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리브스, <클로버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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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9.11의 여파는 계속된다.
85분간의 이 현기증나는 영화는 기존의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과 전제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 <클로버필드>는 가정용 캠코더와 핸드폰 동영상, UCC 등이 일반화된 시대의 새로운 영화 형식을 시도한다. 승진해 외국지사로 떠나는 로버트 홉킨스(마이클 스탈-데이빗)의 송별파티에서 친구들의 인사말을 담기 위해 가정용 카메라를 든 허드(T.J. 밀러)의 1인칭 카메라 시점으로 영화가 끝까지 가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가정용 캠코더로 기록한 영상(이라는 설정)인 만큼 해상도는 형편없고, 카메라도 무지하게 흔들리며, 앵글과 편집도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 모두는 의도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답답해지는 것은 단순히 해상도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라 부르던 영상들은 카메라 뒤의 마치 신적인 존재 – 감독 – 가 전제돼 있는 만큼, 인물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제3자의 전지적 관점에서 보여주는 이른바 ‘마스터 숏’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인물 중 한 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설정돼 있)는 만큼,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이 알고 있는 것 외에 전지적 신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전달해 주는 다른 정보들을 가질 수 없다. 즉, 관객은 등장인물들이 아는 것만큼만 알며,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정보는 철저하게 통제돼 있고,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조망해볼 수 없다. 모든 것은 ‘너무 가까이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는 감독과 촬영감독의 존재가 의도적으로 지워진다, 혹은 저 커튼 뒤로 더욱 깊숙이 숨겨진다. (이 영화에 엄연히 감독이 존재함에도 제작자인 J.J. 에이브럼스의 이름만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순히 그가 인기 TV 시리즈의 제작자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극중 인물들은 맨해튼을 공격해 온 저 괴물의 존재가 과연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떻게 맨해튼 지상 위에 오게 된 건지, 과연 인간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해오는 것 외에 어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지, 물리적인 타격만 위험한 건지 접촉만으로도 모종의 감염이 일어나는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괴물의 형체 자체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며, 그 괴물의 종류도 몇 가지나 있는지 알지 못 한다. 맨해튼만 당한 건지 미국 전체가 공격받고 있는지, 아니면 전세계가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위험이 닥쳐왔고, 그것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뿐이다.


85분 내내 허드의 카메라를 통해 움직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정체모를 괴물이 엄청난 힘으로 맨해튼을 쓸고 있다는 것, 정부군이 이에 대응하고 있으나 속수무책이라는 점 정도다. 일단 놀라 길로 뛰쳐나왔던 허드와 로버트, 제이슨, 제이슨의 여자친구 루카스, 그리고 파티 손님이자 허드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인 말레나 등은 괴물의 공격을 피해 무작정 도망을 치지만 먼저 제이슨이 당하고, 지하도로 들어갔다가 터널 안에 있던 또다른 괴물에 의해 말레나까지 잃는다. 오랜 친구인 베스와 얼마 전 썸씽이 있었던 로버트는 베스와 통화를 시도했다가 그녀가 집에서 아파트 벽에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일행들과 함께 구하러 가는데, 물론 이 길이 순탄할 리 없으며, 관객들이 허드의 카메라를 통해 보게 되는 것 역시 그저 파괴의 현장, 그리고 계속되는 공격과 위험, 이에 대한 공포일 뿐이다.


이러한 형식의 시도는 관객들에게 단순히 공포와 경악을 좀 더 현실감있게,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100여 년의 영화 역사 동안 축적되고 구조화된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형식, 그리고 관습과 문법은 이 영화 앞에서 박살이 난다. 가정용 캠코더와 핸드폰 동영상, 그리고 요즘의 디지털 카메라들이 손쉽게 제공하는 동영상 기능을 통해 모두가 감독이 될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 의하면 그 사실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감독의 존재와 촬영감독의 자리는 지워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 뒤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그 자체가 신이 되는 것이다. (밧데리가 끊기지 않는 한, 심지어 주인공이 죽는다 해도 카메라 저 혼자 어떤 영상들을 기록해 버릴 수 있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기 위한 씬들과 마스터 숏은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관객들은 기존의 영화들에서 감독이 제공하던 유사-신의 위치에서, 주인공들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른바 ‘1인칭 시점을 공유하는 유령’의 위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한계는 곧 관객의 한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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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없다, 그저 도망만 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닌 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 1인칭 카메라 시점을 고수하는 것은 국내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된 바 있는 오래 전 영화 <찰리 모픽>에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전쟁터를 배경으로 현장 기록을 전문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스트(로 설정된 인물)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졌던 것과 달리, <클로버필드>는 평화로운 맨해튼의 일상을 배경으로 하며 여기에서 카메라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정된 인물)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칭하는 것 역시 그리 정확한 장르 구분이 될 수 없으며, ‘페이크 리얼 동영상’ 정도의 말 역시 좀더 가깝긴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묘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역시 리얼 동영상이 아니라 사전에 짠 ‘영화’라는 점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가장 눈에 띄는 증거는 등장하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미녀들이라는 것. 게다가 일견 어리숙해 보이는 컷과 앵글 역시 고도로 계산된 티가 난다. 심지어 카메라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 각도 자체는 안정돼 있으며, 카메를 들고 뛰고 있다고 설정된 씬에서도 카메라의 위치가 매우 의심스러운(즉 따로 촬영감독이 들고 찍고 있다고 여겨지는 제2의 카메라의) 앵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과연 이러한 형식 파괴의 실험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짜를 진짜처럼 느끼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만 유효한 리얼한 공포와 경악 외에 우리가 진정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얻으려 했던 그 무수한 지향과 꿈과 대리경험이라는 것, 그리고 미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이 영화가 제공한 그러한 실제감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하며 풍성한 것이지 않는가? 나아가, 영화라는 건 아무리 관객이 그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동의했다 해도 그 본질 자체가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에 꼼짝없이 관객들을 붙잡아 놓고 눈앞에 창작자들이 의도한 영상을 일방적으로 틀어대는 매우 폭력적인 매체가 아닌가? (당신은 옆좌석 관객의 불편함과 뒷자리 무수한 관객들에 대한 방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영화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와 뻔뻔함을 가지고 있는가?) <클로버필드>는 영화라는 매체의 이 폭력적인 본질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극한까지 밀고 나감과 동시에, 이 본질을 이용해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폭력의 가능성을 눈앞에 제시한다. 이 폭력에 기꺼이 환호하며 피학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사전에 충분히 정보를 습득하고 ‘각오’를 하고 간다 해도, 이 영화가 제공하는 도를 지나친 고통의 폭력은 새삼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폭력성과 이에 대한 회의를 배가시킬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인다. 이 영화의 형식 파괴의 실험은 분명 누군가에겐 한 번 해볼 만한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고, 과연 애초에 이 영화가 의도한 목적은 모두 이룬 것처럼 보이며, 그 점에서 내 개인적인 불쾌감과 상관없이 영화 자체에 대한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이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의 확장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괴물이 휩쓸고 지나간 건 맨해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시신경과 머릿속, 나아가 영화에 대한 애정까지도. <클로버필드> 때문에 생긴 두통이 심지어 다음 날 다른 영화 시사회를 본 뒤까지 계속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