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 홍길동>이 이토록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

<쾌도 홍길동>은 ‘퓨전 사극’이라는 좋은 핑계(!)를 내세워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이야기를 펼치지만, 그 안에 지금까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도 해내지 못했던 진취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들의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은 물론 세대 내 ‘연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연대는 곧 깨질 수밖에 없지만.) <쾌도 홍길동>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뭉클한 지점들, 가장 빛이 나는 장면들은 홍길동이 아버지 홍판서 대감과, 창휘가 당대 왕이자 자신의 이복형인 광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장면들이며, 10회가 넘도록서로 적으로 대립하거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하며 할 수 없이 협업했던 길동과 창휘가 15회에 이르러 서로를 인정하며 우정을 맺는 장면들이다. (이 미니시리즈는 총 24부작으로 기획되었다.) 16회에 이르면 길동과 창휘는 서로 친구와 동지로서 협동하며, 16회의 마지막 장면은 길동에게 향해진 화살을 창휘가 대신 몸으로 막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홍판서와 광휘는 각각 실질적 / 명목적으로 최고의 권력자들인 만큼, 길동과 창휘가 저항하는 대상은 단지 사적인 아버지와 형이 아니라 당대 강고하기 짝이 없는 제도이며 기성질서이다. 그런데 창휘의 저항은 기성질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있는 제도에서 부패한 사람을 대신하려는 것이며, 형에 대한 그 저항은 결국 선왕, 즉 아버지의 질서를 복권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즉, 퇴행이며 반동이란 얘기다. 창휘가 지금의 노선을 고집하는 한, 아마도 앞으로 길동의 발목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는 존재는 아버지도 왕도 아닌 창휘가 될 것이다. 그 자신 아직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길동은 창휘와 일시적으로 접점은 이룰지언정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다. 민중이 새로운 왕의 후보 창휘에겐 별 관심이 없지만 부자들의 재물을 털어 나눠주는 홍길동은 초인적인 영웅으로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창휘와 길동, 이녹 모두 너무나 안쓰러우면서도 예쁜 만큼, 길동은 결국 새로운 왕이라는 것 역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근본적 혁명을 시도하고, 창휘 역시 기존 질서 자체에까지 의문을 가지고 결국 적통대군의 자리마저 버리는 것이 내가 바라는 진행방향이다. 아마도 길동인 내 바람대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창휘의 경우 내 바람은 말그대로 ‘바람’일 뿐,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길동과 창휘가 이녹을 둘러싼 삼각관계의 연적 관계이기도 한 만큼,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은 결국 앞으로 전진하는 영웅과 퇴행하고 꺾이는 악당의 대립모드로 몰고가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는 다만 연적인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잠시나마 연대를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지극히 짧은 유통기한의 기쁨을 느낄 뿐이다.


쾌도 홍길동



원작과는 다른 ‘자유인’ 홍길동(강지환)의 모습. 사진출처는 KBS 공식 홈페이지.


<쾌도 홍길동>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원작이 16세기 초를 배경으로 했던 것과 달리, 드라마는 왕인 광휘와 그의 자리를 넘보는 적통대군 창휘는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모델로 했고 이는 이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광휘에게선 연산군과 영조의 그림자도 살짝 함께 엿보인다. 청나라가 이미 조선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대국으로 자리잡았고 저자거리에도 청나라 물품을 파는 가게가 입점해있다는 설정을 보면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했던 광해군 치세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 그러니까 18세기 경의 조선을 상당히 참조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라면 색안경과 불꽃놀이용 폭죽, 천축국에서 유래한 코브라와 배꼽춤(!), 색목인의 언어(영어), 골프의 변형(혹은 개인놀이화된 격구) 등이 한양땅에 등장한다 해도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거침없이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가 어느 순간 그러한 것들을 ‘그 시대에 정말로 그랬으려니’ 하는 이상한 착시의 설득력을 제공한다.


퓨전 사극이라는 측면, 그리고 혁명을 다루고 있고 서로 입장이 다른 주요 인물들의 3각관계가 극 중심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쾌도 홍길동>은 여러 모로 <다모>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2003년에 방영되었던 <다모>가 드라마계와 시청자에게 남긴 영향은 매우 커서, 이제 우리는 사극이라 했을 때 무조건 엄숙하고 딱딱한 형식이나,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소도구와 의상에서 벗어나서 조선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2, 3백년 전 역사가 ‘판타지’의 공간으로 등장할 수 있고, 이런 식의 사극 판타지는 결국 지금의 상황과 현실을 조금 에둘러 풍자하는 ‘우화’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쾌도 홍길동>은 이 점을 십분 살려 대부업 광고나 FTA, 새 정부의 영어정책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장면들을 집어넣고, 이를 단순한 일회성 코믹 장면이 아니라 드라마의 스토리와 에피소드에 긴밀하게 엮어넣는 시도를 했다. 대부업 풍자는 9회부터 12회까지 심청 이야기의 변주와 함께 이루어졌으며(심청의 이야기가 좀더 현실성 있게 묘사된다), 16회에 삽입된 청나라 사신과의 아편 전쟁은 FTA를 비롯해 미국에 종속된 한국의 정치/외교관계와 새 정부의 영어정책을 비꼰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이 <다모>와 명확하게 선을 긋는 지점은, 바로 <다모>가 실패했던 바로 그 한계지점들에서다.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소영웅주의에 입각해 혁명을 논했던 <다모>는 결국 인간을, 그리고 사랑을 도구적 입장에서 다뤘고, 사람의 진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착취하고 결국 퇴행해버림으로써 방영 초기의 팬 일부에게 극렬한 배신감을 안겨줬다. <쾌도 홍길동>에서는 여성이, 사랑이 오히려 혁명을 깨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은 대의를 위해 작은 이들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 이들의 목숨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을 배워나가는 쪽으로 성장해 간다. ‘알 게 뭐야’란 말을 입에 달고살던 홍길동은 사람 하나하나의 작은 마음과 상처까지 배려할 줄 아는 인간, 나아가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이 돼가고 있고, 소위 ‘대의’를 위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노릇을 해왔던 창휘는 사람들의 아픈 비명소리가 양심을 아프게 함을 깨닫고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이녹이란 존재다. 그리고 길동과 창휘는 이녹을 사랑하면 사랑하게 될수록 선택의 기로에서 옳은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나아가 <쾌도 홍길동>은 단순히 멋진 영웅 한 명의 활약이 아니라, 그가 민중과 소통하고 그 자신이 바로 민중 중 한 사람임을 선언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홍길동이 민중을 깨우치고 민중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의적’ 홍길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권력자에겐 칼과 창이 있고, 민중에겐 ‘말’이 있다. 태초에 말이 있어 그 말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구절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힘의 신비와 비밀을 드러내는 구절이기도 하다. 초인으로 각색되는 홍길동, 저자거리에서 약장수에 의해 얘기되는 홍길동. 영웅이 신격화되고 다시 탈신격화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이 창작의 힘을 메타적으로 고찰하고 활용하며 여기에 유쾌한 농담을 곁들인다. 웃음 와중에도 다시 한번 돌아볼 가치가 충분한 방식. <쾌도 홍길동>은 바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이것을 전면에 배치하는 드라마다. 그것도 창작자 개인이 아닌, ‘집단창작’의 힘과 저력을 탐구하는 드라마다. 사실 내게 이 드라마가 이토록 특별한 것도 바로 이 이유가 가장 크다.


앞으로 8회분이 남은 만큼 <다모>가 그랬듯 기대를 배반하며 퇴행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껏 보여준 이야기만으로도 <쾌도 홍길동>은 기존 그 어떤 드라마도 해내지 못했던 영역의 이야기를 특별한 방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달달한 싸구려 당의정으로 말초적 재미를 만족시켜 주면서도 그 안에 올바르고 건강한 이야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이 능력, 이거야말로 내가 그간 드라마나 영화에 그토록 기대해왔던 것들이다. 진심으로 홍자매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다.


영진공 노바리

ps1. 강지환. 이 사람이 보여주는 연기, 참 재미있다. 기술적으로 아직 세련된 수준은 아닌데, 저돌적이다 싶을 정도로 캐릭터에 곧장 달려들어가 몰입하는 듯한 느낌이고, 거기에 대사나 작은 제스추어에 의외로 세심하게 디테일을 추가해서 캐릭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더라. 무엇보다도 진지모드와 코믹모드 사이를 별 어색함없이 순식간에 오가는 능력에 꽤 놀랐다. 본격 상업영화 쪽으로 진출하게 되면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도 되고. 그 특이한 목소리는 처음엔 영 적응 안 돼서 기겁을 하며 TV를 끄곤 했는데, 요즘은 ‘익숙’을 넘어서 심지어 ‘감미롭게’ 들린다. 언제나 굵은 저음 목소리를 좋아해왔던 나한테는 의외의 현상.

ps2. 너무 동안인 근석군에겐 이제껏 관심이 없었는데, 세상에 여기에서는 뭘 입고 뭘 두르든 “순정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그것도 김진 만화) 미모를 자랑한다. 근데 역시 너무 동안인지라 성유리와 같이 연기하는 씬에서 (이모-조카처럼 보여서) 도통 감정이입이 안 된다는. 제일 좋아하는 모습은 눈만 빠꼼히 내놓은 채 검은 두건을 썼을 때.

ps3. 이문식, 최수지, 임현식 같은 배우들이 1회 한정 카메오 연기를 펼친다. 아놔 이문식의 당수 캐릭터는 딱 보는 순간 무지 기대했었는데, 그 회에서 바로 칼맞고 죽어버리데… 최수지는, 정말 최수지 맞나 싶어 깜딱 놀랐다는. 광휘 역의 조희봉, 허노인 역의 정규수, 해명스님 역의 정은표의 연기는 후덜덜 수준, 홍판서 역의 길용우와 노객주 역의 최란은 TV 베테랑다운 연기. 좌상대감 안석환은 요즘 완전히 이쪽 캐릭터로 굳히기 하시는 듯. 그러나 역시 그 포스는 어쩔 수 없다는. 그러고보니 어마어마한 양반들이 조연으로 떡 버티고 있는 드라마로세.
 

그대, 괴벨스를 꿈꾸는가


*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1897.10.29~1945.5.1]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 국회의원, 당 선전부장으로 새 선전수단 구사, 교묘한 선동정치로,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국민계발선전장관 등으로 문화면을 통제, 국민을 전쟁에 동원했다. (인용: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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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서 긴장을 해소하고 유쾌함을 주는 오락 영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야말로 일급의 민족 교육 수단인 만큼, 모든 영화는 면밀히 구성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대중매체는 물론이고 문화와 예술분야를 철저히 선전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여 국민들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세뇌했던 괴벨스.  현대 광고 기법 중 다수가 그의 기법으로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그는 대중심리 조작과 이미지 메이킹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갑자기 왜 그의 얘기를 꺼내냐하면,
며칠 전 이명박 정부의 문화, 체육, 관광분야를 담당하는 장관이 이전 정권에서 임명 또는 공모로 선출된 임기직 기관장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임기에 관계없이 물러나라고 호통을 쳤다는 뉴스를 접하여서이다.

뉴스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30여개의 산하기관장들 중 나름의 철학과 이념, 자기 스타일과 개성을 가진 분들이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 아니겠냐”

(매일경제 기사: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100006&cm=MB%C1%A4%BA%CE+%C0%CE%BC%B1&year=2008&no=140306&selFlag=sc&relatedcode=000020205&wonNo=&sID=301)

이해한다.  정권이 바뀌었으면 그 노선을 공감하고 찬동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인사는 대개 “코드인사”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기에, 지금의 집권세력은 왜 예전의 “철학과 이념”을 “뒤집”어 한 입으로 두 말 하냐고 따질 생각도 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나라의 문화, 예술, 체육, 관광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어찌하여 “정치색”을 들먹인단 말인가.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우리 사회 공동체의 정서를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신체를 건강하게 가꾸는데 전념해야 할 부서의 장이 공공연히 대중 앞에서 어느 한 쪽의 정치 성향과 가치를 들이대며 다른 쪽의 정치 성향을 문제삼는 게 말이 되는가.

어쩌잔 말인가.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어원장, 국립중앙극장장, 국립중앙도서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한국문화번역원 원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등등을 해당 분야 창작 및 관리 활동 경력이나 능력이 아닌, 동일한 정치색과 철학과 이념을 가진 인물이라는 기준에 맞춰 일시에 바꿔 넣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문화, 체육, 관광을 “일방주의”와 “편가르기”의 선봉에 세우겠다는 것인가.

다른 장관이나 각료들이라면 모르겠으되, 적어도 문화와 복지 그리고 국방을 담당하는 장관은 정치색과 이념을 공공연히 내세워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의 모든 철학과 이념이 어우려져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곳이 문화계이기 때문이고, 정치색과 이념에 따라 차별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이 복지정책이기 때문이다.  국방은 더 말할 것도 없겠고.

대통령을 CEO(Chief Executive Officer)로 묘사하고자 하는 현 정권이라면, 장관은 CO(Chief Officer)로 보아야 한다.  비록 대통령이 지명하였다고 해도 대통령의 “가신”이나 “머슴”이 아니라 엄연히 절대주주인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행인이다.  적어도 그만큼의 자존심은 지키면서 맡은바 분야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영진공 이규훈

ps. 현 국회의원이자 집권당의 원내대표도 “노무현 정권에서 그 정권의 이념과 철학에 맞춰 임명된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됐으므로 자신의 이념과 맞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사의를 표하고 재신임을 묻는 게 옳은 일”이라 말하였다 한다.
세상 어느 선진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국회의원이 이처럼 공공연하게 대통령을 지원하는데 발벗고 나서는 경우가 있는가.  지난 정권을 통해 그토록 지키고자했던 의회의 독립성과 권력을 이제는 내다버리려는 것인가.  그럴 거면 차라리 입각을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 …

[영진공 캠페인] 공공장소에서는 이어폰을 …

아무리 요즘 세상이,
법과 질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이득만 좇는 분들이,
속속 높은 분이 되는 환타지 월드라지만,
우리끼리라도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 삽시다.

공공장소에서 노트북 등으로 영화를 보실 때는,
이어폰을 사용해 주시는 센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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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국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구태의연한 스토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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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의 전작 <불량공주 모모코>(2004)에서 두드러졌던 초현실적인 비주얼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이르러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작에 비해 컷의 수도 많고 무엇보다 거의 강박적이라 할 만큼 세트 미술과 보정 작업에 엄청나게 공을 들인 인공미로 시종일관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작의 낙관적인 정서를 따르지 않고 다소 무겁고 진지한 쪽으로 흐르는 편입니다. 중간중간에 화려한 뮤지컬 장면이 삽입되고 터무니 없이 코믹한 요소들마저 들어가긴 하지만 영화 전체는 마츠코가 어떻게 53세의 ‘혐오스런’ 폐인의 모습으로 죽게 되었느냐는 의문을 풀어나가는 미스테리극입니다. 물론 전체적인 형식이 미스테리극일 뿐, 내용은 유년기로부터 시작되는 마츠코와 그녀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간에 감방 장면이 있어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친절한 금자씨>(2005)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송자(松子)씨, 마츠코는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인생을 꼬이게 만든 그 놈과의 재회에서 삶의 희망을 다시 찾더군요. 야쿠자와의 사랑이라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래도 외톨이가 되는 것 보다는 낫다”는, 그냥 말로만 들어서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 말을 되뇌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던 관객은 같은 말을 하는 마츠코의 표정에서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카타니 미키의 신들린 연기 때문이기도 하고 철 지난 호스티스 신파극을 완벽하게 재구성한 나카지마 테츠야 감독의 연출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런 영화 짜증만 난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될 여지도 있습니다만, 다른 건 다 접어두고 나카타니 미키의 연기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영화는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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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이형택과 조코비치

1. 하나

이형택의 경기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다.

더 중요한 투어대회를 위해 국가대항전에 나서지 않는 선수도 수두룩한데

서른셋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한국 테니스의 희망으로 뛰어주는 그에게

어찌 감동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벽 3시 40분까지 사투를 벌였던 제2단식은 물론이고

콜슈라이버에게 아깝게 진 3단식을 보면서  

난 이형택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랭킹이 더 높은 콜슈라이버를 맞아

발집에 커다란 물집이 잡힌 채로 강력한 스트로크 대결을 벌이던 그 투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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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

투어 대회에서 늘 이형택을 두번째로 나이 많은 선수로 만드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비요르크만이다.

1972년생이니 우리나이로 서른일곱인데

우리나라의 이형택이 그런 것처럼 비요르크만은 토마스 요한슨과 더불어

테니스강국의 이미지가 퇴색한 스웨덴의 희망으로 군림하고 있다.

2대 2로 팽팽하게 맞선 이스라엘과의 월드그룹 다섯번째 게임에서

비요르크만은 3대 1의 역전승을 엮어내며 스웨덴을 8강에 올린다.

늘 이형택이 은퇴할까 조마조마한 나로서는

그보다 네살이 더 많음에도 여전히 코트를 지키는 비요르크만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형택도 3년은 더 뛸 수 있을거야”라며.

3. 셋

작년 US오픈에서 인구 천만인 세르비아는 자국 선수를 세명이나 남녀 4강에 올렸다.

그리고 올해 호주오픈에선 급기야 우승자를 배출했으니 그 이름 바로 조코비치다.

페더러한테는 안될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결승에 진출한 조코비치는

돌풍을 일으켰던 총가를 3대 1로 꺾고 스물둘의 나이에 우승컵을 안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보여줬던 체력적인 문제는 우려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만일 총가가 어영부영 4세트를 따냈더라면 조코비치가 5세트를 견딜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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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이스컵 월드그룹 1회전에서 첫 두 단식을 러시아에 내준 세르비아는

할 수 없이 복식에 조코비치를 출전시키며

조코비치는 승리를 따내 기대에 부응한다.

2대 1로 따라간 4번째 경기, 조코비치의 상대는 전 세계 4위 다비덴코였다.

이형택을 압도했던 무시무시한 스트로크의 소유자인 다비덴코는

하지만 호주오픈 우승으로 물이 올라있는 조코비치를 당하지 못했다.

1, 2세트를 거푸 따내며 승리를 목전에 둔 조코비치는

3세트부터 체력적 문제를 드러내며 (부상이라지만…잘 모르겠다) 한세트를 빼앗기고

4세트엔 결국 기권함으로써 2회전 진출권을 러시아에 넘겨준다.

나달과 페더러는 최근 10번의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나누어가졌고,

그 둘의 독식을 깬 것이 바로 조코비치인데

이런저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조코비치가 과연 얼마나 롱런할 수 있을지,

나 역시 회의적이다.


영진공 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