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닌”, 마음을 전달하는 진짜 연주 장면들


최근에 본 일본 영화들, 특히 청춘 영화들이 대부분 밴드 음악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그 중 <소라닌>도 주연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이 영화의 내용과 주제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분위기는 매우 다른 작품이지만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스윙걸즈>(2004)에서 우에노 쥬리를 비롯한 주요 출연진들이 작품을 위해 악기 연주를 새로 익혀서 직접 공연하는 장면을 연출해내면서 호평을 받았던 바가 있었는데 – 일본 연예계가 대역을 쓰지 않고 배우가 직접 해내는 것들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해주는 분위기가 있다는군요 – 최근의 일본 청춘 영화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밴드 연주 장면들이 그런 트렌드의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원래 음악을 좀 할 줄 아는 배우라면 덕분에 좋은 출연 기회를 자주 갖게 되는 것이고 그게 아닌 경우에는 배역을 위해 새로 악기 연주를 익혀서 배우로서의 근성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미야자키 아오이는 <소년 메리켄사쿠>(2008)에서 중년의 펑크 밴드와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는 밴드 매니저로 활약(?)하는 모습으로 처음 보았는데 <소라닌>에서는 드디어 기타 연주를 몸소 익혀 직접 동명의 주제곡을 연주하고 노래까지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20대 초반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무대 위에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연주에 몰두하는 미야자키 아오이의 모습이야말로 이 담백한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곡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난 나리오(코라 켄고)의 안타까운 죽음이 무대 위에 선 이들과 객석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만요. 마지막 연습을 위해 드러머 빌리(키리타니 켄타)가 자전거에 메이코(미야자키 아오이)를 태우고 달리던 중에 터뜨리는 오열은 나리오의 죽음에 대해 영화 전체적으로 억제해왔던 슬픈 감정의 표현이 거의 유일하게 직접 드러났던 장면이었죠.

영화를 보는 관점에 따라 내러티브의 구성이 매우 산만하게만 느껴질 여지가 있는 작품입니다.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적잖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야기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하지만 이런 방식의 에피소드의 배열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기 때문에 나름 담백함의 매력이 있는 편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일본 영화라고 해서 이런 연출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 그리 흔한 편은 분명 아니고 오히려 이런 담백한 청춘 영화를 거의 보기 힘든 우리나라 영화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조금 부러운 심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라닌>은 미야자키 아오이의 새 영화로서 가장 많이 입담에 오른 편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상대역 타네다로 출연한 코라 켄고가 가장 인상적, 이라기 보다는 그가 <피쉬 스토리>(2009) 에서 펑크 록밴드의 보컬을 연기한 배우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피쉬 스토리>에서 삭발한 머리에 눈썹마저 밀어버린 채 에너지가 충만하게 노래하던 그 배우가 머리를 기르고 안경을 쓰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피쉬 스토리>에서는 신장도 상당히 큰 편인 듯 했는데 얼굴이 워낙 작으니 착시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외 <크로우즈 제로> 시리즈로 낯이 익은 키리타니 켄타의 드럼 실력도 상당히 인상적이더군요. 극중 밴드의 음악을 ‘팔리지 않는 음악’으로 만들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비트를 잘게 쪼개서 치고 있는 키리타니 켄타의 현란한 드러밍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근조] 故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이진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한국 락음악의 저항정신을 대표하던 그가,
11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내겐 너무 특별한 “레인보우”




영화 ‘레인보우’, 임종진 작가님 직접 촬영해 준 귀한 포스터

11월 18일 개봉하는 신수원 감독의 데뷔작 ‘레인보우’ 의 본 포스터가 공개됐다. 인디스토리의 배급작 전부가 개인적인 감상 이상의 의미를 갖지만, 특히 ‘레인보우’는 유독 애착이 가는 영화다.

영화의 포스터가 포털 사이트들의 영화 정보란에 업데이트 된 걸 확인하자 뿌듯함이 고루 퍼진다. 부끄럽지만, 영화의 티저 포스터 촬영에는 어설프게나마 내가 임했고, 본 포스터는 나의 스승인 임종진 작가님이 참여해 주셨다. 워낙 빠듯한 일정인데도 선생님이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이룰 수 있던 귀한 성과다. 감독님과 마케팅팀장님, 그리고 디자이너와 사진작가의 중간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그 과정에 놓친 점들이 발견돼 아쉽긴 하지만, 여러모로 유의미한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레인보우’ 는 개봉 자체에만도 의미를 두기 충분하다. 낯선 감독의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놀랐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니, 감독님 누구신가요? 아니 뭐하다 이제야 나타나셨나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줄거리는 감독의 자기 고백 성격을 띤다. 고백이라 무겁다 여기면 오산. 주인공은 발랄하고 귀엽고 용감하고 씩씩한 고기주의자인 중년의 여성이다. 고등학교 선생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영화에 올인하는 이 아줌마. 가족의 온갖 핀잔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고배를 마셔가면서도 시나리오 작업을 놓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내비친다.  주인공 지완(박현영)은 꿈을 품고 현실을 사는 수많은 여성을 따뜻하게 대변해 준다.

신인 감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저예산 장편영화가 치열한 배급망을 뚫고 극장에 걸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존재하는 11년차 중견의 배급사 인디스토리 가 역시 레인보우의 극장 개봉에 앞장섰다. 배급 상황이 그리 밝진 않지만, 영화의 힘 덕분인지 CGV 다양성 영화팀에서 진행하는 알찬 프로그램 ‘시네마톡‘에 세 차례의 상영 일정이 일찌감치 잡혀있다. 영화 평론가와 감독 그리고 관객들이 함께 대화하는 즐거운 자리가 최소 세 차례나 열린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홍보 예산이 적어 포스터 촬영에서부터 여러 마케팅적 요소를 축소, 생략해 진행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이지만 ‘좋은 영화더라’는 입소문이 퍼져 빛을 발하길 바라본다. 그저 바라고 응원하고 소문내는 것밖엔.
 


영진공 애플

 

우리는 대성통곡을 해야 한다





서울시 초,중,고에서의 체벌금지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선 학교에선 학생지도 방식에 대해 일시적 혼란이 벌어진 듯하다. 쏟아진 관련기사만 보더라도 하나같이 무너진 교권과 학교 타령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인성과 선생님들의 교권에 이토록 애정어린 관심이 있었는지 몰라도 만약 그들이 진정 우리의 교육현실을 걱정 했다면 오늘 교권의 추락이 아닌 우리 교육의 비극을 이야기 했어야 옳다. 오늘의 이 혼란은 지금까지 학교 시스템을 유지시켜 온 것이 사제지간의 예의나 존경심이 아니라 체벌이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입시를 교육으로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미 학교와 교권은 무너진지 오래였다. 학교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곳으로 전락했고 그 시스템 안에서 학생과 선생님 사이를 메워주는 것은 존경심이 아니라 성적과 입시였다. 그래서 힘들게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 보단 그저 관리하고 통제하고 말 안들으면 후려치는 것이 쉽고 편했다.



체벌이 인성을 길러준다면 삼청교육대에서는 부처와 예수가 나왔다는 말인가

그래서 선생님 역시 피해자다. 학교란 국영수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와 사회 속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의 인성까지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게다가 족벌사학들이 학교를 움켜쥐고 그저 좋은 돈벌이로 생각하는 곳에서 말단의 선생님들에게 진정한 ‘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독립군과 같은 용기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사에서는 체벌이 없어져서 사제지간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사제간의 신뢰가 고작 체벌이라는 공포로 유지되었다면 우린 교육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해야 한다. 정말 우리 어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고개를 들지 못해야 한다.



 



영진공 self_fish



 


 

“엉클 분미”, 미술관 영화를 대하는 솔직한 자세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힘입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식 개봉된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장편.

예전에 <디지털 삼인삼색>(2005)에 포함된 단편 <세계의 욕망>을 통해 그 이름 만큼이나 익숙해지기가 어려운 – 거의 실험영화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드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바, 이번 <엉클 분미>에 관한 지인들의 관심어린 언급들과 드디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단독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저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니다”라며 진작에 마음을 접고 있었데 이 놈의 인연은 나중에 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결국 감상을 하고야 말았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상영관 앞 소파에 앉아 약 20분 정도 단잠을 자두었음에도 상영시간 동안 자주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 쉽게 말해 졸지 않으려고 – 애를 써야했음도 솔직하게 밝혀두고 싶다.

<엉클 분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을 보고 재미가 있다/없다, 잘 만들었다/못 만들었다는 식으로 감상평을 하는 범주의 바깥에서 태어난 영화다.

물론 여전히 <엉클 분미>가 무지하게 졸린다,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왜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식의 직관적인 반응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애초에 이 영화를 선택해서 감상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니 (특히 나와 같은 경우 뻔히 알면서도) 그 선택을 했던 스스로를 탓하는 수 밖에 – 라고 쓰고 누워서 침 뱉는다고 읽습니다 – 없는 일이다.

<엉클 분미>는 내가 알던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둘러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엉클 분미>가 깐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 기존의 영화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엉클 분미>가 고민스러운 것은 그 새로움이 내가 알던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곳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

분미 아저씨의 시골 농장처럼 느릿한 시간 위를 걷는 영화 <엉클 분미>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장 질병을 앓고 있는 농장주 분미(타나팟 사이새마르)를 도시에 사는 처제(제니라 퐁파스)와 조카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이 방문했는데, 저녁 식사시간에 19년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와 비슷한 시기에 집을 나갔다가 숲 속의 유인원이 되어버린 – 검은 털과 붉은 눈의 츄바카 –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분미는 가족들과 함께 밤늦게 숲 속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남겨진 가족들은 분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아마도)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메인이다.

그 중간에 오랜 옛날 못생긴 공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모두 물 속에 남긴 채 메기와 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의 단편, 숲 주변의 젊은이들과 군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컷들, 그리고 분미의 장례식이 끝나고 처제와 딸이 조의금을 정리하던 호텔 방에 스님이 된 조카가 찾아와 야식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는데 이때 유체이탈을 하듯 등장 인물들은 호텔 방 안과 식당 안에 동시에 존재를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분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환생에 관한 나레이션과 함께 소 한 마리가 숲으로 도망왔다가 주인에게 끌려가는 장면도 있다. 마지막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현대적인 팝 음악은 엔딩 크리딧으로 이어지는데 영화 전편에 가득하던 원시적인 적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말로 정리된 <엉클 분미>의 내용은 핵심이 되는 분미의 죽음을 중심으로 의문의 이벤트와 그 맥락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중첩되면서 완전한 이해 불가의 영역으로 날아가버린 느낌이다.

사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영화 관객들과 약속된 문법의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감정을 표현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 그리하여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재미있게 관객들의 흥미를 유도해나가느냐로 판가름되는 작품이 아니라 –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개인의 독자적인 정의와 표현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기준으로 감독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만 문제는 어느 세계가 진실에 좀 더 가까운 것인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가 영화인 것이 아니라 <엉클 분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영화들이 좀 더 영화답다고 받아들여지게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마디로 <엉클 분미>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들의 옆에 나란히 서기 보다 그 영화라는 매체, 또는 예술 형식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나름의 새로운 정의에 따라 창조된 세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를 나름대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들조차 어쩌면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한 시도 속에서 작가의 이력이나 인터뷰 내용들,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장르(설치 미술 등)의 작품들에 관한 정보, 심지어는 완전히 생소한 세계관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지게 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의미를 묻고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나가는 작품이 아무리 위대한 작품으로 추앙을 받는다 한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영화 감상의 목적에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굳이 내키지 않는데 거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서사의 골격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표현 방식 안에서 기존의 것들로부터 조금씩 색다른 재미 찾기를 추구하는 것이 좀 더 유익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감독이나 평론가로부터 별도의 부연 설명을 들어야만 하는 영화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없는 노릇인 것은 사실이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옥희의 영화>(2010) 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는 매우 낯선 구조를 통해 –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는 에피소드의 모음 – 새로운 영화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닮은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엉클 분미>와 달리 <옥희의 영화>를 비교적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봐오면서 감독이 이야기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엉클 분미>는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서사가 가장 명확한 편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서사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마침내 두 작품이 어떤 경계선에서 맞닥뜨린 셈이 아닌가 싶다.

영화관 보다 미술관이나 실험실이 좀 더 어울릴 법한 영화 보다는 내게 익숙한 언어로 말 걸어주는 영화가 훨씬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