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vs “셔터 아일랜드”, 진실을 대하는 두 가지 방법

천안함 전사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진실이 놀랍거나 거대하거나 처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의지하던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식스센스>의 주인공이 직면했던 진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현실을 왜곡해왔던,
자신의 모습이 그 진실 속에 담겨있었다.


걔네들은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봐요

내가 그리 잘못 알았던 것이 누군가에게 속은 탓이라면,
나를 속인 그를 비난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그 거짓말을 받아들여왔다면,
그래서 내 삶을 지금까지 그 거짓말에 기초해서 쌓아올렸다면,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존재 자체를 뭉개야 한다.

결국 진실이냐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와 <마더>,
전자는 2차 대전과 매카시즘을 배경삼은 미국 영화고,
후자는 피끓는 모정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면이 있다.

일단 두 영화의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찾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그 진실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한 진실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절망과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입구였을 뿐이다.


진실을 찾아내겠어!! 정의를 구현하겠어!!!


이게 진실이라니…


 

 



우리 애 그런 애 아니거등? 내가 진실을 찾아내 보여주게써!!!


아, 이게 진실이라니 … -_-

거기서 두 주인공은 진실이냐 아니면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마주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다.

<셔터 아일랜드>의 테디는 ‘괴물로 살기보다는 결백하게 죽기’를 선택한다.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지우기로 한다.
죄책감이 자신을 먹어치우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지우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이게 차라리 낫지 …

하지만 <마더>의 엄마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자신과 자식을 위해서 진실을 지우기로 한다.
망각의 침 한 뜸과 묻지마 관광버스의 음률에 모든 것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비록 자신의 내면은 죄책감으로 조금씩 썩어가겠지만,
겉보기의 삶은 평온할 것이며 모두가 만족할 것이라고 스스로 안위하며 …
이는 ‘결백하게 죽기보다는 괴물로 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


침맞고 묻지마 관광 가자!!!

<마더>의 결말을 보던 당시에는 그저 그녀가 안쓰러웠다.
과연 그녀의 삶이 그 소망대로 이루어질까.
그의 삶이 과연 평온할까. 아들은 그녀를 이제 어떻게 대할까?
그녀는 예전처럼 자신있게 아들을 변호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삶에 진실이라곤 뭐가 남아있을까?
괴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고,
그저 복에 겨운 한때의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봉준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이 나라가 바로 그런 수많은 마더들의 나라라는 것을.
괴물도 한 둘 일 때야 이상하지만 허구헌날 괴물들만 출몰하는 곳에선,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테디, 너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치료받을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좀 살아봐야 했다.
그랬더라면 “괴물로 오래 사느니 순수하게 죽을래” 따위의 헛소리는 애저녁에 치워버리고 똘망똘망 괴물로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가 죽었을 거다.


테디, 너 그 딴 마음가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일년도 못버틸거야 …


서해에서 또 수많은 젊음이 스러졌는데
온갖 ‘라면’ 을 팔고 주접을 떨어대며
진실을 눈물, 아니 콧물로 덮으려는 누군가의 면상에서
괴물로 살기의 한 경지에 이른 초고수 괴물의 악취를 느끼며

영진공 짱가

“예언자”, 생존에서 성장으로 나아가는 범죄 느와르

프랑스에서 온 <예언자>라는 제목의 이 영화. 뭔가 신비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것만 같았습니다. 와 너무 정신없는 영화면 어쩌지. 아니면 사회성이 매우 강한 영화 같기도 하고요. 허남웅 기자가 프랑스 감옥 영화의 계보를 잇는 걸작이라는 요지의 리뷰를 썼는데, 여기에서 저는 ‘감옥’과 ‘걸작’ 두 개의 단어만 참고 했습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 역시 영화를 직접 보고 감상문을 다 쓰기 전에는 관련 글의 본문을 안읽습니다)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수상, 황금종려상 후보, 세자르에서는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 주요 9개 부문을 휩쓸었고 바다 건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으니 만듦새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증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그리하여 저는 이 영화를 ‘감옥에서 어떻게 예언자 활동을 한다는 걸까’ 라는 질문을 안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이 질문을 영화 시작 1시간이 조금 안된 시점에 버렸습니다.

감옥 영화인 것은 맞습니다만 제 생각엔 보다 범주를 넓혀서 범죄물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말리(타하 라힘)은 알제리계 고아 출신에 꼬맹이 시절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다가 19세의 나이에 경찰관 폭행죄로 6년형을 받고 드디어 ‘어른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감옥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기 출소까지 6년 간의 감옥 생활을 다룬 작품이긴 합니다만 가석방 제도 덕분에 영화의 줄거리는 바깥 세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말리끄에게 감옥은 새로운 탄생과 성장의 베이스캠프와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역시 영화의 제목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가이드가 되기 보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언자>라는 제목 때문에 초현실적인 전개를 상상하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 사회성이 강한 드라마를 연상했습니다만, 실제 영화의 내용은 매우 사실적인 톤으로 다뤄진 범죄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범죄 드라마도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겠지요. 제가 본 바로 <예언자>는 <스카 페이스>(1983), 나아가 <대부>(1972)와도 – 둘 다 알 파치노 주연 영화로군요 –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최근에 본 프랑스 영화들 중에서 헐리웃, 나아가 세계 대중영화의 흐름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독자적인 화법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작품은 매우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유럽 영화계가 모두들 쌍수를 들고 환호해준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아랍계와 코르시카계가 뒤섞인 프랑스 감옥에서 인종적인 문제가 다뤄지지 않을 수가 없긴 하지만 그런 정치, 사회적인 이슈는 <예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프랑스 내 이민자들에 의한 범죄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참 잘 만들어진 범죄 드라마 한 편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주인공 말리크가 ‘예언’을 하는 부분 역시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말리크의 예언은 그저 남들 보다 예민한 성격 탓에 죽은 이의 혼령을 자신의 수호 천사로 삼아 지내고 아주 가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지몽을 꾸는 정도입니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예언의 능력이 있어서 초현실적인 상황 전개를 이끌어낸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의 말리끄는 흑인 짝패에게 신발이나 뺏기는 조무래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원치 않은 감옥 내 살인을 강요받게 되고 그 대가로 코르시카계 마피아의 꼬붕이 됩니다. 그렇게 감옥 내에서의 생존과 적응 문제를 해결한 말리끄는 출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곱상한 얼굴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보였던 말리끄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범죄적 본능 – 다른 말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몸 담게 된 범죄 세계에서의 생존 본능을 발휘합니다. 그 덕분에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추스리기 힘겨웠던 험악한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놓고 당당히 감옥 문을 걸어나오기까지 합니다.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갑자기 밝은 톤의 영어 노래가 나오는 바람에 영화 전반의 톤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 본 한국영화 <의형제>의 엔딩도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해피엔딩이었는데 <예언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역시 이런 식으로 상영관 밖으로 나가는 관객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드리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서 그런 걸까요. <예언자>의 엔딩은 그놈의 배경음악만 걷어낼 수 있다면 정말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습니다.

말리끄를 연기한 타하 라힘은 흡사 젊은 시절의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에 톰 크루즈의 미소를 얹어놓은 듯한 외모입니다. 분장으로 추레함을 입혀놓긴 했지만 그래도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젊은 대장군의 면모를 보이는 영화 속 캐릭터는 마치 20대 초반의 나이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팀의 주장으로 뛰고 있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 둘은 인상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이 타하 라힘의 말리끄가 까까머리 시절부터 시작해서 거물이 되어 감옥을 나오기까지를 정신없이 지켜보게 만드는 영화가 <예언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훌륭한 캐스팅과 연기력 덕분에 타하 라힘은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들을 들어올렸습니다. 앞으로 보게 될 젊은 재능의 활약이 더욱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 시작 때와는 달리 <예언자>의 엔딩 크리딧이 올라갈 때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끄 오디아르 감독은 1974년 <Bons Baisers… à Lundi>(Kisses Till Monday, 1974)의 각색 작업으로 영화계에 처음 데뷔한 이후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과 편집 일을 하다가 1994년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Regarde Les Hommes Tomber)로 처음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이후 마띠유 카소비츠, 벵상 카셀, 로맹 뒤리스 주연의 영화들을 만들다가 젊은 신인 배우 타하 라힘을 캐스팅한 이번 <예언자>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전체적인 흐름으로는 전형적인 범죄물이요 성장 드라마의 내러티브를 따라가고 있는 영화이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아끼는 편이라 관객에 따라 살짝 불친절하게 느낄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154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역시 약간의 장벽처럼 느껴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리 긴 시간이 흐르는지를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영화의 몰입도는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초중반에 살짝 쳐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외에는 시종일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끝난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예상했던 것 보다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버려서 깜짝 놀랬던 건 <예언자>가 저에게 남겨준 기분 좋은 추억거리가 될 듯 싶네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긴 합니다만 혹시 만들어진다면 <예언자>의 속편도 기대해볼만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25살이 된 말리끄의 출소 이후의 이야기가 될테고 본격적인 하드보일드 범죄 느와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스카페이스>와는 다른 결말을 선택했으니 <대부>와 같은 걸작 대서사의 반열에 도전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어보이긴 합니다.

Co-writer and Director Jacques Audiard (France, 1952 ~)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