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휴 추천영화, “계몽영화”



9월16일 개봉을 앞둔 <계몽영화>의 한 장면


추석 황금연휴를 맞아 개봉될 영화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질 예정이다.
그 중에 9월 16일 개봉하는 우리 영화  <계몽영화>(박동훈 감독)는 영화의 힘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린다는 전략으로 얼마 전에 일반 시사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계몽영화>는 120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거나 쳐지는 기운 없이 정학송의 가족사를 3대에 걸쳐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가족의 삶을 보노라면 정교하고 촘촘한 박동훈 감독의 유려한 연출 솜씨에 깜빡 놀라고 만다.
사회의 주류로 살고자 애쓰는 모두를 향한 통쾌한 똥침이자, 동시에 잔잔한 자기 성찰을 반영한 <계몽영화>는 추석영화로 특히 가족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로 탁월한 선택일 될듯하다.




2010.9.9. 계몽영화 시사회 현장, 감독 및 주연 배우분들의 무대인사 

어제 열린 일반시사회에서는 영화만큼이나 속 깊은 이벤트가 열려 관객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영화 속 소품을 모티브 삼은, 분홍색 보자기 안에 정성껏 포장한 라면 두 봉지와 <계몽영화>의 아이디어가 된 박동훈 감독의 단편 <전쟁영화> DVD를 고이 담은 선물 보따리를 관객 100명에게 나눠준 것.
이 모든 정성이 빛을 발하면 좋으련만.

<계몽영화>는 9/16일 CGV무비꼴라쥬 강변,구로,상암,인천,오리,서면 그리고 롯데시나마 건대입구, 필름포럼, 시네마상상마당(9/23), 대전아트시네마(9/19)에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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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애플

“악마를 보았다”, 다소 싱거운 도가니탕???


무척 잔인하다는 소문이 무성했음에도 잔인은 커녕, 결말까지도 충분히 예상할 Plot에 평범한 복수극이었다. 유혈이 낭자할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가 너무 많은 유혈에 노출되어서인지 그리 혐오스럽진 않았다. 게다가 포스터나 제목에서 주는 뉘앙스가 두 사람의 대립이라는 점과 결부되면서 결말은 예상대로 싱거웠다.


하지만 결말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기에. 재미난 Scene 몇 개가 기억에 남는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택시 연쇄 강도살인범과 격투 Scene

내게는 가장 재미나고 Speedy한 격투 장면이었는데, 첫째로 惡과 惡의 싸움이라는 게 흥미로웠고, 둘째로 어수룩한 2인조와 산전수전 다 굴러본 듯한 놈의 뻔한 싸움이라는 게 익살맞았으며, 셋째로 그 좁아터진 택시 안에서 둘이 하나를 못 잡아 헤매는 게 즐거웠다. 각본을 쓴 감독이 이 장면을 왜 넣었을까 고민해봤지만 딱히 재미 외에는 뭘 찾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살집에 연거푸 꽂아 넣는, 쉭쉭하는 칼소리와 좁은 공간에서 이리 저리 몸을 움직여대는 모습을 잘 잡아냈기에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쳐줄만 하다.

병원에서 아킬레스 건을 끊어버리는 Scene

이병헌이 다리를 부여잡고 침착하게 간호사에게 귀도 막고 눈도 막으라고 친절히 권유해 주었음에도 간호사는 눈을 감지 않고 귀만 막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능욕한 남자의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것을 똑똑히 본다. 아! 역시 복수란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하는 것. 좋은 장면이다.

복수를 마무리한 이병헌의 표정 Scene

엔딩크레딧 직전의 이 클로징은 이병헌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추되 소리를 차단해버버리는 배경음악으로 인해 과연 이병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릴 때 보던 ‘O양의 스토리’라는 세미 포르노에서 나왔던 장면이기도 한데, 여성이 섹스로 인해 쾌락을 느낄 때의 표정을 ‘소리’를 배제하고 얼굴 표정만 볼 경우 이 여성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 쾌락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병헌의 표정은 정말 적절하게도, 배경음악으로 완전히 차단된 울음소리 – 또는 웃음소리 – 덕분에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아리송하게 만들어버리는, 복수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지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그런 매력의 Last Scene을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이병헌의 캐스팅 이유가 이런 묘한 표정 때문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꽤 흥미로운 마지막이었다.

근육의 파열음이나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나도는 것에서 ‘잔혹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소리’가 진정 중요하다. 영화 ‘우주전쟁’에서 레이저 빔 소리가 얼마나 공포심을 조장하는지, 그저 비현실적으로 가루가 되어버리는 사람의 형체가 그 ‘소리’로 인해서 얼마나 무섭고도 잔혹하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잔인함은 글쎄, 기대를 너무 했던가?


영진공 함장


 

“허트 로커”, 전쟁과 인간만 달랑 남았구나






지난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6개 주요 부문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죠.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에게는 첫번째 여성 감독상 수상자로서의 영예까지 안겨다주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전 부인 – 들 중에 하나 – 으로도 알려진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대표작은 역시 <폭풍 속으로>(1991)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이 아드레랄린 넘치는 범죄 액션물은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코미디 <뜨거운 녀석들>(2007)에서 대놓고 찬미될 만큼 줄거리와 연출 스타일에 있어서 남성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었어요.

그외 <블루 스틸>(1990)이나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 역시 여성 감독의 영화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는 선굵은 스토리라인과 액션 장면들로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카데미가 작품상을 안겨준 이라크 전쟁 소재의 영화라고 하더니 과연 이제껏 보아온 이라크 전쟁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라크 전쟁 영화라고 하면 전쟁 반대파의 목소리를 담아 그 허구성이나 복잡한 미국 내 또는 국제 정치의 맥락 위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그런데 아카데미의 지지를 얻은 이 <허트 로커>라는 영화는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으되 굳이 이라크 전쟁이어야만 했을 이유가 없는, 매우 일반적인 전쟁 영화 – 말하자면 전쟁과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인간에 관한 매우 미시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라크는 없고, 오직 전쟁과 인간만 남아있는 작품이랄까요.



물론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이라크 저항군의 폭탄 테러는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그 안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내의 현재 상황과 매우 밀접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라크 전쟁의 의미를 캐묻기 보다는 등장 인물들이 전쟁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하기는 하되, 이라크 전쟁의 정치적인 맥락을 배제함으로써 좀 더 전통적인 전쟁 영화로 비춰지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등장 인물들이 그 안에서 영웅 놀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들 하고 있으니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까지 볼 수도 있기는 하겠네요 – 그럼 안그런 전쟁 영화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실런지 모르겠지만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2009)도 전쟁 영화이기는 하되 그런 느낌이 훨씬 덜 했던 작품이었던 거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허트 로커>는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전쟁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이 피어스와 랄프 파인스조차 영화 속에서 단명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을 만큼 감독은 어느 누구든 눈 깜빡 할 사이에 바로 죽어나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폭발물 제거반인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는 작품이니 서스펜스의 수준은 거의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정도이지요. 그러다 임무를 잘 마치고 BOQ에 ‘살아’ 돌아온 주인공들이 노는 꼬락서니는 영락 없는 <폭풍 속으로>에서의 아드레랄린 과다 상태의 남성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임스 상사(제레미 레너)는 일종의 전쟁 중독증이 아닐까 싶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남들은 로테이션 근무가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라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은 삶의 의미는 한 가지 밖에 없다며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기까지 합니다.




자연스럽게 전쟁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고, 배우들의 연기나 사실적인 연출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견을 달기 힘든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허트 로커>를 통해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건져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명시적인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것 만큼 스스로 영화의 재미를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적어도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더군다나 매년 그 결과에 주목하게 되는 유명 영화 시상식의 작품상과 주요 부분을 휩쓴 화제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전쟁에 관한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허트 로커>에서 묘사된 전쟁이요? 당연히 참혹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참혹하지 않았던 전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폭발물 제거반이라서 특별한 영화가 된 것인가요, 아니면 이라크에 관한 직설 화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라크 전쟁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준 작품이라서 상을 받은 것인가요.








영진공 신어지

게임 셧다운제와 청소년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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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게임이용시간을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제한하자는 소위 “게임셧다운제” 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밤 12시 이후에는 청소년 이용자들의 게임접속을 차단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자는 것이다. 비록 지난번에는 소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이 안건은 조만간 실제로 구현될 기세다.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70903264532134&linkid=4&newssetid=1352 ]

어떤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과연 이런 법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결과가 기대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뭐든 실제로 저지르기 전에 생각을 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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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시작되어 1848년에 비로소 마무리된 프랑스 혁명의 근본 이념이 자유ㆍ평등ㆍ박애임은 다들 아실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이후 ‘선택의 자유’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마무리되는데 60년이 걸린 프랑스 혁명처럼, 이 자유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뿌리내리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온전한 인간 즉,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유의 수유, 배변훈련, 도덕성의 습득,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었다. 다시 말해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기위생을 관리하고, 양심이 있고 어른 구실하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쯤 후에 태어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은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바로 자기정체성identity이 그것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주체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에릭슨은 우리가 진정한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와 1902년에 태어난 에릭슨 사이에는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중시하지 않았다. 무의식의 힘을 중시한 그에게 자유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봉건사회에서는 주어진 도덕률에 순응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사는 인간이면 충분했다.

반면에 에릭슨에겐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근거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다.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성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와 에릭슨, 둘 사이에는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가 있다.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는 이유는, 이 문제에는 우리가 청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컴퓨터 게임 중독을 ‘영혼을 파괴하는 병’이라고까지 부른다. 물론 게임 중독에 빠져서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사례들을 보자면 이런 표현이 지나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것이라 단정하기 전에 그 영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영혼’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봉건시대에는 신이 부여한 인간의 기본 속성인 양심이나 죄책감 혹은 신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인간을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에서 영혼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의미한다.


물론 도덕성도 중요하고 양심도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는 로봇이나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태도에서도 차이를 만든다. 전근대적인 청소년 육성은 엄격한 훈육을 통해 도덕관과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반면에 근대 시민사회의 청소년 육성은 자유의지를 인식하고 다룰 수 있는 성인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의 인권, 특히 참여권이 중시되는 이유는 청소년에게 자율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경험해본 이들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대부분의 규제들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에서 점차 자율규제 방식으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에도 반영되어 있다. 청소년정책은 초기에는 신체적인 육성이나 청소년 보호 중심의 정책이었으나 1989년에 제정된 『청소년육성법』을 계기로 청소년활동을 강조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청소년 중심적인 정책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들의 권리를 강조한 『청소년기본법』을 통해 좀 더 선진적인 태도로 발전되어왔다. 즉,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훈육 중심의 청소년 육성에서 청소년의 자율권을 인정하고 강화함으로써 시민의식과 민주의식을 가진 성인으로 키워내는 방향으로 변화해온 것이다.

 




이 달의 우수게임 시상식 -.-;;;

이제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자.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 제도의 핵심은 청소년들의 활동에 강제적인 시간규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게임을 언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국가가 부분적으로 청소년 대신 선택을 해주는 것이 이 제도의 기본 목적이다.


물론 청소년들의 수면시간을 보장하고 과도한 게임이용으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청소년 게임이용에 관한 여러 가지 법적ㆍ제도적 규제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이렇게 과격한 규제를 시도하려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자유의지를 가진 청소년 육성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역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에 셧다운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게임들

만약 이런 법안이 발효된다면 청소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남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상태로 12시 이후에는 잠을 자거나 혹은 시험공부를 하는 방법이 첫 번째 선택이다. 아마도 잠을 못자고 공부를 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쨌든 게임은 못한다.


두 번째 선택은 법적 규제를 무시하고 12시 넘어서까지 하고 싶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불가 게임에 자기 부모의 주민번호로 접속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두 가지 모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첫 번째 선택은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범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짜투리 시간에 마땅히 다른 할 거리가 없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짜릿하고 즐거운 활동들을 하다가 가끔씩 게임도 할 수 있는 삶을 누리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 시간 규제가 아니라 다양한 청소년활동프로그램의 제도화와 함께 지나친 입시경쟁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나 역시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12시가 아니라 10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강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길 바란다.


혹은 최소한 부모와 자녀간의 약속이나 부모의 권위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우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유로운 시민이다. 자신이 혹은 자기 자녀가 몇시까지 게임을 할지 조차 국가의 규제에 맡기겠다는 생각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현과 동일하다.


우리가 청소년들의 ‘영혼’을 걱정한다면 특히 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영혼이 파괴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게임 중독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저 강제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게임셧다운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태국과 중국이다.
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시나… 중국은 아실테지?
지금 우리가 태국하고 중국 따라하잔 얘긴가?



  

영진공 짱가

우디 앨런, 스윗 앤 로다운 Sweet and Lowdown (1999)




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레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레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19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