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플라이트”,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한계


호러영화는 원래부터가 여성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스릴 혹은 샤커(shocker)를 주무기로 하는, 호러에서도 슬래셔라는 서브 장르는, 가장 약해보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갖은 고생을 시키면서, 역으로는 감독의 역량에 따라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소외된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또다시 혐오와 공포를 강화시키는지)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
 

『스크림』 호러 컨벤션이 여기서 정확히 반대로 뒤집어졌다

영화에서 섹스를 한 여자주인공이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언제나 10대의 성에 대한 경고라는, 지극히 꼰대적인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보여준 것은 이제껏 공고하게 쌓아올려진 호러장르의 가장 전통적인 장르 컨벤션을 정확히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고, 내 눈에 가장 강하게 띈 것은 역시나 여주인공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옆집 여동생같은 여린 소녀(“니브 캠벨”이 TV 시리즈 『파티 파이브』를 통해 스타가 된 배우임을 상기하라.)는 단적으로 섹스를 하고도 살아남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듬직하고 믿음직한 남자주인공의 노력과 보호를 착취하다가 막판에서야 뭔가 시늉을 하고 살아남는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 철녀도 아닌 주제에 갖은 고생을 하며 오히려 옆집 오빠(“데이빗 아퀘트”)를 구해내고, 당연히 그녀를 지켜주다가 장렬히 죽을 것같았던 남자친구가 오히려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스크림 2, 3는 1에서 오히려 퇴행한 결과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몸은 젊은이라고, 또한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숱한 젊은 (남자) 호러감독들이 하지 못했던 것(혹은 하기 싫어했던 것을 오히려 “웨스 크레이븐”이 ‘아버지의 권위로’ 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수꾸임~!

그러나 『스크림』시리즈가 가진 맹점은, 기존의 호러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었다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기존의 호러 컨벤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장르가 바뀌긴 했지만(『나이트 플라이트』는 슬래셔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결과, 그러나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나이트 플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맥빠지고 심심한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비행기가 도착한 후부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안타까움과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절대적인 공포의 담지자일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보니 허풍쟁이 삼류에 어설픈 마초근성을 드러내다가 망신을 산다. 마초의 법칙은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상황논리에 맞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숫컷의 법칙을 따르라’ 블라블라는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것이다.

‘그녀’가 눈부신 방어자이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폭력의 희생자와 다른 점은, 그녀가 단지 폭력의 ‘희생자'(Victim)가 아니라 ‘생존자'(Survivor)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폭력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다시는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가 다시 닥친 일생 최대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고 다른 이의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참으로 눈부시게, 킬러가 초라해보일 정도로, 고난을 이겨낸다. 너무 쉽다 싶을 정도로.)

여기서 또다시 재미있는 것은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욕망을 느끼는 딸의 관계, 이른바 프로이트적인 아버지-딸의 고착은 스크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호러영화의 컨벤션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새로운 여성성을 부여해준 존재가 B급 호러 영화의 대부, 즉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자’인 “웨스 크레이븐”이다.

아 그러게 폼만 그럴 듯하면 뭐하냐고 ... (그래도 넘 예뻐, 킬리안! ㅠ.ㅠ)

스크린 안에서, 다 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포악한 아버지'(“브라이언 콕스”, 『트로이』에서 아가멤논을 연기한 바 있는 그는 이제껏 너무나 자주 ‘포악한 아버지’를 연기해왔다)가 아니라 그녀 또래의 미성숙한 젊은 남자 잭슨(“킬리안 머피”, 뭇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게스모델 출신의 ‘예쁜’ 남자배우)이다.

이 영화의 갈등구도는 마치, 딸이 데려온 남자친구를 번번이 트집잡아 싫어하다가 딸이 마침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기자 ‘거봐, 내가 뭐랬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며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 주변인물들은 이러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욕망을 온통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뿐이다.

딸보다 어린 남자는 ‘연필을 잃어버리고 당황하는’ 바보일 뿐이고, 딸의 친모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그 친모의 친모는 막 죽었으며(그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딸의 어머니 세대의 다른 여성은 그녀의 호의를 입었으면서도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희망도 되지 못하고 실망만 끼친다. (그녀의 호의로 전달된 ‘책’은, 나중에 그녀의 SOS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개가 됨에도 부주의하게 분실되어 악당의 손으로 들어간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보호하는 것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키프 의원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딸은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구한다. 딸에 대해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여전히 고착된 딸의 이상한 근친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그들 부녀 사이에 이제는 아무도 (아무것도)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유사) 아버지와 딸 - 아버지의 새로운 후계자이긴 한데 ...

아버지는 비리비리한 아들 – 여전히 남성적 권위를 지탱해주는 사회 제도와 법에 기대어 정작 그 자신의 주체는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버린 아들 – 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게임을 치르고 그 누구도 돕지도 돌봐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살아남아 자기 혼자 훌쩍 선택해버린 딸을 선택했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의 세상이 아들이 아닌 딸들의 것이 될 것이라 예감한 아버지의 ‘약삭빠른’ 지분거림일 수도 있고,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폐기당한 것은 아닌 아버지의 권위로 승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이트 플라이트』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딸을 승인한다. 딸을 통해 구원받은 아버지의 보상은 자랑스러운 딸에 대한 인정과 승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와 키프 의원, 둘 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기존의 신화구조에서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역시, 아들과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아들이 두려워 후계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오래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서 딸을 선택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받은 딸에게 굳이 아들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또다른 방식으로든 뭐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하는 단계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딸은 아버지 권력의 대리자, 즉 아버지를 제몸에 승화시킴으로서 구세대적 – 낡은 권력을 되도록 오래 지탱해주는 새로운 지지대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인정은, 아들이 아닌 딸의 가능성과 딸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한 발 나아간’ 진보에도 불구하고, 단지 아들이 아닌 딸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을 뿐 여전히 자식에 대한 소유권과 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굳건한 아버지의 권위’를 고수하며 자식에게 ‘아버지 살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앙시엥 레짐이다.

(브루주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귀족?) 여전히 이것이 “웨스 크레이븐”이 가진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그리고 이미 ‘아버지’인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영진공 노바리

 

“찰리와 초콜렛 공장”, 어디 착한 것만 갖구 신분상승 하겠어?


영화보면서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자꾸 서브 텍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것 참 나쁜 버릇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타고난 criticism이 타고난 creativity보다 많은 걸 …… 범재의 한계지.

“황금 티켓”이라는 건 나에게 “신분 상승을 위한 기회”의 메타포로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서고금, 애어른을 막론하고 겨우 초코렛 공장 한번 견학해 보자고 그 생난리를 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버루카 솔트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황금티켓을 찾은 종업원이 스윽 그 티켓을 감추려다가 감독관에게 빼앗기는 장면은, 더욱 더 “황금 티켓”은 “신분상승”의 티켓이라는 혐의를 확실시 하게 한다.

영화는 신분상승의 황금티켓을 잡는 방법에 대해서 한가지 한가지 친절하게 예를 들어준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는 방법이란, 자본사회에 철저히 순응하며, 악착같이 재화를 소비하거나 (독일 뚱보 아우구스투스 사례), 자본력을 동원하거나 (땅콩공장 딸 버루카), 지독한 승부의식에 불타올라 끊임 없이 노력하거나 (챔피언쉽을 수십개 가진 바이올렛), 아니면 대단한 I.Q와 권모술수의 대가가 되는 일이다 (해킹으로 티켓을 얻은 마이크 티비).

이에 비하면 우리의 주인공 찰리 버켓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 티켓을 얻게된다. 근데, 이게 정당한 건가?

초콜렛 공장의 경우도 산업사회 역사를 압축한 혐의가 짙다. 윌리 웡카는 성공한 자본가이고 (물론 자본만 가지고 성공한 것은 아니고, 본인의 아이디어가 있으며, 사업가로써의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의 Enterpreneurship은 존경할 만하다), 찰리의 할아버지는 1차 Sabotage 세대, 찰리의 아버지는 2차 Sabotage세대다. 움파룸파족은 제 3세계의 노동자이며, 자본가인 윌리 웡카는 단순히 코코아빈을 움파룸파족에게 제공하는 저렴한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심지어 자신이 불쌍한 움파룸파족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움파룸파 족은 공장에 갖혀서 지내고 있다!)

자그맣고 충성스러운 움파룸파 족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제 3세계 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지하 수로에서의 노젓는 장면에서 윌리 웡카는 ‘저들은 앞을 볼 수 없지, 그저 명령하는 대로 저을 뿐’이라는 말까지 한다.) ‘후계자를 찾기 위해 아이들을 초콜렛 공장으로 초대했다’는 윌리 웡카는 왜!! 움파룸파 족에게는 공장을 물려주지 않는 걸까.

결국, 시키는 대로만 잘 하고, 매뉴얼대로만 살아가는 FM guy 찰리는 윌리 웡카에게 ‘초콜렛 공장 공동 경영권 및 상속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자신을 해고한 자본가에게 끝까지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지 않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건강을 다시 되찾고, 그의 착한 아버지는 자동화 설비와 함께 해고되었다가, 그 기계를 유지/보수하는 일로 재 취업됨으로써 ‘신기술로 인한 노동 소외는 다시 다른 노동의 필요로 채워진다’는 요지의 보수적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증명까지 시켜준다.

정말? 정말 착하기만 하고, Creativity만 온 몸에 충만하면 신분 상승 할까? 정말?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라도, 어차피 우리는 끝없는 승부의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바이올렛이기도 했다가 , 때로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지력(知力)을 이용해 보려고 하는 마이크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하릴없이 자본이 쏟아 놓은 소비재들만을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해내며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아우구스투수였다가 하지 않는가? (버루카 솔트는 예외니까 그냥 두자) 왜 이 아이들이 비난을 받아야하는가?

아이들을 벌 주는 방법자체도 상당히 아동학대적이기도 하지만, 왜 신분상승을 위해 악을 악을 쓰는 불쌍한 우리 중생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이 영화의 전체적 태도도 참 학대적이다. 난 내가 바이올렛이라는 것이, 마이크라는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영진공 라이

“솔로이스트”, 당신의 솔로는 오늘도 무사합니까?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명제가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사회나 팀스포츠에서 개개인을 어떤 틀이나 목표에 묶어서 조련을 하고 독려를 하면 그 개인 각각의 역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반면에 그 틀이 엉성하거나 감독의 방식이 그르면 오히려 결과는 매우 허접해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보면 저 말은 그렇다라는게 아니라 그래야한다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의 속내를 보면 그 안의 부분들이 고르게 더 나은 결과를 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위는 역량보다 몇 배 뛰어난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어떤 단위는 역량에 근접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또 어떤 단위는 아예 결과를 깎아먹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틀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단위는 슈퍼스타가 되고 어떤 단위는 소위 “Loser”가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그닥 차이가 없어보이는데도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걸까.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많이 다른 단위들을 하나의 틀에 넣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보면 모든 단위에게 어느 정도의 획일성과 몰개성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를 잘 받아들이면서 훌쩍 뛰어 넘으면 슈퍼스타가 될 터이고 그저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면 필요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단위가 될 터이며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루저가 될 터이다.

루저를 지나쳐서 아예 탈락자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개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섞이지 못하거나 섞임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별의 능력이 부족함에도 전체에 어떤 형태로든 과다밀착하여 마땅한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또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해 탈락하는 이들은 그저 못난이에 불과한 것일까.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게, 전체 속의 유용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에 서투른 이도 홀로 무언가를 만들고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매우 뛰어난 경우가 많이 있다. 역사를 살펴보거나 아니면 그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아도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쯤되면 전체와 부분을 구분한다는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전체 속에서 훌륭히 기능하는 단위는 따지고 보자면 유능한 Soloist인 것이고,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하는 Soloist도 그에게 맞는 전체가 주어지면 또한 훌륭한 단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나다니엘 (제이미 폭스 분)에 대해서 국내 홍보문구는 “삶의 길을 잃어버린 천재 음악가”로 써놓았는데, 사실 영화 속 내용에서는 나다니엘을 천재라고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가 본 아이 중 가장 재능있다고 한 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홍보태그도 “Nathaniel Ayers had lost his way. He was about to get a second chance. (삶의 길을 잃은 나다니엘, 두 번째 기회를 얻으려하다.)”라고 돼있다.

여하튼 첼로연주에 재능을 가진 나다니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의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한채 오로지 밤이고 낮이고 첼로에 몰두하였고 ‘홀로’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음악계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걸로 유명한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허나 그 순간부터 나다니엘은 길을 잃기 시작한다. 재능있기로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료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함께 연주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겹치면서 낙오를 하고야 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던 나다니엘은 우연히 유명 신문 칼럼니스트 스티브(로버트 다우니 쥬니어)의 눈에 띄게 되고, 첼로를 연주하는 부랑자라는 점에 끌린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정상(?)의 삶으로 끌어올리고자 애쓰게 된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 생활환경을 제공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유명 지휘자와 종교인 등에게 소개를 시키고 후원을 부탁하는 등 스티브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나다니엘을 정상인, 아니 그 이상의 훌륭한 연주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브가 그리는 그림일 뿐이었고, 나다니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고 발벗고 나선 이들 누구도 정작 나다니엘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나다니엘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래서 벗어나야만 했던 틀과 유사한 틀을 다시 씌워주려 했을 뿐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여러가지로 다르게 다시 해도 무방하다. “절이 싫으면 뜯어 고쳐라”, “절이 싫으면 사람들을 모아 새 절을 만들라”, “절이 싫으면 힘을 길러 주인이 되어라”, “절이 좋으면 사람들이 더 모이게 애쓰라” 등등 ……

하나의 절이라는 전체가 훌륭한 각 구성 부분들이 합쳐져서 그렇게 좋아진 것 만큼이나, 각각의 구성 부분을 전체로 잘 아우를 수 있어야 좋은 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 전체와 부분은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전체를 위해 부분이 과도하게 희생하거나 일부가 전체인양 모든 걸 좌지우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굳이 말로 다시 쓸 필요가 없겠다. 그러니 절이 싫으면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 틀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구성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인지를 잘 가려서 그에 따라 대처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데에 있다. 보통 부분은 전체에 비해 힘이 턱없이 적고 여러 부분들이 힘을 합쳐도 기존의 전체와 맞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중들이 떠나고 만다.

오늘도 나의 솔로는 경계선에서 연주되고 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중간 쯤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 전체의 문제점에 대해  적절히 분노하려고 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이 초라한 연주도 아니다. 이런 솔로는 매우 많아서 보통 다른 이들의 연주와 뒤섞여 그냥 퉁쳐서 한묶음으로 들린다. 참 피곤하면서 티도 안나는 솔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들 중에도 어느 하나는 전체를 이끄는 한편, 어느 솔로는 전체와 동떨어져서 홀로 연주하곤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퉁쳐서 한묶음 속에서 연주하면서 거기에서도 나서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속에서 연주도 안하고 놀면서 묻어가려고 한다. 이 중에 어느게 좋은 건지, 맞는 건지는 당연히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터이지만.

자, 당신의 솔로는 어떠하신지. 오늘도 무사히 그럴듯하게 연주되고 있나요.


영진공 이규훈

“퀴즈왕”, 장진 감독의 미완성 복귀작


<퀴즈왕>은 여러모로 장진 감독의 복귀작처럼 느껴진다. 최근작 <거룩한 계보>(2006), <아들>(2007),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는 흥행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왠지 영화감독 장진의 작품처럼 받아들여지지를 못했던 것 같다. <기막힌 사내들>(1998)로 데뷔한 이후 <간첩 리철진>(1999)과 <킬러들의 수다>(2001), <아는 여자>(2004)와 <박수칠 때 떠나라>(2005)를 통해 확고히 해왔던 새로운 아이디어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최근의 영화들과는 그 모양새부터가 왠지 잘 어울리지를 못했다고 생각된다.

데뷔작부터 장진 감독의 영화를 계속 보아온 이들에게는 그의 영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재미와 각별함에 대한 애착이 있다. 장진 감독이 아니면 영화화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시종일관 낄낄거리면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 장진 감독이 없는 한국영화계는 정확히 17.4% 불행한 거다 – 안도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퀴즈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장진 감독의 복귀작이라 “할 수도 있었을” 작품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장진 감독은 지금 영화 연출자로서의 긴장감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퀴즈왕>이 바로 그런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한다. <퀴즈왕>에는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는 하다. 장진 사단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주조연과 단역 출연을 불문하고 떼거리로 몰려나왔고 그 배우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맡은 연기를 감칠맛 나게 참 잘도 해낸다.

한 두 명의 주연 배우에게만 집중하지 못하고 작은 배역의 단역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캐릭터를 부여하면서 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당극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퀴즈왕>은 확실히 장진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를 붙여주기에 충분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퀴즈왕>이라는 마당극이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제대로된 오케스트레이션을 창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캐스팅 자체가 다분히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데다가 – 물론 <퀴즈왕>을 통해 올해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굉장히 잘된 캐스팅도 몇몇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적인 조화다 – 그런 결과로 인해 영화의 대단원 자체가 허공 위에 붕 뜬 상태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것은 한 편의 영화로서 연출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퀴즈왕>은 나름 재미있는 영화다. 시네마서비스가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으니 투자비 회수 쯤이야 크게 걱정할 바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퀴즈왕>은 장진 감독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만큼을 충분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분명히 아니다.

기왕 영화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머무르려고 하지 말고 아직까지 못해본 새로운 한계점에 도전을 해보든가 아니면 잘 하던 영역에서 확실하게 엑기스를 뽑아내든가 해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그게 아니면 좋게 기억될 때에 과감히 떠나라고도 하고 싶다. 장진 감독의 각본과 제작 지원을 받아 훨씬 나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인 감독은 많다.

한가지 기대를 가져볼 수 있는 이유는, <퀴즈왕>은 최근 장진 감독의 영화 같지 않았던 세 편의 영화 이후에 처음 내놓는 터닝 포인트로 남게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자기 살 파먹는 자세로 간편하게 영화를 만들어 내놓는다면 앞으로 한국 영화계의 막후 실력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좋은 영화 연출가로서 남게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퀴즈왕>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아 다시금 자기 작품 세계를 재구축하는 데에 주어진 시간을 충분하게 쏟아붓는다면 관객들은 <퀴즈왕>을 장진 감독의 복귀가 시작되었던 –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 이정표로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장진 감독은 아직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은 지금 바로 떠나든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영화 연출가로서의 입지를 다시 세워나가라.

영진공 신어지

 

“주성치”, 비관과 낙관 사이의 아슬아슬한 곡예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



배트맨은 부르스 웨인이 변장한 캐릭터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가 변장한 캐릭터야. 하지만 수퍼맨은 달라. 수퍼맨이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어 변장한 캐릭터가 클라크 켄트지. 그런 면에서 수퍼맨은 아주 독특하지.
– 영화 “킬빌” 중에서

주성치 대인의 영화 “쿵푸 허슬”. 영화 … 끝내준다. 그는 이야기의 완급조절, 액션의 밀도와 상상력에 있어서 진정 본좌다. 근데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도끼파가 쏘아 올린 폭죽이 도끼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연출들을 보며 지나치게 낄낄거리던 내 주변 관객들은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영화가 끝난 후, 그 초반에 즐거워하던 관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야,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재미없어…”

오해의 시작, 소림축구


그의 전작 『소림축구』를 통해서만 주성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갖는 큰 오해 중에 하나는 그가 코미디 배우이고 그의 영화가 코미디라는 생각이다. 그건 사실 채플린의 영화를 코미디로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하기 쉬운 오해지만, 그 오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댓가의 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채플린의 영화는 코미디로 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주성치의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하면 뜻밖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앞서의 그 관객들도 이런 오해의 희생자다. 이 댓가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를 “금발미녀 공금횡령 도주사건 이야기”로 착각하고 보던 관객들이 샤워실 살인 장면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크고, 놀러 갔다가 매맞고 돌아온 아이들의 심정만큼이나 억울하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희극지왕』이 전혀 희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오해는 진작에 접었어야 할 일이다.
 

희극은 커녕, 비극이더구만 ...


그는 『도신』을 패러디한 『도성』에서 인간슬로모션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황당한 상상력은 단순히 웃기는 쪽으로만 뻗어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품지마관』 같은 영화에서는 고관대작에 잘못 걸려 누명을 뒤집쓴 임신부가 항의하다가 입에 곤장을 맞고, 배를 짓밟혀서 유산(!)을 하고 질질 끌려가는데 이건 결코 코미디가 아니다. 물론 그 뒤에 말발로 폭포를 이겨내는 장면으로 이 비장/애통이 커버되긴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서의 비장/애통이나 폭포수와 싸워 이기는 말발은 모두 같은 황당함이다.

『홍콩 레옹』에 나오는 귀신들의 사연도, 그 귀신들에 엮여서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인물들의 모습도 역시 코미디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드고어 호러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마구 죽어나가는 장면을 의외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식신』에서 잘나가다 배신당해 비참한 처지에 몰린 주성치가 비루하게 굴다가 더 심하게 짓밟히는 장면도, 『서유기 – 월광보합』에서 도적들이 여자주인공 언니의 칼에 맞아 순식간에 황천가는 장면들도 모두 당연한 일인 듯, 무덤덤하게 연출된다.

『소림 축구』에서는 수위를 아주 낮췄지만, 여전히 그 잔인 무도함은 남아있다. 라이벌의 계략에 말려 무릎이 박살나서 절름발이가 되고,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때문에 끝없이 비굴하게 굽신대야 하는 오맹달의 처지는 결코 코미디용 설정이 아니다.

이러니 『쿵푸허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뽑은 칼을 다시 그 상처에 꽂아 넣고, 그 칼을 사이드 미러로 쓰며, 어린아이가 오줌 세례를 맞고, 일가족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며, 아무렇지도 않게 죄 없는 새끼고양이를 반동강이 낼 수 있는 것이다.

웃기되, 그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그의 영화들 ...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평범함을 뛰어넘고 남의 눈에 띄기 위해서 기발해지고 창의적이 되어보려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발함을 감추고 평범한 척, 상식적인 척해야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마치 클라크 켄트라는 변장으로 자신의 본질을 감춰야 하는 수퍼맨처럼 말이다.

창의성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키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갖고 태어나는 독특성의 문제다. 어떤 생각이 창의적이라는 말은 그 생각이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뜻이며, 기발한 상상력은 규범을 벗어난 일탈적인 생각을 뜻한다.

『쿵푸허슬』에 보면 정신병원이 등장하는데 이 병원의 제목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비정상자 수용소’ 비슷한 이름이었다. 사실 정신병은 상식을 심하게 벗어난 사람들,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붙이는 의학적 죄명인데 그런 면에서 주성치 역시 바로 그 병원에 수감되어야 하는 존재에 가깝다.

주성치는 『킬빌』에서 얘기한 수퍼맨처럼 세상이 자신의 본색을 이해해주기는 포기하고,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자신의 본질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초부터 비정상적이던 그의 본색은 영화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것이 그의 영화들 전체를 아우르는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의 관점, 그의 본색은?

그가 보는 세상은 무자비하다. 『소림축구』에서 양아치들과 축구를 하려다가 집단 린치를 당하던 주성치가 오맹달에게 항의한다. “이게 무슨 축구예요! 싸움이죠.” 그러자 오맹달이 화를 내며 대답한다. “축구는 원래 전쟁이야!!” 이건 그가 축구 이전에 인생 자체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함부로 노닥거릴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눈뜨고 코 베어가고, 그런 꼴을 당해도 동정은커녕 코가 잘려진 병신이라고 더 짓밟아버리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지옥도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패배자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그렇게 절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모두가 잠재적인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단지 패배를 미루어 둘 뿐이다.
 

『서유기 - 선리기연』의 이 장면, 주성치식 로맨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우리를 감동하게 만드는 건, 그 지옥을 지옥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삐딱함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구라와 로맨스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세상이 그렇게 무자비한 지옥일지라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그 와중에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미학이고 그의 영화가 주는 긴장감의 근원이다.

역시 『쿵푸허슬』에서도 재연되는 주성치식 로맨스 ...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들고,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그의 본색이며 그의 영화는 점점 이 본색을 드러낸다.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