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핑 베토벤>, 위대한 영화란 바로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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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루드비히 반 베토벤과 그의 필사가였던 안나 홀츠의 이야기입니다. 청력을 상실한 말년의 베토벤이 9번 합창 교향곡을 완성할 무렵, 연주용 악보를 써주는 유능한 카피스트가 필요했는데 작곡가의 꿈을 가진 젊은 여인 안나 홀츠가 그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나 홀츠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창조된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베토벤과 안나 홀츠 사이에 있었던 일 역시 가공의 에피소드들입니다. 따라서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 베토벤의 삶을 소재로 예술 자체와 그외의 많은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럼에도 <카핑 베토벤>은 전기 영화로서의 요소가 가장 우선입니다. 오늘날 음악의 성인으로까지 불리우는 고독한 천재 음악가의 삶과 내면을 이처럼 선명하게 투영시켜준 영화도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1) 무엇보다 영화의 플롯으로서 작용하는 뛰어난 음악 자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베토벤의 것이니까요. 여기에 예술과 신앙, 여성과 사랑 등에 관한 묵직한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가 <카핑 베토벤>입니다. 물론 많은 주제들을 다루기만 하고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그리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가 없을테지요. <카핑 베토벤>이 놀라운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다양하고 깊이 있는 주제들을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형상화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데다가 그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기 힘든 엄청난 힘과 감동이 있으니, 이런 영화야 말로 완전한 영화, 위대한 영화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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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에서는 신에게 선택된 자의 영광과 고통을 체현해낸 에드 해리스의 연기를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냉정한 인상의 외모로 많은 액션 영화에 등장해왔지만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 <폴락>(2000)과 마이클 커닝햄 원작,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2002)에서의 면모를 기억한다면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가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포스터에서의 사진과 달리 <카핑 베토벤>에서 에드 해리스는 모세와 같은 성인이자 한 인간이었던 베토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2) 에드 해리스의 존재감에 다소 가려지기는 했지만 <트로이>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다이앤 크루거의 미모와 연기도 이 영화 속에는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입니다.3) 물론 다른 어느 배우들도 이상하게 튀거나 쳐지는 일은 없었지만요.

<카핑 베토벤>은 폴란드 출신의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유로파 유로파>(1990)와 <올리비에 올리비에>(1992)를 직접 쓰고 연출했던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93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블루>(1993)의 공동 각본으로 참여해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더군요. 그외 <비밀의 화원>(1993)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프랑스 시인 랭보를 연기했던 <토탈 이클립스>(1995) 또한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주요 연출작입니다. 99년작 <세번째 기적>에서는 에드 해리스가 주연이었으니 <카핑 베토벤>이 이들에게는 두번째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체코의 영화 학교에서는 밀로스 포먼의 학생이었으며 고국에 돌아와서는 크쥐시토프 자누시의 조감독을 지냈던 그녀 자신이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안나 홀츠와 같은 욕망과 고민을 경험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아그네츠카 홀란드에게 <카핑 베토벤>의 연출을 맡긴 일부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술’ 영화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있는 작품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쉬운 일이 없을 겁니다.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예술을 직접 하는 사람과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술 분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핑 베토벤>이 취하고 있는 플롯 상의 전략은 영화 중반에 일찌감치 합창 교향곡의 초연 장면을 통해 관객들을 일단 넉다운시킨 다음, 그와같이 ‘자기 영혼이 담긴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천천히 들려주는 방식입니다.4) 이런 영화의 플롯을 미리 알고 본다고 한들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스스로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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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게리 올드먼 주연 주연의 <불멸의 연인>(1994) 또한 멜러 요소를 가미한 픽션이면서도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작품이죠.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의 유년 시절에서 중년까지의 삶을 다뤄주고 있다면 <카핑 베토벤>은 그의 말년과 죽음의 순간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바꿔 말하면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를 보고 나면 그를 대신했을 만한 다른 배우들의 얼굴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합창 교향곡을 지휘할 때의 모습은 오랜만에 배우의 연기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얻는 경험이 되었고 후반부 직접 바이얼린과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에서는 정말 보통 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찌기 안소니 홉킨스가 <광란의 시간>(1990)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미국 출신 배우 중에 안소니 홉킨스와 견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는 에드 해리스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3)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대접받던 마에스트로 베토벤이 자신의 천사요 뮤즈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거나 괴팍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상대역 캐릭터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아무래도 당장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트로이>에서는 참 마네킹 같은 배우가 다 있구나 했었는데 다이앤 크루거에게 <카핑 베토벤>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완전히 새롭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4) 때문에 합창 교향곡이 초연되는 장면까지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고 완성도 역시 뛰어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말 그걸로 영화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 타임은 이후로 3분의 1이나 5분의 2 정도가 더 진행됩니다.

ps. <카핑 베토벤>은 앞으로 <아마데우스>(1984)와 좋은 비교가 될만한 작품입니다. 베토벤과 모짜르트의 이야기라서 뿐만 아니라 두 음악가처럼 되고자 했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그 결말은 전혀 상반되니까요. 물론 안나 홀츠가 가공 인물인 반면 살리에르는 실존 인물이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카핑 베토벤> 속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온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행복>, “갑자기 심은하가 보고싶다.”

거의 대부분의 삶을 불효자로 사는 나는 가끔씩 남들 앞에서 효자가 되는데

그게 바로 엄마랑 영화를 볼 때다.

‘행복’을 고른 이유는 멜러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도 맞고, 엄마도 좋아할 것 같아서였는데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보면서 한 생각.

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편이다.

여자를 사귀다 헤어진다 해도 연애기간 동안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연애 안한 것보단 낫다”고 생각을 해버린다.

사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오던 둘이 만나서 영원히 함께 가는 게 가능이나 할까?

헤어지면 할 수 없지만 있는 기간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자, 이런 모토로 살면

그리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고 그동안 생각해 왔다.

하지만 황정민이 떠난 뒤의 임수정을 상상해보면-영화에선 이게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간 생각해 온 것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처럼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며

후자의 사람들에게 이별은 지대한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삶을 원래 있던 지표보다 더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그러니까 “있는 동안은 잘해주겠다”는 내 연애론은 지극히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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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생각.

임수정은 참 예뻤다.

그리고 연기도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영화보는 내내 난 임수정이 되서 그녀에게 공감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임은경이 광고 이후 찍은 영화가 다 망하고

지금은 아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면

연기라는 게 후천적 노력만이 아닌, 타고난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번번이 망하다 영화 쪽으로 발길을 끊은 김희선이나 전지현을 보시라.

그러니까 <마지막 승부>에서 심은하 대신 다른 신인 배우가 나왔다고 해서

죄다 심은하처럼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

갑자기 심은하가 보고 싶다.

동거 사실을 폭로한, 그래서 심은하를 우리 곁에서 멀어지게 만든 찌질한 남자놈은

그래서 지금 행복할까?

이런 의문을 던지면서 끝나는 이 감상문은 ‘감상문’ 축에는 들까?

영진공 서민

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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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더 어울립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인생이 바로 저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인데, 그 몸뚱이마저, 건강조차 갖지 못한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갖고 집도 갖고 행복도 갖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거참 그런 행복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간사한 거긴 하지만 또 인간 중엔 행복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남자가 기적적으로 낫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듭니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만, 허진호 감독은 언제나 멜러를 찍으면서도 언제나 그 멜러는 대단히 드라이했습니다. 그의 신파는 눈물을 최대한 말려버리는 신파였습니다. <행복>에선,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냉정한 한두 마디로 유지태를 떠나보냈던 이영애인데, 여기서의 황정민은 술먹고 주정하며 울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임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임수정은 길을 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목놓아 통곡까지 합니다. 어머나. 허진호가, ‘내놓는 감정’에 조금은 덜 쪽팔려할 줄 알게 됐나 봅니다. ‘길을 달리며’ 우는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유치했겠지만, 폐가 40%밖에 안 남은 임수정이 달리는 건 마음이 아픕니다.


섹스도 할 수 있는 엄마 대용으로 여자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지가 마음이 변해 헤어지고 싶은데 ‘나쁜 놈’ 되는 건 또 싫어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는 그런 개찌질이 같은 남자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이별을 통고하면서 나쁜 놈 역할조차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는 무개념 무책임 남자놈들은 연애할 자격이 없는 놈들입니다. 어디 가서 또 어떤 여자들 등쳐먹고 가슴을 찢어놓으려고요. 그래서 세상엔 ‘착한 척’하는 남자들이 제일 재수없고 나쁜 놈들인 겁니다. 남자가 갸르랑거리는 가늘고 높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면서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애교떨며 착한 ‘척’을 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다른 여자한테 작업멘트가 담긴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내거나 다른 여자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당신 뒷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찌질이들은 헤어지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뒷통수를 치기도 한답니다. 이런 찌질이들의 단골멘트가 “너에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면 노력을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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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붙이지 않고 그냥 이미지와 컷으로만 가서 다행인 씬.


하지만요, 이건 워낙 황정민이 그런 놈이어서 그랬던 거고, 사실 그 황정민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닙니다. 저도 별로 고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거기엔 제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 준 것도 있습니다. 모나게도 모질게도 못나게도 찌질하게도 굴어봤고, 지금도 종종 그러합니다. 내가 모질게 굴었던 사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법칙도 아닙니다. 어떤 친구와, 혹은 어떤 선배와, 어떤 후배와, 우리는 날마다 새로이 관계를 갱신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그제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의 흔적(물론 전 연인 내지 배우자의 흔적을 포함해)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도 한뼘쯤 다시 자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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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예감.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납니다. 여자의 예감은 원래 무서운 겁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했을 가능성보다 찌질하고 못났던 과거를 교훈삼은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만 그렇게 사람 가슴 찢어놓고 갔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렇게 다시 폐인이 됐나, 싶습니다. 하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사막을 헤매는데 나 버리고 간 놈이 잘 먹고 잘 살고 연애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약오르고 열받는 일이 되겠지요. 사람 마음이란 왜 이리 좁고 간사하고 못돼먹었을까요? 아, 저만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가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한동안은 신경이 쓰일 겁니다. 이것은 꼭 그에게 마음과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의 나도,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나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허진호 감독이 말하기를, 황정민이 영수 캐릭터를 조금 더 이해갈 만하게, 결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그렇더라고요. 저도 황정민이 무척 미우면서도, 근데 또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짠하기도 하더라고요. 마냥 미워하지만은 못 하겠더라고요. 임수정도 황정민도, 둘 다 나의 모습을,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 안의 두 개의 자아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증오와 혐오를 품는 건, 그가 나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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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처럼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있는 겁니다아~


그냥,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사랑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엔 가끔 이벤트가 필요하지만, 이벤트로만 이루어진 현실은 불안하고 연속성이 없습니다. 임수정과의 시골생활은 임수정에겐 현실이었지만 도시남자 황정민에게 결국 ‘현실’, 내지 ‘새로 선택한 현실’이 아니라 ‘이벤트’였고 ‘가상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에 대한 답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가장 상투적인 이야기가 가장 고질적인 고민과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법입니다.


ps. 그간 자꾸 “못생기지만 정감 가는 아가씨”로만 나오던 공효진이 세련되고 시크한 역으로 우정출연합니다. 최근 <M>에서도 그런 역으로 나오던데, 슬슬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듯. 사실 공효진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옷발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몸매와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영진공 노바리

[가사 검열] , Connie Talbot

올 여름과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자주 왔다.
그때의 비는 마치 아열대 지방의 우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다보면 동남아로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를듯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자주 또 많이 비가 오긴 했는데,
무지개를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비 오고 난 맑은 하늘 어느 한 곳에,
예쁘게 피어나는 무지개,
눅눅하고 텁텁한 기분을 잠깐이라도 가시게 해줄
무지개가 문득 그리워진다.

준비 한 동영상은 아마츄어 오페라 가수 Paul Potts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2007년 영국 TV 쇼 “Britains Got Talent”에서,
Paul Potts와 결승전에서 경쟁한 여섯 살 꼬마 Connie Talbot의 노래이다.
첫 동영상은 결승 실황이고, 두 번째는 예선에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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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모두들 즐감~ ^.^

Somewhere Over The Rainbow
By Connie Talbot (2007)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무지개 건너 저 너머에,
아주 높은 거기에,
나 어릴 적 자장가에서 듣던,
그 곳이 있다네,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하늘이 푸른 그 곳에선,
그 어떤 꿈일지라도,
정말로 이루어진다네,

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언젠가 난 저 별에 빌 거야,
그리고 잠에서 깨면 구름들은 내 발 밑에 있겠지,
세상 모든 걱정은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 곳에서 나는 살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파랑새들이 나르네,
무지개 위에서 새들이 나르네,
그럼 나도, 나도 그렇게 날 거야,
 
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언젠가 난 저 별에 빌 거야,
그리고 잠에서 깨면 구름들은 내 발 밑에 있겠지,
세상 모든 걱정은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 곳에서 나는 살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파랑새들이 나르네,
무지개 위에서 새들이 나르네,
그럼 나도, 나도 그렇게 날 거야,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작고 행복한 저 새들이,
무지개 너머에서 날고 있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영진공 이규훈

, 동시대 관객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명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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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말이 통한다’라고 하는 건 사용하는 언어가 같을 뿐만 아니라 전달하려는 내용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부합된다는 뜻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하다거나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전달하려는 뜻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간에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혀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손짓 발짓을 동원하다보면 왠만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 의사소통에 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서로의 뜻이 맞고 대화에 임하는 태도가 적절하다면 언어가 다를지라도 말이 통할 수가 있는 반면 똑같은 서울말을 쓰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화법을 구사한다면 소통이 전혀 안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말이 잘 통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 능력 보다, 사실은 내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선입니다. 기왕이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고쳐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출발점이고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듣는 내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듣는 사람도 앉았던 자세를 고쳐잡고 조금이라도 정확히 그 뜻을 이해하려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듣는 이의 입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치게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며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중요한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알아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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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의 첫 인상은 지나치게 현란하다는 겁니다. 비주얼 뿐만 아니라 배경음악과 음향효과, 배우들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너무 수다스럽다 못해 스크린 밖으로 침이 튀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게 혹시나 ‘나태한 관객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슬슬 부아가 치밀어오르기까지 합니다. 한 컷 한 컷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M>의 비주얼입니다만 문제는 그것을 쓸 때와 자제할 때를 가리지 않고 너무 많이 쏟아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각 장면은 최고일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세련되지 못한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촌스럽습니다. <M>의 외연에서 촌티가 흐른다는 건 음향 효과와 배경 음악의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훈희 씨의 옛 노래가 촌스럽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주얼과 마찬가지로 그 사용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다는 얘기입니다.

<M>이 관객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외연 뿐만이 아닙니다. 이명세 감독이 <M>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영화과 전공 학생들에게나 들려줄만한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영화 창작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남겼어야 할 얘기입니다. 관객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그 과정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입니다. 결과물만 남겼어야 할 영화의 내용을 고민의 과정으로 대체해버리니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라며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디 워>가 에필로그 부분에서 심형래 감독이 나레이션으로 제작 동기와 과정을 부연 설명한 것 만큼이나 <M>을 통해 이명세 감독이 피력한 영화 예술가의 고민과 그 과정은 저와 같은 관객 입장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뚱맞은 얘기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낯익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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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이 영화 자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천상의 피조물’이라는 점입니다. 후대의 영화 작가들에게는, 특히 촬영과 조명 부분에 일익을 담당하실 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작품이 <M>입니다. 하지만 <M>에서 다루는 내용은 일반 관객들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 아니고 그 화법 또한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형사 Duelist>도 ‘모자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오로지 과하기만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그나마 내러티브라도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M>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 창작론 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을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소리지르고 있으니 광장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광인의 소리에 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경험이 많은 정신분석학자나 의사들이야 그의 말을 받아줄 수 있겠지만 지나가던 행인들에게는 그 많은 말들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명세 감독은 혹시 영화계의 제임스 조이스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겁니까? 하지만 영화는 문학이 아닙니다. M은 모짜르트이기도 하고 모딜리아니이기도 하며, 미스테리인 동시에 메모리이기도 하겠지만, <M>에서 말하고 있는 M이란 결국 ‘명세’의 M일 뿐이니 이거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에 남는 의미있는 작업을 해냈다고 평가 받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완전히 포기한 영화가 이명세 감독의 2007년 영화 <M>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