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 오브 에이지”, 왜 매운탕에 설탕을 풀었을까?

 



 


 


 


 


 







요건 영화 포스터
이거슨 뮤지컬 포스터



 


 


 


최근 개봉한 영화 “락 오브 에이지 (Rock of Ages)”,


이 영화는 2006년 처음 무대에 올랐던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 한 것이다. 그런데 제목과 주요 등장인물이 같기는 해도 극의 전개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도 너~어~무! 다르다.


 


이 뮤지컬은 지금도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영국의 웨스트엔드에서 계속 성황리에 공연 중인데, 극 중 주요인물인 드류와 셰리, 그리고 스테이시의 행로는 영화와는 매우 다르게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꽤나 비중있는 패트리샤라는 인물도 원작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뮤지컬과 영화에서 같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Journey의 명곡 “Don’t Stop Believin'”을 통해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도 영화와 뮤지컬이 매우 다른 데다가, 이미 미드 “글리(Glee)”에서 줄창 단물을 빼먹은지라 좀 김이 샌다고나 할까.


 


글리에서 어떻게 단물을 빼먹은 거냐고? …… 이렇게~!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X Factor에서의 초대 공연 영상

 



 


 


그건 그렇다치고, 이 영화 왜 이렇게 됐을까? 떡하니 Rock of Ages라고 마빡에 타이틀 붙여놓고서는 어찌하여 Sugar Pop의 낯간지러운 해피엔딩으로 갈무리 하여야 했을까? 마치 얼큰한 매운탕에 설탕을 대박으로 타 넣은 듯한 입맛을 선사하는 건 왜일까?


 


미국의 드라마 제작자 중에 아론 소킨이라는 사람은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져있는 미드 “웨스트윙 (West Wing)”의 제작자이다. 그가 이전에 발표하였다가 대박으로 망한 드라마 – 허나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꽤나 호평을 받았던 –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2006~2007) 에는 아론 소킨이 생각하는, 그리고 미국 민주당 사람들의 생각이라 믿어지는 미국의 자존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러니까 미국은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가 아니고, 가족을 걱정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 않는. 뭐 그런 나라라는 신념이 듬뿍 배어나오는 작품이다.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휴 그랜트가 영국 수상으로서 자신의 나라가 미국 보다 훨씬 자긍심이 있는 나라라고 이야기하며 이런 대사를 친다.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너리, 해리포터가 있고, 데이빗 베컴의 오른발도 있죠.”


 


미국은 유럽에 비해 대문호가 많은 것도 아니며 (물론 마크 트웨인이나 존 스타인벡, 펄 S. 벅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문호가 있지만), 전쟁 일으키기 좋아했지만 대놓고 전쟁 영웅을 시대적 자부심으로 가질 정도로 어리석진 않죠.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축구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가 최고지만, 미국인에게 최고는 ‘미식축구’. 그런데 미국 외에 이거 인기 있는 나라 거의 없다고 봐야 할듯.


 


 



Studio 60 … 의 에피소드 중에서

 


 


암튼 Studio 60 … 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유추해보자면 그러니까 … 미국의 정체성은 ‘자유’라는 것. 그래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 언론의 자유를 위해 매카시즘에 대항했던 블랙리스트 이야기도 다루었고,


 


그런데 극 중에서 이 스튜디오는 SNL로 유명한 뉴욕이 아니라 LA의 선셋 스트립에 있다. 그건 그러니까 헐리웃과 그걸 대표하는 정체성은 Sunset Strip에 있다라는, 그래서 이를 이용한 세트를 꾸며 가장 자기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Modern Comedy Show’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한다 (위의 동영상이 그 선언이다).


 


헐리웃의 현대 TV, 영화 산업이야 말로 미국이 자랑하는 자부심일 테니 ……


 


영화 Rock of Ages의 배경 또한 헐리웃의 Sunset Strip 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곡이 80년대 글램 메탈(Glam Metal)넘버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뮤지컬의 배경과 제작의도가 80년대의 헐리우드라는 키워드로 집약되니 말이다.


 


여기서 잠깐, Glam Metal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헤어 메탈, 팝 메탈, 헐리우드 메탈 등. 왜 헤어 메탈이냐고? 아래를 보시라.


 


 


 


배배꼬인 언니들 (Twisted Sister)



 


 


 


60년대에 유행했던 글램록(대표적인 노래들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많이 나온다.)을 메탈의 영역으로 확장한 게 글램메탈인데,


 


사실 … 반짝이는, 화려한, 말랑말랑한, 섹시한 … 등의 단어가 메탈과 어울릴리가 없잖아! 게다가 노래는 온통 사랑타령! … 그런데 이들은 그런 음악을 했고, 그런 노래를 불렀다. 어디에서? 헐리우드 선셋 스트립에서!


 


그러다보니 아까도 말했듯, 매운탕에 설탕 푼, 홍어찜에 꿀 바른 그런 맛이 나는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들은 대부분 당시 어메리칸 락 밴드의 곡으로, Night Ranger, David Lee Roth, Poison, Foreigner, Pat Benatar, Extreme, Warrant, Bon Jovi, Twisted Sister, Quarterflash, REO Speedwagon, Starship, Journey, Guns N’ Roses 등 6~80년대를 호령한 락, 메탈, 헤비메탈 밴드 들의 주옥같은 곡들로 구성되어 즐거움을 선사하긴 하는데 …


 


이게 당장 먹을 땐 달아서 그럴 듯 한데 자꾸 씹고 뜯고 먹고 즐길 수록 그 맛이 그 맛이 아닌 거다 …


 


그럼 왜 이런 맛이 나게 되었을까?


 


 


 



80년대 미국의 TV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시트콤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80년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터, 레이건, 부시로 이어지는 이 시기에 미국은 어쨌거나 ‘호황’이었다. 월남전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표면적이나마 냉전이 종식되었으며 돈이 마구 뿌려졌다.


 


80년대 초반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택한 레이건의 재정팽창정책, 레이거노믹스는 한 마디로 지금의 MB 경제정책의 벤치마킹모델이다. 부자와 기업에게 돈을 몰아주고, 세금은 줄이고, 소비는 장려하고 … 말하자면, 부자와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거다 …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미국은 사상최악의 재정적자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그 유명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정치신인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어쨌든 80년대의 미국은 석유와 군수산업에 쏟아부어지는 국민의 세금과 찍어서 뿌려대는 화폐의 힘으로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그리고 그런 돈 소나기를 음악 산업이 놓칠리 없었다.


 


 


 




CF나 스포츠 중계 시에 자주 나오는 노래, Van Halen의 “Jump”.


그걸 이렇게 불러버리면 우리보고 어쩌라고 … -.-;;; 




 


이제 고뇌하는 뮤지션은 돈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이 사회의 그늘을 읊조리고 고통을 토로하는 음악은 상품이 될 수 없었다. 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큰 음량과 강한 드럼 비트, 가슴을 후비는 기타 리프, 절규하는 보컬리스트는 좋은 상품이었지만, 거기에 골치아픈 사회현상을 실어 올리는 건 영업상 매우 손해보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러니 락도 팔 수 있어야 노래를 부르게 해 주었다. 팔릴려면 고객의 입맛에 맞춰서 노래를 만들어야 했고 … 그래서 락이라는 의상을 입고 락 비트의 연주를 하면서 팝에서나 들었던 사랑노래가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즐기는 음악, 놀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댄스, 디스코, 보이밴드가 나오게 되었고 금세 음악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산업적 측면을 제껴 놓고 생각해보아도,


선셋 스트립, 사실 이 동네에서 록의 정신을 말하긴 좀 그렇다. 거기에 서면 절로 ”와~ 1년 내내 이렇게 날씨 좋고, 쭉빵 아가씨들이 오락가락하는 여기서 메탈 밴드들이 노래한단 말이지” 소리가 나온다.


 


시애틀이나 뉴욕, 심지어 오스틴에 가도 이렇게 조건 좋은 록클럽은 없다. 본능에 충실한 게 록이라면 … 본능에 충실해도 언니들이 줄 서는 동네와 본능에 충실하게 음악해도 음습한 반응의 동네에서 만들어진 음악은 뭔가 달라도 많이 달라지는 거다.


 





해질녘의 선셋 스트립의 클럽들에서 내려다본 L.A. 시내는 확실히 있어보인다. 괴롭거나 허탈하거나 음울하지 않는 그냥 멋진 동네가 거기 있는 거다. 그러니 거기에서 절규하고 저항하는 락이 나올 턱이 있나.


 


 




 



내게 설탕을 쏟아부어줘!

 


락은 하고 싶고, 세상은 흥청거리고, 돈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고 … 그러니 삐딱선을 탄 거고 매운탕에 설탕을 확 부어버린 거다. 왜? 그렇게해도 맛있게들 먹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원작 뮤지컬에서는 나름 현실적인 마무리를 보여준다. 거기에서는, 화려함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살아온 젊은 시절, 그때가 지나고 돌아보니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Don’t Stop Believin’ 하자는 거다.


 


그런데 영화는 그러면 안 팔릴 것 같았나보다.


화려함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살다보면 … 더 화려해진다 ~ 베이비!


이렇게 끝나버리니 말이다.


 


암튼 그렇게 락이라는 매운탕에 해피라는 설탕을 대박으로 붓고 또 부어서 설탕죽이 되어도 어쨌든 이건 시작이 락이니까 락이라고 불러도 됨, 님하. 라는 맛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라는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매운탕엔 설탕말고 고추기름을 넣자! OK?!  


 


 


 


 


영진공 헤비한 규훈이의 함장질

 


 


 


 


 


 


 


 


 


 


 


 


 


 


 


 


 


 


 


 


 


 


 


 


 


 


 


 


 


 


 


 


 


 


 

“허쉬 타임즈(하쉬 타임)”,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허쉬 타임즈(Harsh Times)]는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극장주라고 해도 이 영화를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할 것
같지는 않군요.(수정: 2009년 9월 17일에 국내에서 “하쉬 타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개봉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크리스찬 베일이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 국내 관객들에게 어필할 거리가 단 한가지도 없는 영화입니다. 스케일이 작고, 우리로서는 별로 공감할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도 않으며, 결정적으로 국내 관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찝찝씁쓸한 여운이
남는’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걸작도 아니지요.  국내에선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고 인기가 없는 크리스찬 베일의
위치를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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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밝고 낙천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하지요. 잘생겼지만 커튼을 친 듯 어두운 얼굴
속에 광기와 해결되지 않은 욕망을 날선 칼처럼 숨기고 있는 베일은 국내 관객들에게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닐 듯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매력을 느낄만한 여유가 없나봅니다. 뭐, 어쨌건 …

[허쉬타임즈]에서도 베일은 그의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같은 인간이지요. 영화 속에선 그가 6년간 이라크전에 참전했다는 것 외엔 아무런 정보를 주고 있진 않지만, 우리는 그가
대~에충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람보]에서부터 꾸준히 반복되어 온 상처입은 참전군인, 근육질
몸에 군번줄을 걸고 다니지만 머릿속은 끔찍한 기억과 정신착란적인 파편으로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면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그는 더 젊고, 더욱 강력한 자기파괴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왜 이자식이
진작에 미쳐버려서 검은식 줄무늬옷을 입지 않고 멀쩡하게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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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멀쩡해 보임? … 훼이크라능 …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런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이 단지 전쟁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그와 붙어 다니는 친구인 ‘알론조’와 그들이 만나고 다니는 패거리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전쟁을 겪어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그와 별로 차이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막 나가는 친구들입니다. 도찐개찐이에요. 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LA의 험한
바닥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당연히 어둠의 자식들과 어울렸기 때문이겠지요. 즉, 원래 깡패같이 자란 애를 데려다가 전쟁통에
살인기술을 알려주고 실전경험까지 선물한 결과물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을 거치면서 원래 있던 폭력성향에서 한끗발
더 나아갈 수 있는 베짱과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 정도면 만랩의 괴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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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촤식 … 만랩인데?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주인공이 직업을 갖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는 경찰이 되려다가 실패하고 정부기관에서 일자리를 갖게
되는데, 거기서 일할 사람을 뽑는 인간들은 주인공의 과거 행적과 그가 마약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이라크에서 포로들을
잔인하게 으깨서 과실음료로 만들어 버린 전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모조리 알면서 그를 채용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너같은 놈이
필요해, 이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죠.

그 말인즉슨, 그런 선발과정을 통해 선발된 인간들이 미국 정부 어딘가에서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뒤통수가 선뜻해지는군요. 콜롬비아에서 마약을 팔다 걸리면 저런 인간들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단 말이죠.. 콜롬비아로는 여행도 가지 말아야겠어요.

영화는 이런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이틀동안 LA와 멕시코를
누비면서 겪는 일들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틀동안 술과 마약을 잔뜩 처먹고 구라를 치고, 깡패들을 삥뜯고,
삥뜯어낸 무기를 팔아먹고, 결국은 시한폭탄처럼 폭발해 버릴때까지 F**k 이라는 단어들을 무려 260번 내뱉으며 거리를
누빕니다. (제가 세 본것은 물론 아닙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목적따윈 없습니다. 이 친구들의 모험은 다분히 현실도피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냥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러고 다녀요?”라고 물어보면 “그럼 노냐, ㅆㅅ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군요.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적어도 10번 이상은 보아 왔습니다. 이런 류의 주인공들은 사실 “나 이 영화 끝나기 전에 죽을꺼임”이라는
말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영화 끝에 그들이 파멸할 것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정된 불운과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멸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막연하게나마 꿈꾸어왔던 희망이(사실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주인공이 파멸하지 않았더라면 연방요원의 탈을 쓰고 더더욱 끔찍한 인간으로 변했을 겁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시점에서 말이죠.

당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미국사회는 지금 이런 괴물같은 인간들을 찍어내는 공장
비스무리하게 돌아간다는 말이죠. 이는 다분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린시절에 저를 LA 복판에 던져놓고 자라게 한 후에
이라크전을 경험하게 만들어준다면? 저도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비슷하게 성장한 인간도 몇 알고 있구요. 인간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좋은 인간을 기대한다면 면저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덧) [플레닛 테러]에서 진지하게 미니바이크를 타면서 저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던 프레디 로드리게스가 주인공의 친구인 ‘알론조’역할을 합니다. 이 친구 목소리가 섹시하군요.

덧2) 국내에서는 괄약케이라는 선구자에 의해 실시되었던 “똥구녕 조이기”기술을 크리스찬 베일이 실시합니다.
괄약케이는 국방의 의무따위 쿨하게 벗어던지기 위해 실시한 기술이지만 주인공은 국방부에서 일하기 위해 실시하는군요. 전 왜 이리 쓸데없는 데에서 웃음이 터지죠?

영진공 거의없다

“예스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Yes해야 하는가.


부엉이의 입을 틀어막아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예스맨”이 생각보단 흥행이 별론가보다. 나는 영화 볼 여건이 좋지 않은 아줌마지만 그래도 짐캐리께서 나오신다는 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짐 캐리 작품의 경우, 남들이 범작이라 하더라도 나는 늘 기대이상의 만족감을 가져왔다.)

짐캐리의 코메디는 젠체하지 않으면서, 잘난척 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코메디와 철학적 질문이 따로 놀아서 영화의 톤(Tone:어조, 분위기)이 왔다리 갔다리 중구난방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은 질문대로, 코메디는 코메디대로 서로 조화되어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

이번 예스맨도 나는 정말 좋았다.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짐캐리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아주 미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 *




1.
우리는 원래부터 예스맨인걸

사람들이 예스맨에 땡겨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과속스캔들은 제목이 안티”라고 하던데, 사실 예스맨도 제목이 안티다.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한다니. 그게 뭐 대한민국 살면서 특별한 상황이겠는가. 도저히 이게 코메디의 소재가 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총체적 예스맨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응애응애 하고 태어나서, 겨우 5세 이하일 때만 “시져~ 안대~”를 외쳐보다가,(허긴 요샌 조기교육 열풍으로 5세 이전에도 ‘싫어’와 ‘안돼’를 외칠 자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가선 사랑의 매를 맞으며 일제고사에 yes,
대학다니면서는 높은 등록금에도 yes,
시위 현장에 나가서는 물대포를 맞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도 yes,
방송법이 날치기 통과되어도 yes,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예스를 외쳐야 하는 비운의 예스맨들이 아니던가.

아니, 그냥 아주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봐도 그렇다.
직장인들, 가기싫은 회식도 yes, 생산성 없는 야근도 yes, ‘까라면 까’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Yes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영화의 컨셉을 보면 질리는 게 먼저지, 절대 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No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노맨(No Man)”이라는 영화가 나오면 누구든지 보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2.
짐 캐리는 누구에게 Yes라고 하는가

하지만, 짐캐리가 억지로 “yes”를 하게 되면서, 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yes”를 하게 되는지를 보면 “그 예스”와 “이 예스”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 캐리의 yes는 소수자를 향해있다. (영화의 배경이 소수자들의 집합소인 LA라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그가 첫번째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는 노숙자다. 남에게 yes라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할 사람. 그런 소수자에게 yes를 할 수 밖에 없음으로 해서, 차를 태워주고, 핸드폰을 빌려주게 된다. 그 이후, 그가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들도 거의 대부분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후에 여자친구가 되는 앨리스는 제도권의 금융맨이 상대할 리 없었을 폭주족 히피이며, 옆집 할머니는 성적인 농담이 가미되어 약간 희화화 되긴 했지만 하루종일 말상대 할 사람 없는 독거노인이며, 그가 소액대출을 해주게 되는 이들은 작은 자영업을 하는 신용등급이 낮은 자들이다. 심지어 맘에 없는 휴일 근무 요구에 대해 “yes”라고 말하게 하는 상대인 노먼역시 보스의 외피를 입긴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면 ‘불쌍한 독거 중년’이다.

그의 yes는 효율과 효용을 떠나 (아놔~ 왜 갑자기 ‘실용’이라는 말이 떠오르냐) 누구에게나, 어떤 질문에나 동등하다. 그래서 효용,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하지 않을 ‘한국말 배우기’와 휴일을 ‘네브라스카 링컨에서 보내기’에 기꺼에 yes라고 한다. 그래서 그 덕에 틱틱거리는 한국인 노처녀에게도, 자살을 시도하려는 히스패닉에게도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마이너들에 대한 편견 없는 yes.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3.
예스맨이 기부천사보다 아름다운 이유

예스맨의 러닝타임 2/3쯤 이르러 칼(짐 캐리)의 행보를 보면, 히피인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노숙자 쉼터에 가서 무료배식 봉사를 하며, 대출 허가 도장을 쾅쾅 찍어대며,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이 아닌 담에는 쓸모도 없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이라는 소수인종과 더 가까운 소통에 성공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짐 캐리의 표정이다.

이때 짐 캐리는 결연하지도 않고, 성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즐겁게 임한다. 그가 하는 yes는 자동에 가까운 yes이기 때문에, 자신의 yes가 소수자들을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 또한 찾아볼 수도 없다. 소수자에 대한 ‘yes’를 ‘베푼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숙자인 닉과도, 한국 노처녀 수미와도 그는 대등한 친구의 위치일 뿐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칼은 몇백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강요된 Yes Man


예스맨의 막바지에 이르면 꼭 No해야하는 일에는 No를 해야한다는 것이 예스맨의 철학이라는 것도 볼 수 있다. 나의 편견이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땐 스스로에게 No Man~ No Man~ 야유를 보내본다. 꼭 No라고 대답해야 할 때인가? 그렇다면 자신있게 No라고 외쳐보련다.


Yes해야 할 때와 No해야 할 때를 알고 외치는 자의 앞뒷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진공 라이

“콜래트럴(2004)”, LA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

 

“톰 크루즈”가 처음으로 악당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콜래트럴』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반백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고급 수트를 입은 쿨한 살인 청부업자 “톰 크루즈”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진 성실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만) 있는 택시기사 “제이미 폭스”도 아니다. 그것은, 인구 삼백만이 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LA 그 자체이다. “톰 크루즈”의 냉소적인 대사에 의하면 LA는 지하철 역에 사람이 죽어도 6시간이나 방치가 되어서야 발견이 되는 도시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비정한 도시고, 총을 맞아 죽어도 여간해선 범인을 잡을 수 없다. 검찰청 건물은 심지어 옆에 있는 철제 쓰레기통을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은 강화유리로 문을 달아놓았고, 거대하게 위로 솟은 건물 사이의 인간은 그저 개미 한 마리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니 살인 청부업자가 유유히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인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도시들의 공통된 특성이긴 하지만 LA는 특히나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다. 서유럽계 백인들마저 실은 이민자(혹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니, 이탈리아계(같은 백인임에도!)나 멕시코 및 중남미계와 아시아인들만을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서유럽 출신의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가 채 안 되는, 그런 도시다. 이제껏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의 백인과 끼워주기 식의 (주로 악당 전문) 히스패닉 혹은 이탈리아 계열, 그리고 가뭄에 콩 날 정도로 아시아인을 등장시켰던 건, 그러니까 몽땅 구라인 셈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서유럽계 백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톰 크루즈”가 등장하는 것이, 실제 LA의 현실에 가깝다. 특히 한국 관객들을 웃게 만든, 영화 곳곳의 한글 간판들은, 사실은 이제까지 LA를 배경으로 한 백인 감독들의 영화가 인종적 편견에서 의도적/무의도적으로 무시해온, LA의 확실한 구성 요소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LA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이탈리아 계 혹은 히스패닉계이다. 첫 등장 순간 양아치일 거라고 대부분의 관객의 오해를 받는 패닝 형사는 상징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이제껏 범죄물에서 취해온 형식, 그러니까 백인 남녀 커플 주인공과 흑인의 침입자, 다수의 백인 주변인물이라는 구도를, 이 영화는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있다. “톰 크루즈”야말로 이 도시에 흘러들어온 낯선 침입자이자 도저히 LA라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며,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 거의 유일한 서유럽계 백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리고, 택시기사의 삶에 간섭을 하고(심지어 문병을 간다), 가방을 병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움직이는 안이함을 보이며, 직업적 살인 청부업자이면서도 아무리 사고 직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노트북과 메모리 자료를 사고차량 안에 그대로 놓은 채 자취를 감춘다.


환락과 타락의 도시, 살인과 강도와 각종 범죄와, 토박이보다 뜨내기와 밖에서 유입된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도시 LA.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라 하더라도, 뉴욕과 LA에 대한 미국 바깥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간 I Love NY을 외치는 수많은 영화들을 봐왔고, 정말 아무 특징 없이 시끄럽기만 한 도시인 LA 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조금 더 속살을 드러낸 LA를 그리는 이 영화가 처음인 듯. 영화 내내, “톰 크루즈”는 제이미 폭스에게 다음 목적지를 (당연하지만, 구체적인 거리와 장소의 이름까지) 일러주고 “제이미 폭스”의 택시(와 영화제작진의 카메라)가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일반적인 관광안내 엽서가 보여주는 LA의 광경이 아닌, 뒷골목과 좀더 현실적인 장소들로 이루어진 조금 특이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LA 관광을 하게 된다.


<콜래트럴 예고편>

그 거대한 과잉인구의 도시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현대인이라는 모티브가 상반된 직업과 배경을 가진 두 남자의 ‘적과의 동침’ 모드의 플롯을 통해 “심리적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취하며 갈등이 증폭된다. 현란한 비주얼과 액션의 ‘보이는 스펙터클’ 대신, 캐릭터 간 대결과 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스펙터클’을 취한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 중간중간 코믹한 지점들마저 웃음과 함께 묘한 무게를 얻으며, 지구 반대편 인구 천만의 도시에 살고 있는 동양인에게도 정서적 동질감을 얻어낸다. 범죄물 중에서도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런 타입의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캐릭터의 확실한 구축과 캐릭터 간 갈등과 변화의 완급과 조절을, “마이클 만”은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어 증폭시키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매우 훌륭하다. 톰 크루즈는 충분히 수긍 가는 살인 청부업자이며,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제이미 폭스” 역시 신뢰감을 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도 매우 좋다. 각본가이기도 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그는 LA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재즈’를 설정했고, 이는 한인타운의 피버 클럽 씬을 제외한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톰 크루즈”의 재즈에 대한 취향은 일종의 조크인 듯. 흑인들의 음악이 어느새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고, 그 이후엔 흑인들보다 백인들에게 주로 소비되는 사회적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역시나 외부의 이방인으로서, “LA에서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재즈에 대한 취향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영화 삽입곡 “Hands Of Time (By Groove Amada with Richie Havens)>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