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부재의 폐해와 공포, <도쿄 소나타>(トウキョウソナタ)

구로자와 기요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기성세대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도무지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사소한 분쟁이 생겨도 변호사에게 일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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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2008)는 기요시 감독이 그동안 느꼈던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가족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도쿄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다. 값싼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실직한 아버지, 미국을 세계 경찰의 선으로 알고 미군에 입대하는 첫째 아들,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집밖으로 나도는 둘째 아들, 이를 알고도 내색하지 못한 채 속병 앓는 어머니, 이렇게 몰락해가는 가족의 이면에는 소통부재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기요시의 감정은 공포 그 자체다.

이미 전작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등을 통해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도쿄 소나타>에서 그가 보여주는 공포는 색다른 면모가 있다. 기요시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작품 활동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런 의지는 <도쿄 소나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늘 소통 부재에 따른 일본인의 무의식에 입각한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큐어>는 최면에 걸린 채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의 행각을 통해 기요시의 테마가 뚜렷하게 수면 위에 떠오른 작품이었다. 다만 이들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의 실체가 일본사회의 불안정한 시대의 징후처럼 묘사된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소통 부재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더랬다.

<큐어(Cure)>의 DVD 표지

<도쿄 소나타>는 그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작품이다. <큐어>를 비롯한 전작들이 기요시가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풀숏의 공포를 보여줬다면 <도쿄 소나타>는 클로즈업의 공포를 보여준다. 바로 이점이야 말로 기요시가 새로운 영화경력을 마련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다시 말해, 기요시는 소통 부재의 출발점을 가족에서 찾는다. 그중에서도 가부장의 위기야 말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대두에 따른 가부장의 몰락은 전통적인 개념의 권위를 지키려는 가장의 일방적인 소통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기요시의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식사 장면은 가족의 갈등과 비극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이들은 대부분 혼자 밥을 먹거나 아니면 어머니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 할 뿐이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뻘쭘하니 있는 저녁 풍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방향적 소통의 폐해, 즉 기성세대에게 목격되는 소통부재의 에피소드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을 ‘안 돼!’ 한마디로 일축하는 아버지, 버릇없는 행동을 사과하러온 학생에게 서로 참견하지 말자며 소통을 회피하는 선생님, 이혼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변호사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이혼 당사자 등등. ‘모든 인간은 섬이다.’는 누군가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을 그어 놓고 대화를 허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 속에는 바람 소리가 전하는 비극의 전조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도쿄 소나타>라는 음악적인 작명이 품고 있는 역설적인 뉘앙스는 그래서 더욱 스산하다.

개인적으로 <도쿄 소나타>를 보면서 그동안 기요시 영화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영화에서 자주 목격했던 침묵의 실체 또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이를 ‘침묵의 반응숏’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목격한 극중 인물들이 얼마간 침묵으로 반응하는 장면을 일본의 적지 않은 수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부조리를, 사부(<포스트맨 블루스> <먼데이>)는 코믹함을, 기요시는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일본영화 특유의 스타일이라기보다 일본인의 소통부재에 대한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다.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이 여러 면에서 중의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받은 둘째 아들 켄지(이노와키 가이)는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한다. 다만 켄지의 피아노 소리를 빼면 주변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의 연주에 감화 받은 인상은 역력한데 누구하나 박수를 치거나 반응하는 이가 없다. 다만 완벽한 연주와 철저한 침묵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빚은 균열이 느껴진다. 물론 그 균열은 기요시가 품고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최소한의 희망일 터. 그 하나가 켄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요시의 기대감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침묵의 시퀀스로 상징되는 영화적 소통부재의 무의식에 파열을 가하려는 기요시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도쿄 소나타>의 결말부가 누군가의 꿈이거나 희망사항처럼 애매모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사회에 희망을 품어보려는 기요시의 시선? 아니면 꿈이나 환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비극? 무엇이 되었든 간에 구로자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영진공 나뭉

짝짓기

1.
세상의 모든 양서류는 보름날 짝짓기한다.

2.
음력 5월 21일에 서울대공원 인공 증식장에서 사육되던 개구리 이만칠천 마리가 사라졌다. 보름달은 그로부터 일주일 전에 떴을 터인데 콘크리트 지붕 아래 있던 이만칠천 마리의 개구리들은 보름달을 보지 못했다. 그
전 달도 그랬고, 그 전전 달도 그랬다. 언제 짝짓기를 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는 이만칠천 마리 개구리 중에는 타고난 본능을
무시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놈은 단연 수컷인 경우가 허다하여서, 왕왕 어떤 수컷은 달의 유무와 상관없이 암놈의 궁둥이를
올라타기도 했다. 인간과 달리 개구리 암컷은 365일 짝짓기가 가능하지 않으니 미련하게 왕성하기만 한 수컷은 헛힘만 쓰고 내려올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놈들은 소수일 뿐이었고, 몸에 박힌 천성대로 짝짓기를 하지 못하는 개구리들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오빠, 오빠가 남자로 보여”
“왕눈아 너는 나를 채워주지 못해”
“당신의 등은 너무 섹시해요, 물방개 씨”
“이 놈, 우리집 며느리로 곤충을 들일 수는 없다”
욕정에 다급한 젊은 놈들은 근친과 종의 장벽을 허물 기세였고, 피에 얽매이는 늙은 놈들은 씨가 끊긴다는 위기감에 급박했다.

그리고 놈들은 마침내 어제 사라졌다. 콘크리트 지붕 아래 갇혀 보름달을 보지 못한 채 살아온 이만칠천 마리 개구리들이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3.
인공증식장에서 개구리 사육장 청소를 맡아 하던 고철구는 곤란했다. 개구리가 사라졌으니 청소일은 훨씬 더 수월해졌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육장은 실외의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달랐다. 밖에 비가 오면
그녀는 혼자 비의 냄새를 맡고 처량하게 울었으며, 밖에 바람이 불면 그녀는 혼자 들밀 잎사귀에 올라 앉아 청승맞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몸은 사육장 밖 세상의 햇빛·바람·흙·물과 같이 연동했고 같은 계통이었는데 그 몸으로 감지하는 세상의
온도·습도·풍향·기압이 그녀의 감성을 울려댔다. 그 흔들리는 몸과 감성에 젖은 고철구는 마침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청개구리
아롬이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지적 능력이 있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거창한 학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 역시 욕정과 결부되는 것이라서 고철구는 아롬이와 짝짓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짝짓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철구는 괴로웠다. 한편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아롬이도 다른 놈들과
짝짓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치졸한 질투의 불길은 잠재울 수 있었으나 욕망을 배출하지 못하는 사랑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사라졌다.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청개구리 아롬이도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4.
탈출로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난 8월 5일은 음력 유월 보름이었다. 이만칠천 마리 개구리 중 살아남은 놈은 쉰두 마리 뿐이었다.
학살은 왕복 8차선 도로에서 주로 일어났고, 이백여 마리는 과천시 막계동 샛말 순이슈퍼에서 키우는 잡종개 또순이의 호기심에
걸렸고, 백여 마리는 하굣길의 초등학생들에게 당했는데, 그중 한 놈인 왕눈이는 똥구녕에 빨대가 끼워졌다. 아롬이는 개골개골
절규하며 퐁퐁퐁퐁 도망쳤다. 엑소더스에서 살아남은 쉰두 마리 개구리는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주변 풀가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해는 이미 어둠을 토해내며 꺼졌고 지천으로 땅거미를 덮은 백운들 뒤로 허연 달빛이 스물거리고 있었다.


음력 유월 보름인 8월 5일 저물녘, 고철구도 백운호수 주변 풀가에 있었다. 안절부절 시간을 보내다가 아롬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출근길 아스팔트에 눌러붙은 수천의 개구리 시체가 떠올랐다. 조금 더 헤매자 교외 슈퍼 개밥그릇 속에 나뒹굴고 있는
개구리들을 찾을 수 있었고, 며칠 후에는 초등학교 담벼락 뒤에 널부러진 개구리들 역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떤 놈은 항문에
빨대가 꽂힌 채 배가 터져 있었다. 개구리들의 사체는 띄엄띄엄 그를 이곳까지 인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둠 속에 흐릿하게
남은 잔광을 통해서 아롬이를 볼 수 있었다. 수척했지만 푸른 등의 고독함은 여전했고, 풀잎에 앞다리를 붙인 채 치켜올린 턱은
요염했다. 반들거리는 피부 속에서 그녀의 감성은 바람소리를 냈으며 무엇인가를 섧게 갈구하고 있었다. 고철구도 섧게 눈물을 흘렸다.



5.
보름달이 중천에 떴다. 개구리들은 암놈 숫놈을 가리지 않고 올라 타 난교를 퍼부었다. 어떤 놈은 개골 울었고, 어떤 놈은 엉엉
울었으며, 어떤 놈은 뒤에서 했고, 어떤 놈은 배를 맞대고 했다. 잔잔한 달빛은 충분히 서늘해서 놈들이 아무리 불타더라도 양껏
식혀줄 만했다. 놈들은 그치지 않고 하고 하고 또 했다. 보름달이 빛을 거두며 식어갈 무렵까지 놈들은 멈추지 않았으며,
달이 지고 빛이 완전히 사윈 후에는 어둠에 잠겨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녀석들이 그때까지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동트기 전 가장 두꺼운 어둠 속에 후렛쉬 불빛이 여러 개 서성였다. 커다란 뜰채를 둘러멘 이들은 개구리 증식장 이민수 박사와
연구원들이었다. 개구리들은 모두 돈을 들여 사육하던 것들이었으니 이 놈들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시예산이었다. 박사와 연구원들은
만 원짜리를 줍듯 도망친 개구리들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참개구리와 청개구리가 모두 합해 쉰세 마리였다.


8월 6일 날이 밝았을 때 고철구는 출근하지 않았다.



영진공 철구

마이클 잭슨, 그 전설을 추억하며 …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그 이름은 단순히 팝음악의 스타라는 이미지를 넘어서서 한 시대와 그 문화에 대한 icon이자 이제는 전설의 자리에 놓여지게 되었다.  지난 6월 25일 우리 곁을 떠나간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전설의 발자취를 추억해보고자 한다.

마이클 잭슨이 전설로 자리잡게 된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음의 세 가지가 가장 주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1. 마이클
두 말 할 것도 없이 마이클 그 자체가 참으로 뛰어난 엔터테이너였다.  팝계의 역사를 통해 가창력이나 춤 솜씨가 뛰어난 이들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마이클 처럼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하여 펼쳐보여준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의 가창력은 사실 영혼을 울리는 떨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가 추구하는 그루브(Groove)에 최적화되었고, “Off The Wall” 앨범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발휘한 작곡능력 또한 그가 발표했던 수 많은 명곡들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의 춤사위는 논쟁의 여지가 별로 없이 최고라고 불리운다.


아, 그리고 마이클은 공인된 발명가이기도 했다.
뭔 얘기냐하면 … 그 뭐냐 “Smooth Criminal”에 나오는 몸을 기울이는 동작에서 신는 신발을 특허로 등록하였다는 거다.

못 믿겠으면 여기를 누질러 보시길.

2. 퀸시 존스 (Quincy Jones)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 하였듯, 잭슨파이브 (Jackson 5) 시절 그저 재능있는 어린 소년이었던 마이클이라는 구슬을 정성껏 갈고 닦고 꿰어서 전설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가장 큰 조력자는 누가 뭐래도 퀸시 존스이다.

퀸시 존스가 뭐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려면 무척이나 길어지는데 무쟈게 줄여보자.
1933년생인 그는 열여덟살 때에 트럼펫 연주자로 재즈 음악계에 입문한다.  이때의 모습은 영화 “레이(Ray)”에서 묘사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찾아보시길.
그리고 1962년에 그의 가장 큰 히트곡이랄 수 있는 “Soul Bossa Nova”를 발표하는데, 이 노래는 영화 “오스틴 파워즈”의 테마음악 등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어서 그를 모르는 사람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곡이다.
이후 그는 음반기획과 제작에 전념하였는데, 1981년에는 “The Dude”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하여 “Ai No Corrida” “Just Once” 등의 히트곡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퀸시와 마이클의 만남은 1979년 발매작 “Off The Wall”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Thriller”와 “Bad” 앨범까지 그들의 조화로 이루어진 결과물들은 음악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둘은 이런저런 이유로 더는 함께 작업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시 존스가 마이클 잭슨이라는 전설을 이루는데 참으로 큰 역할을 하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3. 기타 (Guitar)
수록곡 전체가 빠짐없이 대히트를 기록한 앨범 “Thriller”에는 당시 댄스음악을 경멸(?)하던 이들까지 열광케한 곡이 있었으니, 그 곡은 바로 “Beat It”이다.  많은 이들이 그 곡의 뮤비에서 보여지는 안무에 감탄하고 따라하기 바쁠때 음악 좀 듣는다거나 실제 연주를 하는 이들은 춤사위에 어우러지는 기타 솔로와 곡 전체를 리드하는 리프에 말 그대로 놀라자빠졌더랬다.

Eddie Van Halen의 화려한 솔로와 Steve Lukather의 강렬한 기타플레이가 곡 전체를 휘감고있는 “Beat It”은 팝음악계에 댄스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Funk 리듬과 헤비메탈기타에 맞춰 멋드러지게 댄스 루틴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Off The Wall” 때 부터 이러한 사운드의 실험은 시작되었고, “Thriller”의 대히트를 통해 기타는 마이클 잭슨표 음악의 중추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마이클의 사운드는 일관되게 기타를 앞장세웠고, 기타를 사용하지 않은 곡에 있어서도 다른 악기를 통해 매혹적인 리프의 반복과 강한 타격음을 내세웠고 라이브에서도 마이클은 기타를 주축으로 사운드를 구성하였다.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기타리스트를 들자면 Eddie Van Halen, Slash, Larry Carlton, Steve Lukather 등 쟁쟁한 이름이 즐비하고 라이브에서는 Jennifer Batten 등이 활약하였다.

이쯤에서 마이클의 라이브를 하나 보도록 하자.

<전설의 발자취>

마이클 잭슨의 디스코그래피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는 잭슨5의 앨범은 제외하도록 한다.

1. Got To Be There(1972)
마이클의 솔로 데뷰 앨범으로, 14세의 그를 잭슨5의 재간동이에서 탈피해 어엿한 가수로 인식하게 만든 앨범이다.


대표적인 수록곡은, “In our small way” “Got to be there” “Ain’t no sunshine” “Maria” 등인데 이 중 특히 “Maria”는 국내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서 예전에 인순이도 자주 이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아래를 누질러 들어보도록 하자.


2. Ben(1972)
사람을 물어 죽이는 쥐새끼에 관한 영화 “Ben”의 주제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앨범.  대표곡은 “Ben”과 “In our small way”이다.

예나 지금이나 쥐새끼가 말썽이다. 하루 빨리 박멸하세~

“In our small way”는 “나무자전거”의 “강인봉”이 어린 시절 “작은별 가족”으로 활동할 때 “나의 작은 꿈”이라는 노래로 번안해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참고로 “Ben”과 함께 마이클의 어린 시절 대표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I’ll be there”는 잭슨5의 1970년 작 “Third album”에 수록되어 있다.

역시 아래를 누질러 들어보자.


3. Music & Me(1973)
마이클이 변성기를 맞는 시기에 나온 앨범으로 대표곡은 “Happy”와 “Too young” 등이다.


아래를 누질러 들어보자.


4. Forever, Michael(1975)
마이클과 잭슨5의 모타운 레코드 시절을 마감하는 앨범.  대표곡은 “We’re almost there”와 “Just a little bit of you”이다.


이 앨범 이후 그의 활동은 잠시 소강기에 들어간다.

아래를 누질러 수록곡 중 하나를 들어보자.


5. Off The Wall(1979)
마이클 잭슨이라는 전설을 잉태하게 된 앨범.  이전까지의 마이클은 그저 노래 잘부르고 춤 잘추는 곱상한 청년으로 인식되어왔는데 이 앨범은 마이클을 진정한 스타로 그리고 향후 전설을 이룰만한 뮤지션으로 탈바꿈 시켜주었다.


퀸시 존스와의 첫 작품으로 마이클 잭슨표 음악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만든 이 앨범의 대표곡은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와 “She’s out of my life”, 그리고 개인적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Rock with you” 등이다.

그럼 아래를 누질러 그루브라는 게 뭔지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그 노래를 들어보자.



6. Thriller(1982)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 노래나 듣자 … 아니 보자!

7. Bad(1987)
팝음악계 사상 근접하는 기록조차 찾아 보기가 힘든 대성공을 거둔 전작 “Thriller” 이후 5년 만에 나온 앨범.  이 앨범서부터 마이클은 앨범 제작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가고자 시도했고 결국 이 앨범이 퀸시 존스와의 마지막 작업이 된다.


전작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둔 이 앨범 역시 대표곡을 고르기가 힘들 정도이지만, 영화 “Moonwalker”에서 나온 장면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곡을 들어보도록 하자.


8. Dangerous(1991)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200 앨범챠트 1위를 차지한 앨범.  퀸시의 영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앨범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이전의 작품들보다는 산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마이클 잭슨의 특유의 음악으로 가득찬 수작.


대표곡은 “Black or White” “Remeber the time” “Heal the world” “In the closet” “Will you be there” 등등등등등 …

한 편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뮤직비디오로 인해 더욱 인상깊은 그 노래를 들어보자.


9. HIStory(1995)
히트곡 모음과 정규앨범을 합친 더블앨범.  이 앨범의 발매와 동시에 수록곡과 뮤직비디오를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빚어졌고 노골적인 반(反) 마이클 정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특히나, 미국 내에서는 이 앨범 수록곡인 “They don’t care about us”와 관련하여 “Jew me”라는 가사를 둘러싸고 유수의 언론에서 비판기사를 게재하는 등 무척 시끄러웠다.  마이클 사망 전 마지막 동영상으로 공개된 리허설 장면에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기도 하다.

논란 끝에 변경된 버전 이전의 오리지널 버전을 가사와 함께 들어보도록 하자.


10. Invincible(2001)
이 앨범이 결과적으로 마이클의 마지막 정규앨범이 되었다.  Babyface와 R. Kelly 등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  무난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표곡은 “You rock my world”와 “Butterflies” 등 …


여기까지다.
마이클 잭슨, 그 전설에 대한 추억을 재즈 그룹 “윈터플레이”의 “Billie Jean”을 들으며 마무리하도록 하자.


[MBC ‘음악여행 라라라’, 2009년 5월 11일 방송]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