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최후의 전쟁”, 브렛 래트너의 엑스맨 망쳐버리기???




엑스맨 시리즈는 스탠 리의 원작만화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될 거라는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 X-men: The Last Stand)에 대한 기대 역시, 저나 제 주변의 영화광들 말고도 데이트 코스로서 영화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도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뭐 결국 2011년에 프리퀄 형식으로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가 개봉되었습니다만.) 

단적으로 말하면, <엑스맨 3>가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였던 건 확실합니다. 전편에서 확립되어온 캐릭터들의 특징이 있기에 굳이 캐릭터들 설명하느라 시간을 분배할 필요도 없죠. 매그니토는 이미 2편에서 탈옥했기에 이제 그 양반이 본격적으로 미쳐돌아 날뛰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3편에서 활약할 만한 뉴 페이스들은 이미 전편에서 조금씩 소개가 끝났습니다. 3편은 그러니까, 신나게 때려부수어주면 되는 겁니다.

부제대로 “최후의 전쟁”을 벌여주는 거죠. “브렛 래트너”는 그래도 상업영화에서 기본은 해주는 사람이고, 이 영화에서도 ‘액션’으로서의 몫은 해냅니다. 전편에서 짭짤하게 돈을 번 폭스가 제작비도 블럭버스터 완결편에 합당한 수준으로 때려넣어준 거 같고요. (감독들은 언제나 부족한 예산이라고 말하겠지만.) 즉, 규모도 꽤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의 전편들이 블럭버스터치고 지나치게 훌륭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확실히 “브렛 래트너”는 “브라이언 싱어”에 비해 뒤져도 한참 뒤집니다. 캐릭터를 발전시키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솜씨도 그렇지만, 화면을 만들고 액션씬을 조합해내는 솜씨 그러합니다.

3편을 보고 집에 와서 1, 2편을 다시 봤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솜씨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2편 도입부에서 쿠르트 가드너의 백악관 습격씬은 블럭버스터가 CG를 쳐바르지 않아도, 굳이 동양무술로 안무하지 않아도 얼마나 우아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지 한눈에 보여줍니다. 이 우아한 액션은 편집 리듬과 사운드의 탁월한 사용에서 기인합니다. 움직임은 충분히 빠르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화면은 낭비컷 하나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며, 사운드의 리듬만으로 박진감을 증폭시킵니다.
 
게다가 전편들에서 “브라이언 싱어”가 구축해놓은 엑스맨 세계는, 3편에서 “브렛 래트너”가 시도한 ‘무조건 대규모로 때려부수기’ 액션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아무리 대규모 액션과 CG가 나온다 해도, 1편은 로그와 울버린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였으며 2편은 한편으로는 울버린의 정체성 찾기이자 또 한편으론 진의 고결한 희생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전체를 떠받치는 전제에는, 재비어와 매그니토의 애증, 서로 적이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는 신뢰가 존재합니다.




재비어(원래 발음은 이그재비어, 더군요.) 교수네 엑스맨 팀과 매그니토의 팀은 돌연변이로서의 생존에 대해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때론 맞서 싸우고 때론 연합전선을 펴면서 각자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울버린은 진을 사랑하지만, 1편에서 드러난 울버린과 로그 사이의 교감, 이를 표현해낸 화면은 가슴을 찡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울버린이 로그를 구출해내는 장면, 악몽에 시달리던 울버린이 로그를 찌르고 로그가 자가치유를 하는 장면은 에로틱하기까지 해요.

2편에서 진의 장면은 어떻습니까. 일단 화면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는 장면입니다만, 그 거대한 물살 앞에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간 진이 블랙버드기와 쏟아지는 물살 사이에 서서 물을 막는 장면은, 거대한 운명의 힘 앞에 홀로 맞서는 ‘완성된 인간’, 혹은 ‘초인’의 존재를 보여주며 눈시울을 적십니다. 매그니토의 그 위엄과 우아함은 어떻고요? 누구보다도 파워풀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소심하고 다정한 성격 때문에 다른 동료들에게 가려지는 스톰은 또 어떻습니까? 게다가 “브라이언 싱어”의 유머감각은 꽤나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재치있죠. 대놓고 들이대는 코미디가 아니라 재치있는 하이코미디의 감각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이 3편에 오면 무너집니다. “우린 엑스맨이야!”를 외치는 울버린의 모습이란 어이없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실 3편에서도 극적인 캐릭터성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 각본에서만.

2편에서 그렇게 희생하고 스러져간 진이, 사실은 재비어의 정신적 억압 때문에 이중인격이 되었고 그 결과 선하고 착하며 자신감없고 희생적인 이면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드적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설정, 그리고 ‘피닉스’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부활한 진이 심지어 매그니토마저 두렵게 만드는 초강대한 존재로 부상한다는 설정, 그리고 돌연변이를 이제 ‘질병’ 취급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소위 ‘치료약’과, 이 약의 원천이 되는 돌연변이 아이의 존재, 바비와 로그와 키티 사이를 흐르는 사랑의 갈등, 등은 이전 시리즈가 지향하는 ‘캐릭터의 이야기’라는 측면에 상당히 부합합니다.

그러나 “브렛 래트너”는 이러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구현하는 데 실패합니다. 남는 건 돈을 쏟아부은 대규모의 액션인데, 사실 이것도,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건 알겠는데 그만큼 효율적으로 규모감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1, 2편을 다시 보면, 오히려 이 3편보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순전히 아이디어와 비주얼의 감각, 그리고 훌륭한 편집의 리듬으로 얼마나 스펙터클하게 화면을 구축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3편의 규모가 1, 2편에 비하면 대단히 초라하게 보이니, 효율성 면에서 완전히 망한 거고, 이것의 원인은 미장센 구축 능력, 즉 화면을 만드는 솜씨에서 기인하는 것이죠.

첫 출발은 상당히 “브라이언 싱어”스러웠습니다. 진을 발탁하던 당시를 보여주고, 진의 불안정한 내면과 무의식의 상태를 암시해주죠. 또한 자막에서 이름 한번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앤젤(거대한 새의 날개를 단, ‘큐어’ 제약회사 사장의 돌연변이 아들 말입니다.)의 어린시절 에피소드를 인상깊게 보여주죠. 그러나 이후 진행은… 이야기의 핵심이 되면서도 겉돌기만 하는 큐어의 근원인 아이는 어떡할 거며, 이 앤젤은 이후 고작 큐어 주사 거부 장면, 재비어 학교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 기로에서 학교를 찾아오는 장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는 장면에서나 나올 뿐입니다.

상당히 뜬금없이 파편화돼 있고 전체 이야기 속에 융화되질 못하고 있죠. 그럴 거면 도대체 왜 오프닝에서 그 아이의 그 처절한 날개자르기 씬을 보여주는 건지? 뭐, 저거니토 같은 캐릭터도 그렇고, 매그니토 팀에 새로 들어오는 캐릭터들(주로 동양계 배우들이 연기한)도 그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며 낭비되고 있습니다. 파이로는 매그니토 편으로 가더니 바보가 됐더군요.



역시나 “브렛 래트너”가 “브라이언 싱어”의 빈 자리를 메꾸기에는 상당히 딸렸습니다. 사실 영화사 입장에서는, 그토록 성공을 거두었으니 거기에 ‘화끈한 액션을 때려부으면 더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릅니다. 사실 엑스맨 시리즈가 성공한 건 그런 무조건적 액션을 절제하고 오히려 캐릭터 강화로 액션의 정당성을 확보해준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가정을 하고 나면, “브라이언 싱어”가 결국 엑스맨 시리즈를 떠난 이유도 추측이 돼요. 그 자리를 “브렛 래트너”가 메꾸게 된 것도요. (물론 공식적인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지만.) 하지만 “브렛 래트너”의 장기는 이런 대규모 액션이 아니라 오밀조밀하게 짜인 귀여운 액션이고, 다소 전형적인 인물들이 품어내는 서민적이고 작은 갈등의 드라마입니다. (『러쉬 아워』 시리즈나 『패밀리 맨』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영화를 아트냐 상업영화냐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걸 무척 싫어하지만 편의를 위해 잠깐 그 틀을 빌리자면, 영화사는 어쩌면 “브라이언 싱어”가 블럭버스터에 안 어울리게 너무 아트지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가 했던 것은, 그간 블럭버스터의 제작자와 감독들이 무시해온, 대규모의 화끈한 액션이 절절하게 필요한 이유를 섬세하게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싱어”는 아주 좋은 상업영화 감독인거죠. 암튼 3편을 보고 나서 새삼, “브라이언 싱어”가 얼마나, 그리고 왜 훌륭한 감독인지 절절히 알게되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

“Two Sides of If”, 비비안 캠벨의 처음이자 유일한 솔로 앨범


[2005, 영국, Sanctuary]

“Def Leppard” 활동과 동시에 너무 밋밋해졌다고 욕(?)을 먹는,
30년 전 과거사인 “Dio”의 기타리스트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기타쟁이,
 “비비안 캠벨(Vivian Patrick Campbell)”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솔로 음반.

사실 나는 이 음반을 처음 접했을 때, 막연히 연주 음반일 것이라 생각했다. 은근히 과거의 활화산 같던 연주를 기대하면서 ……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본작, 『Two Sides Of If』는 블루스-록 음반이었다. 사실 비비언의 블루지한 연주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Jeff Beck”의 연주곡(「Led Boots」)도 꽤 담담하게 커버한 적이 있었던 비비언이고 보면, 블루스 외도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엔 왠지 섭했다. 나 역시도 여전히 청자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들던 Dio시절의 비비언에 대한 기억이 커다란 위치를 가지고 있었나보다. 블루스-록이라고 하지만 내용물은 어쿠스틱과 세미 솔리드 바디에서 나오는 여유로운 울림으로 상징되는 고색창연한 블루스에 가까운 연주가 중심이고, 가끔 곁들이로 매끄러운 솔로가 살짝 얹혀진 모습이다. 맨 처음 이 음반을 듣고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봐, 비비언 왜 그러는거야?”

그런데, 밤샘 작업과 과도한 알콜, 컴까지 고장나서 혼이 쏙 빠진듯했던 한 주를 보내고 무거운 눈꺼풀이 점점 내려오려는 시간에 우연히 집어든 이 음반은 좀 다르게 들린다. 클래식 록 좀 들었다 싶은 양반들도 다 아실 블루스의 명곡들로 그득한 본작에서 갑자기 추억과 평화로움이 느껴진 것이다. 아마 비슷한 시도(헤비메탈 기타리스트의 블루스 원정기)를 했던 “Gary Moore”에게 이 곡들을 연주하라고 한다면 훨씬 헤비하고, 강렬하지만 과도한 감정 이입이 부담스런 연주로 채워버렸을 듯 싶다.

그러나 비비언은 이 음반에서 좀체로 흥분하지 않는다. 짜릿한 맛이 생명인 「The Hunter」조차도 기타 솔로와 블루스 하프(하모니카)를 함께 내세우는 양보의 미덕을 보인다. 전혀 날카로운 솔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들어보니 편안하게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들 – “Eric Clapton”, “Paul Kossoff”, “Peter Green”, “Jeff Beck”, “Keith Richard”, “Rory Gallagher”, 등 – 을 추억하며 연주한 듯한 인상이다.

즉, 수록곡 대부분이 미국 흑인들의 (소위 ‘원단’) 블루스들이긴 하지만, 비비언은 미국 블루스가 아니라 영국 블루스-록 1세대가 그 곡들을 카피하던 1960년대 중, 후반을 떠올리며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연주와 잘 맞지 않음에도 흑인 명인들을 게스트로 모셔왔던 게리 무어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을 까발리고 허심탄회하게 풀어낸 듯한 느낌이다.
 
뭐 이 앨범에도 “Z.Z.Top”의 “Billy Gibbons”를 모셔다가 구색맞추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븐스는 정통파 블루스라기 보다 아메리칸 록커에 가깝기 때문에 연주의 분위기도 서로 아주 잘 맞는 듯 들린다. “Terri Bozzio”의 드럼도 매우 심플하고 따사롭다. 카멜레온 같은 그의 드러밍이야 워낙에 유명하지만, 이번엔 정말 힘을 빼고 함께 즐기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연주자들 역시 그렇고. 단 3일 만에 녹음을 해치운 것이 아주 당연하게 들리는 음악이다. 

굳이 토를 단다면, 음반 후반부로 갈수록 데프 레파드 기타리스트 비비언이 자꾸 보인다는 것인데, 녹음 순서를 알 수 없으니 맘대로 상상해 볼 뿐이다. 아마도 데프의 멜로딕 정교 기타 기운이 녹음 처음엔 자기도 모르게 나오다가 둘 째, 셋 째날에는 옛 기억이 더 새록새록 나서 편하게 쳤을 것이라고 ……

ps. 1
외국 평론가들의 평가나 나의 느낌도 명반 반열에 오를 정도의 음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비언 캠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손 가는대로, 맘 가는대로 한 번 따라가며 찬찬히 편하게 감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특히 아직도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넘버 원으로 그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

ps. 2
생각보다 비비언 캠벨의 목소리가 텁텁하면서 매력있다. 록 보컬과 달리 블루스 보컬은 좀 더 감정을 잘 살리는 거친 맛이 필요하니까. 그러고 보면 슈퍼 밴드의 기타리스트들은 노래도 다들 기본적으로 받쳐주는 거 같다. 워낙 노래 잘하는 보컬과 오랫동안 함께해서 그런가???

영진공 헤비죠

“이터널 선샤인” (2004), 네가 내 곁에 있든 없든 난 괜찮아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껍질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한번이 되었든 수십번이 되었든 어떤 모양이든지간에 사랑을 하고 만들고,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붙박이장처럼 붙여 들여놓고 살기 마련이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일 또한 실수와 오발의 연속이며 유치한 이기심과 알량한 속셈의 퍼레이드다. 누구라고 그 혐의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동화같은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이 원해서 만들어 지는 것. 화면 안의 해피엔딩-영원히 행복했답니다-은 악성 변비환자의 내일 아침 쾌변처럼 이상향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워져있던 얇디 얇던 콩깍지는 햇빛에 직격당한 흡혈귀의 피부처럼 재가 되 버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마련이고 진실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밤잠을 설치고 심박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던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100원짜리 망치게임의 두더지 대가리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순간 꿈같던 사랑은 구질구질한 현실로 돌변하고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전혀 남남이던 사람을 순식간에 내 반쪽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감정의 반대편은 이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조작한다. 유치한 짓거리지만 인간은 그렇게 한다. 내가 쪽팔렸던 부분, 내가 싫었던 부분을 싸그리 들어내 봉투 속에 꼭꼭 눌러담아 폐기 처분하고 좋은 기억, 아름다운 기억들만 붙박이 장속에 예쁘게 정리해 넣어 두고 가장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커다랗게 찍어내 철퍼덕 붙여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인다. 내 사랑은 아름다웠네, 내 사랑은 달콤하고 짜릿했네라고.

니체가 말한 망각의 축복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편리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랬던 것”으로 바뀌고 아예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림으로서,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편의 [추억 : 사랑편]은 완성된다.
사랑은 어쩌면, 뿌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커피처럼 망각으로 덮인 기억 속에서만 달콤한 것일지도.



조엘도 언젠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냈을 거다.
 

기억을 제거하는 따위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녀가 남긴 필름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여 가슴떨리게 만들던 그녀의 모습과 귓가에 속삭이던 설레이는 단어들과 예쁜 기억들만으로 만든 추억편을 완성했을 거다.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처 정리를 못했을 뿐. 그는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지근지근 정리하고 골라내고 지워내서 예쁜 이야기책을 완성했을 거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책을 혼자 몇번이고 반복해 읽다보면 또, 그는 예정된 실패는 까맣게 잊게 되었을 것이고(잊기를 원했으므로) 스스로 골라내 꼭꼭 담아 버린 것들을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사랑했던 시간보다 몇배의 아픔을 견뎌내던 시간들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그는 클레멘타인을 생각나게 하는 또다른 누군가(기억이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다시 클레멘타인이 되지는 않았을거다)에게 더듬거리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비슷한 지점의 그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아마도.”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유치해도 인간은 그렇게 한다.

영진공 거의없다

 

“야생종 (Wild Seed, 1980)”, 4천년된 마초 길들이기 프로젝트


 

저자: 옥타비아 버틀러
역자: 이수영
펴냄: 오멜라스

웅진의 SF전문 임프린트인 오멜라스에서 이번에 출간한 책은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흑인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미국에선 상업적,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로 네뷸러상, 휴고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SF계의 그랜드 데임 grande dame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야생종’은 그녀의 네 권의 도안가Patternist시리즈의 프리퀄 격인 작품이다.

작품은 1690년부터 1840년 간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람의 몸을 옮겨다니며 4천년을 살아온 ‘도로’라는 남자는 노예무역 등을 통해 범상찮은 능력을 가진 이들을 모아 멘델이 완두콩으로 실험하듯 교배를 시키며 더 뛰어난 초능력을 가진 인류를 만들어내려 하는 인물이다.

이런 도로의 레이더에 잡힌 ‘아얀우’는 3백년을 살아온 아프리카의 흑인 여성으로 도로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도로가 원조마초스럽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반면 아얀우는 반항적이고 진취적이며 사람을 치유시키는, 도로와는 정 반대의 인물로 작품 전반에 걸쳐 도로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다.



말이 나온김에 … 이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 재밌다!



이야기의 큰 그림은 마치 엑스맨을 떠올리게 한다. 기이한 능력을 가졌지만 마녀나 정신병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생의 위협을 느껴 능력을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돌연변이들의 억울한 사정은 엑스맨에서나 이 작품에서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엑스맨은 돌연변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휘황찬란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주력하였다면 야생종은 도로와 아얀우라는 두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어떤 기묘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줄 초능력을 이용한 화끈한 액션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청소년기에서 완두콩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멘델.

도로는 멘델이 완두콩에게 저질렀던(?) 것처럼 돌연변이들을 이용, 
선택교배시켜 슈퍼 돌연변이를 만들려고 한다.

도로가 초능력자들을 이용한 선택교배와 유전자 조작의 윤리적 문제, 폭력적인 문명사회와 잔인했던 미국 노예무역의 실상을 이야기할 때 작품의 인문학적 무게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핵심은 두 인물 도로와 아얀우다. 도로를 바꾸기 위해 사랑과 대립을 반복하는 아얀우의 모습을 흥미롭고 긴장감있게 서술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17세기 미국 노예무역의 역사를 초능력자들의 아메리카 이주의 역사로 바꿔버렸다는 역자의 말처럼 노예무역과 초능력자란 소재를 생물학과 인류학을 가미해 훌륭한 SF로 탄생시킨, 올 여름에 만난 독특한 작품이다.

덧붙여 ……


당시 노예무역은 비참하다는 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잔혹했다. 아프리카 내륙에서 흑인들을 잡아 줄줄이 엮어 묶은 채 수 일 혹은 한 달이 넘게 걸어서 배를 정착해 놓은 해안까지 끌고갔다. 이동 중에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이동이 불가능한 이들은 나무에 묶어놓고 갔다. 즉 동물의 밥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노예선에는 흑인들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 배의 갑판아래 겹쳐 뉘였고 흑인들은 그 안에서 똥오줌을 해결해야 했다.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까지 자기의 배설물에서 뒹굴며 기아와 전염병, 폭력에 시달렸고 그래서 많은 수의 흑인들이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후 미국에서 노예무역을 금 지하고 해군을 동원해 노예선을 나포하자 노예선들은 해군에게 발각되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흑인들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을 짐짝 실듯 차곡차곡 쑤셔 넣어 운반한 끔찍했던 노예선.
그들의 많은 수가  배 안에서 비참하고 괴롭게 죽어갔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