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실화가 특기할만한 역사적 소재임에도 영화속에서 그 역사적 소재는 단지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래서 역사는 우리네 평범한 보통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철학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한 그 철학적 근거 때문인지, 한두명의 주연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의해-비록 만족스러울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하지만- 영화가 완성되어지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나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화려한 휴가>를 보는 내내 나는 연신 불편한 자리를 고쳐 앉고 지루하고 따분한 나머지 잠시 딴생각에 빠져드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의 생뚱맞은 대사에 어이없음의 실소를 픽픽거리고 마침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시민군과 공수부대의 도청전투씬에 이르러서는 깜박 졸기까지 한 반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유쾌하게 박장대소하다가 불현듯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는가 하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하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가슴속에서 공명하는 감동의 여운을 남김없이 즐겼다.
<화려한 휴가>의 가장 큰 패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 광주를, 비록 제작진은 정반대로 의도하였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어디 먼나라 과거의 가슴아픈 비극쯤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여졌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5.18 광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속이 뻔히 들여다 뵈는 짓거리이긴 하지만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5.18묘역을 방문하고, 사람들은 5.18 광주가 독재에 의해 짓밟힌 민주화의 정신이며 우리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18 광주의 진실은 아직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 희생과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들이 짐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의 가해자들이 그 희생과 고통을 똑같이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에 따르는 진심어린 사죄와 경우에 따라서는 응당 치러야 할 법적, 사회적, 도덕적 처분을 달게 받음으로써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수많은 피해자들의 눈물과 한숨 생까기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듯, 우리는 5.18 광주의 진실을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5.18 광주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5.18 광주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진실에 어떤 시각으로든 접근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의 ‘진실’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5.18 광주의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진실’이 실종된 영화는, 사람의 두피를 도끼로 벗겨내는 게 취미인 절대악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 수 밖에 없는 절대선 백인들 간의 서부 활극처럼, 명백한 선악의 대립구도속에서 액숑과 써수펜수와 총격전이 난무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차라리 액숑영화의 본분을 지켜 살떨리는 써수펜수를 쭈-욱 유지시켰으면 그나마 봐줄만 하련만, 어줍잖은 유머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최루성 신파멜로까지 우걱우걱 낑궈놓았으니 어느새 영화는 황량하고 거친 산 위에 올라 종잡을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감동적이지?”
거금 8천원이 아까와서 무거워진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치켜뜨며 저항했지만, 어느새 깜박 졸고 말았던 나는 퍼뜩 놀라 얼결에 대답한다.
“딸꾹-“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감동적인 건 삶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감독 임순례가 자신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천착했던 것 처럼, 삶이란 피폐하고 남루하며 고역스럽고 불가항력적으로 악순환되는 것이고, 감당키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는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침묵하다가도 바락바락 악도 쓰며 아무래도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수렁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그 삶의 어딘가에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이, 지금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도록 우리를 지탱해 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임순례는 그 ‘진실’을 전작들에서 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고 알기 쉬운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비록 상업성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후퇴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듣자니 경제적으로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비흥행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은 그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신의 색깔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 역시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역전에 동점, 재역전에 다시 동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2차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결국 승부 던지기로 은메달에 머물렀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로 재구성되었기에 스포츠영화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승리만이 감동을 준다는 승리지상주의를 교묘하게 벗어나면서도, 중요한 것은 승부나 그 승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승부에 임하기까지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세라는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고단하고 짜증스러우며 도대체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삶 속에서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