모든 연인은 이제 짜장면 집에서 데이트를 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드라마 속 아빠. 애들아 간짜장 사왔다. 우리 아빠 최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간짜장으로 구현된다.

학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 갑자기 오토바이 여러대가 등장하더니 교실 안에 짜장을 풀어 넣는다. 마지막에 박히는 카피. 사랑을 배달합니다. 홍콩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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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짜장은 단순히 정당과 요리의 문제를 넘어 사람들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자 행복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짬뽕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매번 투표할 때마다 짜장당을 찍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혹은 투표를 하건 말건 짜장 같은 세상에 변화가 있겠냐며 투표일 날 놀러간다. 그렇게 놀러가 봤자 끽해야 홍콩반점.

이런 사회를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의 타칭 붉은 무리들도 민주주의를 누리고 산다. 거짓말 말라고? 그들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우리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믿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믿고 있다.

일당 독재 국가 북한. 그런데 민주주의라니? 그들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

노동자의 의사를 대신해주는 게 조선 노동당. 그런데 북한은 전국민이 노동자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은 전국민의 의사를 대신해준다. 조선 노동당의 일당 독재라기보다 조선 노동당을 통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거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들은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언론의 자유도 물론이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 이외의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분명 독재다.

하지만 짜장당과 짬뽕당 속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살리진 못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월간 짬뽕’ 사장에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가 임명되면서 부서졌고, 집회의 자유는 짬뽕 페스티발을 경찰이 막으면서 사라졌고, 표현의 자유는 인터넷에 떠도는 쥐짜장이란 말이 모욕죄라며 관계당국이 처벌을 강구하는 순간 증발했고, 출판의 자유는 국방부가 불온도서 목록을 공개하는 순간 날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합법’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있어서, 이곳의 집회, 출판, 언론, 결사, 표현의 자유는 ‘합법적’으로 아직 살아 있다.

짜장에, 짜장에 의한, 짜장을 위한 꼭두각시가 돼버린 유권자.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선택으로 투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투표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애들에게 외친다. 애들아. 아빠가 간짜장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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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들은 일당 독재 때문에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곳 민주주의 속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일까 아닐까? 이 역시 민주주의다. 그렇지만 짜장당 독재나 마찬가지인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사회. 그것은 제도가 있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완성해 가는 것이다.

원로 언론인 정경희 선생이 여의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여론을 과점하고 지배하는 언론 권력이 편파 언론으로 국민을 최면상태로 만들어 이기도록 한, 다시 말해 언론독재 하에 선출된 정권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요리가 있다. 짜장 뿐만이 아니다. 짬뽕, 라면, 떡볶이, 김밥, 튀김, 오돌뼈, 닭똥집, 꼼장어 등등등. 그것들을 찾거나 상상하는 노력없이 짜장 뿐인 세상이 싫다며 등 돌려 앉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우리의 잘못이다.


영진공 철구

<자비를 팔다>, “순수성이라는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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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수함을 꽤나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선의나 재능으로 알려진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거기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거의 사기꾼이나 악마인 것처럼 대하죠. 뭐 연예인들이 100% 순수한 자연산 외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예민한 것도 비슷한 경우고요.

그럼 이 세상에서 정말 비난할 거리가 없는 위인은 없을까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위대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더러운 속사정이 있는 인간들투성이죠. 저는 이 나라에서 그런 비난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딱 한명 이순신 장군 밖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특히 젊은 스타들에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네들은 아직 충분히 더러워질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혀보면 어떨까요? 비난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인물이 이 세상에 적어도 한두 명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평생을 빈민과 병자들을 위해서 봉사만 하다가 떠난 사람. 인간이 어디까지 숭고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자비를 위해서 용감해질 수 있는지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가장 신에게 가까웠을 사람. 현대인들이 거의 유일하게 인정하는 성인(聖人). 테레사 수녀 말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요.

그리고 이 책은 불경스럽게도 바로 그 성인 테레사 수녀의 배후를 파헤칩니다.
대충 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죠.

그녀가 추구한 ‘봉사’라는 것이 결국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 가난한 병자들을 모아놓고 서서히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는 사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신앙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야 말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의 실천이었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자신은 그런 축복을 마다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장 비싼 의료진에게 몸을 맏겼으며 그 의료진을 만나러 다녀오기 위해서라면 특별전세기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런 그녀가 서구세계에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선정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미디어와의 만남 덕이었다는 사실. 그녀를 세상에 알린 사진들, 그 어두운 토굴같은 병원 건물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유난히 그녀의 흰 제복이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 사진들은 사실 당시 코닥Kodak에서 새로 개발한 초고감도 필름 덕분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이 코닥필름의 기술력의 개가가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성인의 징표로 광고되었다는 사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교파를 확장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출처에는 상관없이 온갖 기부금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냈으며 그 돈들은 최소한으로만 병자들에게 사용되었다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결론에 도달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엔 정말 존경할 인물은 하나도 없어. 젠장 인간은 원래 추잡한 존재야”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숭고함을 찾는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고요.
다시 말해 100% 순수한 어떤 것을 찾는, 혹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 정말 100% 순수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지 않으면 옳거나 정당하지 않다는 잣대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이고 누구를 위해서 기능할까요?

이런 100% 순수성의 잣대를 내세워 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게으르고 용기도 없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 실천을 하는 모두를 바로 그 잣대로 비난하죠. 정작 비난받아야 할 이들은 바로 자신들인데도, 어느새 그 100% 순수의 잣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간이 조금이라도 뭔가를 한 인간보다 오히려 더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그 게으른 겁쟁이들 뒤에 숨어서 모든 사람들이 더 게으르고 겁먹기를 바라는, 그 동안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거의 100% 욕심으로 가득찬 100% 쓰레기들이 바로 그런 100% 순수를 내세운다는 겁니다.

여튼, 이 책의 정보가치는 꽤나 높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달의 이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요.

사실 테레사 수녀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아주 당연한 사실을 다시 알려줄 뿐이죠. 비현실적인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맞는 허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당연한 사실 말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힘든 와중에도 남들에게 약간의 배려를 베푸는 사람들,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면서 진실을 알리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이 진짜 숭고한 것이죠.

 


영진공 짱가

* 이 책의 원제 The Missionary Position 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보통 더 많이 사용되는 의미는 “정상체위” 인데요.
바로 그 체위를 제3세계에 가르쳐준 이들이 선교사들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책의 내용과 적절히 어울리는 이중적 제목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