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 …

작년까지만 해도 믿었다.

아들은….

아빠 지금 뭐해?

응, 지금 아빠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와 지구를 지키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다.

거짓말.

아니야, 잠시만 기다려봐.

(광주씨, 아들, 설명좀 해줘.)

안녕 수겸아, 아저씨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야!

으아아아아아아~ 엄마, 레드가 나한테 전화했어!!!!!

아빠는 영웅이 된다.

지구를 구하는 우주전사들과 연석회의라니.

하루는 그렌라간의 시몬을 만나고

하루는 사오정과 함께 손오공의 만행에 대한 토론을 하고

하루는 원피스의 크로커다일과 함께 해양한국,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그리고 또 어느날은 격동 50년, 역사스페셜의 주인공과 인사를 한다.

아들이 특히 감격하는 건 여자 주인공들과 조우할 때다.

물론 목소리만으로 조우해야지.

하지만 만나면 끝나는 그 환상이란 …

… 우울한건 이야기 하지 말자.

얼마 전, 트랜스포머를 보고 나오는 아들이 말한다.

아빠, 저건 그러니까 거짓말이지?

아들,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주는 동화 같은거야.

그러니까 가짜잖아.

응.

후… 그럼 만화도 다 가짜잖아.

으…응…

싸늘하게 표정이 굳은 아들은 바람처럼 라페스타를 가로질러 간다.

8살의 속력을 넘는다.

세상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같은 세상이 아니다. 아들.

50 미터는 넘게 앞서고 있는 아들에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모기만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영진공 그럴껄

“이퀼리브리엄”, B급 영화는 비디오로 봐야 제 맛

내 돈으로 표를 사주면서까지 꼭 보고 오라고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는 있지만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절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오랫동안 상영관을 들낙날락 하다보니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 안목이 생겨서 그런 정도의
심각한 재난은 미리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형편 없는 영화라도 나름대로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어디엔가 갖추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형편 없이 만들어진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 가치란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대적 비교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점에 있다. 극장이라고는 올해의 전국민 참여 영화 한 두 편에 한해서만 출입하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도 음식 처럼 맛 없는 요리를 먹어봐야 정말 잘 만든 일품 요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가 정말 실망스러운 경우의 진짜 원인은 실제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찾았다가 겪게 되는 낭패감에 있다. 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기대치나 다른 조건들에 의해 관람 중에 느끼는 바가 많이 틀려지게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실망감에 젖게 되면 그 영화의 장점이고 뭐고 다 싫어지게 되는게 인지상정이란 생각이다.

“이퀼리브리엄”에 대해서는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느꼈던 허전함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경계의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내 스스로 B급 영화는 B급 영화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다며 일단 처음 가졌던 호감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전에 “이퀼리브리엄”을 B급 영화라고 했더니 누가 봵!하는 답글을 달았던데, “이퀼리브리엄”은 굉장히 B급 영화인 것이 맞다. 그럼 크리스챤 베일은 뭐냐고? 솔직히 난 크리스챤 베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당시 그가 B급 영화의 주연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의 조연 자리를 오고가는 그런 수준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퀼리브리엄”을 보고나서 영화를 아직 못본 다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런 거다. ‘이 역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꼭 볼 필요까지는 없던 영화다. B급 영화는 … 역시 비디오로 보아야 제 맛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