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검열] “Are You Going With Me?”, Pat Metheny

오늘 준비한 곡은 Pat Metheny Group의 연주곡 “Are You Going With Me?”이다.

재즈 기타리스트로 워낙 유명한 Pat Metheny인지라 별다른 소개는 필요 없을 테고, 감상하실 곡은 Pat Metheny Group의 네 번째 앨범 <Offramp> (1982)에 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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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곡을 들을때마다 생각나는 건,
몇 년 전 미국 서부를 여행할 때 컨버터블 차를 하나 빌려서,
아리조나에서 유타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릴 때 이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갔던 기억이다.

한 없이 곧게 직선으로만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사막의 아지랭이 속을 달릴 때,
말 그대로 몽환적으로 울려퍼지는 이 음악의 기억이란 …

암튼 각설하고 …

첫 동영상은 뮤직 비디오이고 두 번째 동영상은 Anna Maria Jopek과의 공연 실황이다.

그럼 모두들 즐감~ ^.^

Are You Going With Me?
By Pat Metheny Group (1982)


“Music Video”


“Live With Anna Maria Jopek”

동사서독, 醉生夢死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메뉴는
당신의 기억을 깨끗이 비워드리는
醉生夢死입니다.

이별의 아픈 기억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드셨던 천일취(天日醉)보다야 훨씬 고급술입니다.
단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앞으로 영원히 사랑을 잊어 버리실지도 모릅니다.”



무협로맨스를 지향하는 영화 동사서독은 앙리의 와호장룡보다 훨씬 난해하게 사랑에 대해 그린
영화라고 봅니다. 몇 년전 미국에서 와호장룡이 대 히트를 칠 때 앙리의 이 작품이 결국 왕가위
에게 큰 빛을 지고 있지 않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지만 사실 동사서독이 중경삼림보다 못한, 와호장룡보다
조금 못한 이유는 딱 한가지인 듯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다 보면 시대의 상황이나 극장 주들의 상영시간 단축 요청 등 제작사의 흥행의 이유로
이유 없이 잘려나가 반 쪽짜리 영화로 밖에 볼 수 없는 영화들이 생깁니다. 그 중 대표적인 편집
잘못으로 관객들에게 어필이 안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데 이러한 예의 영화들을 찾아보면
4시간의 원작을 자랑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2시간 이상 잘려 개봉되어 줄거리의 혼돈을
가져 왔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나 제작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되어버렸던 블래이드 러너 그리고 상영시간의 문제로 30분 이상 잘렸던 오우삼 최고의 명작
첩혈쌍웅, 시네마천국 등등이 아쉬움을 가져 왔던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다시 꺼내는 동사서독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정통 서정무협 동사서독은
지루한 제작 기간으로 인해 오히려 중간에 취미 삼아 찍었던 중경삼림이 더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바람에 맥빠지게 개봉되었고 상영시간은 달랑 100분 남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원작이 약 4시간
이라고 하는 낭설만 있지 도대체 기승전결을 알 수 없는 형이상학의 영화가 되버린것 같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4시간짜리의 원작을 찾아보지만 중화권에 살고 있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중국말이 맹탕인 나에게는 어불성설에 불과 할 뿐이다. 미국에서 구한 DVD역시 100남짓의 한국
개봉 시 편집과 대동 소이 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보다 동사서독은 난해한
영화이고 어려운 영화로 보입니다. 그 당시 중화권의 최고 배우들 장국영, 장만옥, 양가위,
임청하, 양조휘까지 각기 한 홍콩 영화의 대가들이 모인 종합 백과 사전적인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미지는 쓸쓸하게 우울하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마치 소설이 아닌 한편의 서정시를 보듯이.




동사서독은 왕가위 철학의 집대성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랑 3부작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에서의 화두들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니나 떠나 보낼때에
오히려 지고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꽃이 핀다고 강변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이루어져 결혼으로 끝을 맺고나면 그 후에는 지루한 현실만이 남아버려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었나란 의문 부호에 빠질때가 많습니다.

거기까지 전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던 가슴한구석에 모셔 놓고있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틋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다가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요.

영화에서 동사건 서독이건 그 둘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임청하건, 장만옥이건 모두 다 쓸쓸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후회를 하면서도 그 인연들을 바로 잡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영화는 화두를 던집니다. 이루어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

블레이드러너도 결국 완결편이 나오고, 원스어폰어타임인 아메리카도 10여년전 4시간짜리
완결편을 보았습니다.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볼 기회는 없을까요. 아님 떠나간 사랑은 그저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그냥 일상을 살아도 별 지장은 없어 보이니 그렇게 진달래꽃 한 그루를
키우면 될까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본 동사서독에서는 장국영도, 왕가위도, 장만옥도, 임청하도
그리고 양조위도 우울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칩니다.

인생 뭐 있니,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영진공 클린트

죽다 살아난 김경재氏 第4話

“인공혈관을 달아야겠어.”
회진시간에 들어온 보건소장이 느닷없이 말을 던지자 경재씨는 어리둥절하여 쳐다보았다.


“예? … 인공혈관이요?”
“응, 인공혈관. 핏줄이 꽉 막힌 사람들에게는 정말 훌륭한 대안이지. 그렇지 않겠나?”
“그럴 수도 있겠죠 …”
“역시 동의하는 군.”
“예?”

어리둥절해하는 경재씨와 잠깐 눈을 마주치는 듯 하던 보건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꼭 필요해.”
“저한테요?”
“우리 몸의 혈류 속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키고 혈전을 감소시킬 유일한 대안이지.”
“왜요?”
“이건 단군 이래 가장 큰 사업이 될 거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야.”
“저기, 지금 그게 저한테 왜 필요하다는 건가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된다고들 난린지, 원.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경재씨의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보건소장은 계속 인공혈관이 얼마나 좋은 건지를 반복해서 말할 따름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한참 듣고 있던 경재씨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왜 제 질문에는 대답 않으시고 계속 엉뚱한 말씀만 하시는 거죠?”

“이런, 자네, 태도가 왜 그 모양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내 놓고 반박을 해야지,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면 곤란해.”
“소장님이 먼저 일방적으로 얘기를 하신 거잖아요.”
“자네가 동의했잖아!”
“제가 언제요? … 아까 물어 보시길래 그냥 좋을 수도 있겠다고 그랬던 거지, 제가 그걸 하자고 한 적은 없잖아요.”
“쯧쯧쯧, 사람이 이리 말을 자꾸 바꿔서야, 원 …”

경재씨는 보건소장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인공혈관을 정말로 몸에 달고 다닌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섬뜩하였던 것이다.
“제 혈관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미래를 생각해야지.”
“담배 끊고 술 줄이면 되잖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나? 첨단 현대 공학이 눈 앞에 실현되는 걸 상상해 봐.”
“운동도 열심히 하고요.”
“가만있어도 인공혈관용 모터가 정화작용을 일으켜서 피가 깨끗해진다는 말일세.”
“음식도 가려 먹고요.”
“게다가 그걸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 관람료를 받으면 …”

그 대목에서 경재씨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혈관을 달고 있는 자신을 구경시키고 관람료를 받겠다는 보건소장의 말에 경재씨는 눈을 크게 뜨고 따져 물었다.
“지금 뭐라 하신 거죠? 관람료라뇨. 그럼 지금 저를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겁니까!”

경재씨의 반발에 보건소장은 아차 싶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도 잠깐, 소장은 다시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단호하게 쏘아 붙였다.
“자네는 역시 좌측신체과다발달증이 심각해. 왜 자꾸만 삐딱하게 생각하는 건가. 자네 깨끗한 혈관이 싫은가? 돈 벌기 싫은가?”
“누가 깨끗한 혈관이 싫다고, 돈 벌기 싫다고 그랬나요. 자꾸 말 돌리지 마세요!”
“인공 심장을 생각해 봐. 줄기 세포를 생각해 봐. 모두 다 안 된다고 할 때 신념과 믿음으로 밀어붙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엄청난 부가가치를 누리는 거야. 그들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혜택을 보고 있는데, 지금 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 안 돼!”
“그거랑 이거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들먹이시는 겁니까? 도대체 제 몸 어디가 잘못됐는지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셔야죠. 인공혈관이 왜 필요한지도요. 그리고 인공혈관에 엄청난 돈이 들 텐데 그건 누가 내나요!”
“그러니까 관람료를 받아야 한단 말일세! 먼저 의료업체에서 선시술하면 그 비용을 관람료로 나누어 납부하면 된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조건의 시술에 왜 딴지를 거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고함에 가까운 보건소장의 대꾸에 흠칫 놀란 경재씨의 눈에 그제서야 소장의 뒤에 서있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암부백과 기도삽관장치를 들고 여차하면 달려들 태세로 서있었는데 그 옆에는 심장충격기의 모습도 보였다.

눈을 부릅뜬 채 버티고 서있는 보건소장과 그의 뒤에 도열해있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번갈아 살피던 김경재씨는 서서히 기가 꺾였고, 얼마간을 주저하다가 겨우 한마디 하였다.
“저기, 그래도 제 몸인데 제 의견도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

경재씨의 풀 죽은 모습을 확인한 소장은 만면에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답하였다.
“오, 의견, 좋지. 그래, 그럼 의견을 한 번 말해봐요.”
“저기, 저는 말이죠, 이런 일일수록 최대한 모든 상황을 검토하여 … 될 수 있으면 더 좋은 쪽으로 … 그러니까 굳이 해야 한다면 말이죠 … 안 해도 될 걸 할 필요는 …”
“오, 그래. 알았어, 자네의 의견을 충분히 알아들었네.”
“아, 예, 제 의견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럼. 자, 이제 의견 수렴한 걸 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보건소장은 친히 김경재씨의 어깨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기까지 한 후 바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의견 수렴도 끝났으니 어서 인공혈관 회사에 연락을 하자고. 그리고 기술팀들 회의도 소집하고 시술준비도 미리 해야지. 어서들 움직여.”
“아 참, 그리고 김 간호사님은 우리 경재씨한테 좋은 영양제 하나 놔드리고. 지금 빨리요.”

보건소장의 지시에 따라 미리 준비해 놓은 주사기를 들고 간호사가 경재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경재씨는 간호사의 손에 들려있는 게 영양제 주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사를 맞으면 통증을 잊을 수 있고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있었고, 바늘이 팔뚝에 꽂히는 걸 느끼면서 경재씨는 간호사에게 힘없이 한마디 하였다.

“저기요, 간호사님. 나가실 때 TV 좀 틀어주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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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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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이규훈

<헤어스프레이>, 춤과 노래에 묻혀버린 사회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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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62년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풍자 정신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춤 좋고 노래 좋고, 유머 감각도 훌륭해서 보는 동안 낄낄거리며 잘 봤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별로 할 말이 없다는게 고민입니다. 뮤지컬 영화와 나는 왜 이토록 궁합이 잘 맞지를 않는 건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88년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가 2002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 지금의 <헤어스프레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20년만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시카고>(2002)의 성공 사례와 같이 기존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흥행성이 이미 입증된 좋은 뮤지컬을 보다 많은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복제 생산과 동시 감상 매체’로의 전환 작업의 결과물이란 거죠.

지금은 거의 못가보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연극도 보러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소극장 연극은 지척거리에 있는 배우들의 숨소리와 미세한 표정들까지 놓치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꽤 특별한 자리죠. 지금 한창 자기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내 앞의 저 배우가 진행 중이던 극 중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평범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런 가능의 영역을 옆에 두고 계속 극 중의 상황과 자기 배역 안에 머물기로 약속하면서 형성되는 묘한 긴장 같은 것이 연극 무대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실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면 그런 현장감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뭔가 맥이 빠지고 시시하다는 생각부터 앞서곤 하니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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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물랑 루즈>(2001)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왠만한 멜러 드라마 이상의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 저에게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물론 노래와 춤도 많이 좋아했었죠. 뮤지컬 영화 중에 좋았던 또 다른 예는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2001)이 있습니다. <헤드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먼저 선을 보이고 영화로 다시 찍은 작품이었잖습니까. 하지만 <시카고>나 <드림걸즈>(2006)는 노래 참 잘하네 하는 것 이상의 감흥은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국 뮤지컬이냐 아니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러티브가 충분하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춤과 노래를 강조하느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 내러티브의 많은 뮤지컬 영화를 통해 ‘뮤지컬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거죠. 물론 대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춤 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장르 본래의 특성 자체가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테고요.

<헤어스프레이>는 뮤지컬 영화인 동시에 코미디물입니다. 인종 차별, 외모 지상주의, 상업화된 대중 매체 등 시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문제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백인들은 록앤롤과 빅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며 스윙 댄스를 추고 흑인들은 펑키한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 풍의 춤과 노래로 재능을 뽐냅니다. 젊은 출연진들 뿐만 아니라 엽기적인 특수 분장을 한 존 트라볼타를 비롯해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워큰, 퀸 라이파, 제임스 마스덴(아니, 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던 건가요? 깜짝 놀랐습니다) 등 잘 알려진 배우들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고 멋진 노래와 웃음을 선사합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낙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며 시종일관 잘 달리는 것이지만 그런 만큼 쉽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내러티브의 단점은 명백합니다. 악인은 망하고 새로운 희망의 물결은 승리한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이 어디 뮤지컬 무대처럼 술술 굴러가 주던가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하지만 “그리하여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으로 끝나는 디즈니 명작만화 같은 판타지의 허전한 뒷맛을 저는 <헤어스프레이>에서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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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원작 뮤지컬에서 그대로 가져온 훌륭한 곡들이 참 많은 영화인데요, 특히 여주인공이 ‘사회적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는’ 자기 엄마에게 들려주는 Welcome to 60’s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곡입니다. 헤어 스프레이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인 62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냉전 체제가 자리를 잡고 50년대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이라는 극보수주의의 광풍이 한 차례 몰아닥친 시기 이후의 미국 중산층 사회를 지칭합니다.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인권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기이면 60년대 후반의 히피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이어지는 사회사적 맥락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 <헤어스프레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1994)가 어린 시절을 너무 깡시골에서 보내느라 놓쳤던 부분을 <헤어스프레이>는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상당히 잘 다뤄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프랜시스 로렌스,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혼자가 아니다


워낙에 전설이 돼버린 원작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감독의 입장에선 잘해봤자 본전인 프로젝트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작품이든지 소설이 더 낫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며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징에 의거애 어쩔 수 없이 각색이라도 하면 원작을 훼손했다며 난리 난리가 나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기도 하죠. <대부>처럼 원작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프레스티지>도 일각에선 소설이 낫다고 하고, 또 일각에선 그따위 소설을 이만한 영화로 만든 게 그나마 놀란이 붙어서라고도 하더군요.) 아마 이 영화가 기자시사를 개봉 전날, 그것도 오전 10시에 잡은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겁니다. 기자들이야 워낙 스노브들이 많아서 무조건 원작보다 못하다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니까요. (전 결국 못 갔습니다.) 전 솔직히 이제 <콘스탄틴> 하나 만든 프랜시스 로렌스가 대체 뭘 믿고 저 프로젝트를 냉큼 맡았을까, 좀 어이없어 하기도 했고, 예고편이 마침내 공개됐을 땐 “나의 <나는 전설이다>는 이렇지 않아!”라며 울부짖었습니다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영화 버전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고두고 다시 보거나 하진 않겠지만, 일단 본 2시간만큼은 즐거웠습니다. 물론 원작소설이 2백만 배쯤은 더 훌륭하고 원작소설을 꼭 읽어보시라 강추를 드리겠지만, 그 원작은 사실 그 어떤 감독이 연출을 해도 제대로 옮기기 힘듭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전설이다]의 설정을 빌어 그냥 다른 영화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의 그 엄청난 혁명성과 파괴적 힘은 그것이 문학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 큽니다. 원작소설 그대로 영화화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솜씨가 좋은 감독이 맡는다면, 중반 이후까지도 엄청난 시각적 쾌감과 이야기적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만, 전 이 소설이 위대한 것은 그 엔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자로 맨 마지막에 ‘나는 전설이다’라고 외치는 게 적혀있는 것과, 영화에서 주인공이 ‘나는 전설이다!’라고 외치는 건 다르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좋은 감독이라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징 때문에 소설의 상당 부분을 각색할 수밖에 없는데, 원작 전체 기둥을 살리겠답시고 부분부분 손을 댔다간 오히려 그 안에서 길을 잃기가 쉬워요. 차라리 원작에서 아주 인상적인 어떤 한 요소를 끄집어내어 그걸 극대화하고, 이걸 위해 다른 부분들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게 더 나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큐브릭이 종종 이런 방식을 취했었죠. 그리고 프랜시스 로렌스가 취한 방식도 바로 이것입니다.


로렌스가 끄집어낸 것은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홀로 남은 생존자의 절대 고독’이라는 요소입니다. 이를 좀더 ‘고독한 현대인’의 정서에 맞추기 위해 원작에선 LA였던 공간배경을 뉴욕으로 옮겨왔고요. 아주 뛰어난 감독이라면 따사로운 햇살과 야자수 아래에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남자의 고독이 더 절절하단 것을 잘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죠. LA의 빌딩숲과 뉴욕의 빌딩숲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빌딩숲이 폐허가 돼버린 장관은 뉴욕이 더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에요. 기본적으로 차가운 도시니까요. (워싱턴 같은 도시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아마 <다이 하드 2>의 배경이 워싱턴DC였죠?) 그리고 이 절대고독은, 꽤 으스스하게 잘 표현된 편입니다. 윌 스미스가 혼자 황폐화된 뉴욕 거리를 혼잣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게 영화의 반 이상인 만큼 많은 이들이 지루하다고 아우성을 치던데, 애초에 이 영화가 노린 것 자체가 절대 고독인데 그의 모험이 그렇게까지 지루한가요?


기존의 생존영화라면 기본 의식주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진화의 단계에서 어느 순간 버렸던 동물의 지혜를 다시 찾아 옷과 음식을 해결하는 것에 상당한 러닝타임을 소비하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워낙 풍요로운 대량생산 사회고 워낙 기술이 발달한 현대 도시사회입니다. 만약 삽시간에 인간이 다 사라져버렸다 해도, 통조림 음식만으로도 영양실조에는 걸릴지언정 생존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저런 현대 문명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진리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셈인데, 원래 진리는 상투적인 법이죠. 게다가 프랜시스 로렌스는 꽤 휴머니즘 신봉자 같아요. 다소 뜬금없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밥 말리를 강조하고 인용하는 건(영화에 쓰인 음악의 반 이상이 밥 말리 음악이죠) 솔직히 낯간지럽긴 하지만, 괜히 쿨한 척하지 않고 너무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말을 하기에 오히려 호감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앤과 이선을 만났을 때 ‘갈등’을 공들여 보여주는 것도 좋았어요. <슈렉>을 이용해 아이에게 말을 거는 건 쉬운 방법이었지만 먹히기도 했고요. 그가 그간 얼마나 고독했는가, 그리고 다른 이에게 말을 거는 것에 얼마나 서투르게 됐는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선의 호감을 사는 데에도 성공했지요.


I Am Legend
황폐한 뉴욕 거리에 홀로 살아남아 절대고독에 빠진 인간.


기본적으로 윌 스미스는 워낙 ‘저 곱게 자랐어요’가 얼굴에 써있는 사람이라 이런 캐릭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선지 오히려 처연한 맛이 사는군요. 곱게 살아온 남자가 한순간에 홀로 남은 채 아직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니까요. 물론 로버트 네빌은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자기 생활을 매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체력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매일 다른 생존자를 위한 AM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주변 경계를 삼엄히 하면서 비상대비책도 세워두었고, 백신을 만들기 위해 매일 체계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하고 이를 꼼꼼히 기록해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게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서 극한의 의지력으로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샘이 죽었을 때 그가 그 통제력을 잃는 건 당연하고요. 좀비들이 쳐들어오는 그 실험실에서, 갑자기 모든 사운드를 죽이고 음악을 깔면서 윌 스미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은 신파를 제공합니다. 아마도 그 좀비들을 보며 로버트 네빌이 느낀 건 절망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에 대한 절망감. 저토록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절망감. 그럼에도 백신을 보호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밥 말리를 신봉하는 이 휴머니스트의 선택은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실 제가 로버트 네빌의 저 바닥없는 고독감을 ‘함께’ 느낀 건, 역설적으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혼자 거리를 활보하며 혼잣말을 하던 때가 아니라요. 다른 사람이 아예 없는 절대 고독의 순간에도 인간은 고독하지만, 아무리 옆에 다른 인간이 있고 그가 나를 염려해주더라도, 결국 중대한 나의 결정은 내 몫이고, 이건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네빌이 그 순간 깨달은 것도, 그런 ‘고독’에 대한 진리일 거예요.


전통적인 좀비영화광들, 특히 로메로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은 근래의 ‘너무 빨라진’ 좀비들을 보며 한탄과 분노를 내뱉곤 하지만, 전 좀비들이 빨라진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나도 모르게 드러내게 되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배타성, 그리고 속도에 대한 집착(컴퓨터 부팅 시간도, 햄버거 가게에서 줄 서는 시간도 못 견디는)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래요. 제가 기억하기로 <28일 후>가 시기적으로는 먼저이긴 했지만, 저는 지금의 이 빠른 좀비들의 영화, 그리하여 현대인의 그 무자비한 공격성과 속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며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비유로 좀비들을 등장시키는 일군의 영화들의 대표격이자 선두격으로서 오히려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가 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네, <300>의 그 감독이 만든 그 영화.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전 <300>도 아주 좋아합니다. 지금 제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감독 중 하나가 잭 스나이더거든요.) 현재 미국에서 이토록 좀비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건, 단순히 <새벽의 저주>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걸 벤치마킹하는 의미만은 아닐 겁니다. 한편으로는 조지 로메로를 위시한 수많은 좀비영화들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영화판에서 비로소 활동하게 된 시기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시 대통령 치하 하에서, 지금 마치 ‘도대체 누가 이명박을 뽑은 거야? 다들 미쳤고 나 혼자 제정신인가 봐’ 싶은 그 심리를 미국인들이 깊게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도 좀비영화가 나올 때가 된 거다, 란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는데, 아마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찍고 있다니 기대해 볼 만하겠지요.
 



영진공 노바리

ps1. 소설에 대한 저의 감상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ps2. 극 중 로버트 네빌의 딸 말리로 나온 윌로우 스미스는 성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윌 스미스의 실제 딸입니다.


ps3. 영화 초반 아주 잠깐 나오는 엠마 톰슨은 정말 그걸로 끝이란 말인가요. 아아 엠마 언니… ㅠ.ㅠ


ps4. <버피와 뱀파이어>의 스핀오프인 <앤젤>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엔젤이 동네 심야극장에서 <오메가 맨>을 상영한다고 좋아라 난리치며 영화보러 가는 장면이 기억나는군요. <지상 최후의 사나이>도 <오메가 맨>도 언젠가 꼭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ps5.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한 권이 더 번역됐습니다. [줄어드는 남자]인데, 이 뒤에 스필버그의 출세작이었던 <듀얼>의 원작이 실려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