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구태의연한 스토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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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의 전작 <불량공주 모모코>(2004)에서 두드러졌던 초현실적인 비주얼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이르러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작에 비해 컷의 수도 많고 무엇보다 거의 강박적이라 할 만큼 세트 미술과 보정 작업에 엄청나게 공을 들인 인공미로 시종일관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작의 낙관적인 정서를 따르지 않고 다소 무겁고 진지한 쪽으로 흐르는 편입니다. 중간중간에 화려한 뮤지컬 장면이 삽입되고 터무니 없이 코믹한 요소들마저 들어가긴 하지만 영화 전체는 마츠코가 어떻게 53세의 ‘혐오스런’ 폐인의 모습으로 죽게 되었느냐는 의문을 풀어나가는 미스테리극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형식이 미스테리극일 뿐, 내용은 유년기로부터 시작되는 마츠코와 그녀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간에 감방 장면이 있어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친절한 금자씨>(2005)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송자(松子)씨, 마츠코는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인생을 꼬이게 만든 그 놈과의 재회에서 삶의 희망을 다시 찾더군요. 야쿠자와의 사랑이라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래도 외톨이가 되는 것 보다는 낫다”는, 그냥 말로만 들어서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 말을 되뇌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던 관객은 같은 말을 하는 마츠코의 표정에서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카타니 미키의 신들린 연기 때문이기도 하고 철 지난 호스티스 신파극을 완벽하게 재구성한 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의 연출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런 영화 짜증만 난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될 여지도 있습니다만, 다른 건 다 접어두고 나카타니 미키의 연기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영화는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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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이형택과 조코비치

1. 하나

이형택의 경기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다.

더 중요한 투어대회를 위해 국가대항전에 나서지 않는 선수도 수두룩한데

서른셋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한국 테니스의 희망으로 뛰어주는 그에게

어찌 감동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벽 3시 40분까지 사투를 벌였던 제2단식은 물론이고

콜슈라이버에게 아깝게 진 3단식을 보면서  

난 이형택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랭킹이 더 높은 콜슈라이버를 맞아

발집에 커다란 물집이 잡힌 채로 강력한 스트로크 대결을 벌이던 그 투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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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

투어 대회에서 늘 이형택을 두번째로 나이 많은 선수로 만드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비요르크만이다.

1972년생이니 우리나이로 서른일곱인데

우리나라의 이형택이 그런 것처럼 비요르크만은 토마스 요한슨과 더불어

테니스강국의 이미지가 퇴색한 스웨덴의 희망으로 군림하고 있다.

2대 2로 팽팽하게 맞선 이스라엘과의 월드그룹 다섯번째 게임에서

비요르크만은 3대 1의 역전승을 엮어내며 스웨덴을 8강에 올린다.

늘 이형택이 은퇴할까 조마조마한 나로서는

그보다 네살이 더 많음에도 여전히 코트를 지키는 비요르크만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형택도 3년은 더 뛸 수 있을거야”라며.

3. 셋

작년 US오픈에서 인구 천만인 세르비아는 자국 선수를 세명이나 남녀 4강에 올렸다.

그리고 올해 호주오픈에선 급기야 우승자를 배출했으니 그 이름 바로 조코비치다.

페더러한테는 안될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결승에 진출한 조코비치는

돌풍을 일으켰던 총가를 3대 1로 꺾고 스물둘의 나이에 우승컵을 안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보여줬던 체력적인 문제는 우려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만일 총가가 어영부영 4세트를 따냈더라면 조코비치가 5세트를 견딜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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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이스컵 월드그룹 1회전에서 첫 두 단식을 러시아에 내준 세르비아는

할 수 없이 복식에 조코비치를 출전시키며

조코비치는 승리를 따내 기대에 부응한다.

2대 1로 따라간 4번째 경기, 조코비치의 상대는 전 세계 4위 다비덴코였다.

이형택을 압도했던 무시무시한 스트로크의 소유자인 다비덴코는

하지만 호주오픈 우승으로 물이 올라있는 조코비치를 당하지 못했다.

1, 2세트를 거푸 따내며 승리를 목전에 둔 조코비치는

3세트부터 체력적 문제를 드러내며 (부상이라지만…잘 모르겠다) 한세트를 빼앗기고

4세트엔 결국 기권함으로써 2회전 진출권을 러시아에 넘겨준다.

나달과 페더러는 최근 10번의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나누어가졌고,

그 둘의 독식을 깬 것이 바로 조코비치인데

이런저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조코비치가 과연 얼마나 롱런할 수 있을지,

나 역시 회의적이다.


영진공 서민

[가사 검열] Across The Universe 中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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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의 노래들로 가득한 이 영화.
2007년 개봉인 이 영화는 국내에서 최근에야 적은 개봉관에 잠깐 걸렸다가 내려갔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던 생각은 …
“왜 우리는 서로가 살고 싶어하는 대로 놔두려 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남을 위해서, 고향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라고 떠들어대는 이들 …
결국은 자기를 위해 그러면서 말이다.

오늘의 가사 검열은 이 영화에 나오는 <Let It Be>를 골라보았다.

Let It Be.  참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네 할 일을 열심히 하라”,
“다 놓아두고 훌훌 털어버리라”,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따르라”,
“세월이 흘러 가면 다 좋아지리라”,
“거부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다 맞는 해석이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를 부여하면 된다.

그럼 영화 속 장면을 통해 이 곡을 감상해보자.


<Across The Universe>에서 …



음악만 …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모 님은 다가오셨지,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셨네, “Let It Be.”
내가 어둠 속에 갇혔을 때,
그 분은 내 앞에 나타나셨지,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셨네, “Let It Be.”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이,
체념 속에 살아갈 때,
그 곳에 대답이 있으리니, Let It Be.
원치않는 이별이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터이니,
그 곳에 대답이 있으리라,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래요,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속삭여 주실 거예요,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There will be no sorrow

구름이 잔뜩 낀 밤일지라도,
그 곳에 여전히 나를 비춰주는 빛 한 줄기가 있어요,
그 빛은 밤이 걷힐 때까지 비춰주어요, Let It Be.
그리고 음악 소리에 깨어날 때,
성모 님은 내게 오시죠,
더 이상 슬픔은 없을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There will be and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그래요, 대답이 있을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속삭여 주실 거예요, Let It Be.


영진공 이규훈

<좋지 아니한가>, 뭐 그리 썩 좋지만도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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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말아톤>(2004)으로 첫 타석 홈런을 때린 정윤철 감독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다시 한번 “지금 아니면 못해볼 영화였기 때문”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2001) 의 제작 동기를 밝힌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그러나 박찬욱 감독이 정말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 어느 영화감독이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을 생각을 미리 하면서 영화를 찍겠습니까. 영화를 만들 때에는 누구나 최소한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세번째 장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를 개봉한 정윤철 감독도 <좋지 아니한가>를 만들 때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했다”더군요. 데뷔작을 통해 얻은 성공으로 영화 감독으로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천했었고 그리하여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말 하고 싶은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작년 3월에 개봉했던 이 영화를 2007년의 베스트로 꼽으신 분들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는 좋으면 “열라 좋다”는 식으로 해야지 “좋지 아니한가?” 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제목을 잡으면 안된다고 어떤 분이 농담삼아 얘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좋지 아니한가>라는 제목은 “이 얼마나 좋으냐”라는 뜻의 질문형 제목인 거죠. <좋지 아니한가>는 제목 만큼이나 두리뭉실하는 간접 화법으로 초지일관하는 작품입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는 전혀 좋지 아니한 가족 구성원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가족이 있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이 아니냐고 묻는 영화입니다. 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비밀에 관한 은유처럼 진실은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숨겨져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수 관객들에겐 이런 은유나 간접 화법이 영 어색했던 모양입니다.

전반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잘된 연출이긴 합니다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천호진)와 하은(정유미) 간의 원조교제 스캔들을 그대로 뭉개버린 채 끝내고 있다는 점과 다른 영화평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를 다른 이들과의 패싸움으로 퉁 쳐서 봉합하고 있는 모양새가 그리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매우 기발한 상징과 예상을 깨는 유머 감각이 전편에 깔려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후련하지 않은 관계로 전부 그 빛을 잃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가 않으니 캐스팅과 그에 따른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 구성에서도 허술했다는 인상 마저 남기고 마는 작품이 <좋지 아니한가>입니다. 한국영화 중에 이런 영화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아니한가, 맞는 말입니다만 사실 이런 정도의 한국영화는 80, 90년대에도 적지 아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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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와 그 분

굶주림과 속박에 지칠대로 지친 프랑스 농민들은 마침내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계기로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봉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때의 유명한 일화로 전해져오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시 프랑스 군주이던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였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이야긴즉슨 그녀가 어느 날 한 신하에게 왜 백성들의 표정에 생기가 없냐고 묻자 그 신하가, “저들에게 먹을 빵이 없기 때문이옵니다.”라고 답하였는데,
마리 앙투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Let them eat cake).”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허나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루소가 <고백론>에서 어느 귀족부인이 그와 같이 말하였다고 적은 것이 이야기의 발단인데, 이 책은 1766년에 집필이 시작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에 태어나 1770년에야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사: 뭐가 거짓이고 뭐가 진실이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37603)

하지만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왕실과 철부지 왕비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하여 , 마리 앙투아네트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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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그런데 말이다.
지난 3일 그 분이 국무회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다.


* 밀가루 값이 상승하니 … “쌀라면을 만들든지 하는 것도 해법이 될 것”

* “묵은 쌀의 연간 보관료만 6000억원이 드는데 가격을 낮춰서 공급하는 식으로 기회비용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지 않느냐”

(경향신문 기사: “‘이명박 문답법’에 국무위원들 ‘아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050242335&code=910100), (경향신문 기사: “밀가루 비싸면 쌀 소비 장려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051821215&code=910203)

신문에서 전하니 정말로 그렇게 얘기하시긴 하셨나본데, 실용을 그리도 강조하시는 분이 왜 그러셨을까?
현실과 너무도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니 말이다.




* 현재 시장에서 라면 값이 700원 가량인데, 쌀라면은 2000원 정도 한다.

* 2001년 전후 90톤 가량의 묵은 쌀 재고량은 이후 대폭 감소하여 작년말 기준으로 34만톤이다.  6,000억원의 보관료도 2001년 전후의 이야기이다.


(이데일리 기사: 묵은 쌀 보관료만 6000억원? ‘옛날 얘긴데..’   http://www.edaily.co.kr/news/econo/newsRead.asp?sub_cd=DA14&newsid=02233686586340696&clkcode=00202&DirCode=0020206&curtype=read)

실용만이 살 길이라고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외치고 계시는 그 분이,
이리도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