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Valerie)의 편지

 


 


 



1980년대의 DC Comics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V for Vendetta”(2006).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Evey는 우연히(?) 발견한 “발레리”라는 여인의 편지를 통해 “공포”를 이겨내게 된다.

만화 원작에 나오는 이 편지의 원문을 옮겨 보았다.



 



 



I don’t know who you are. Please believe. There is no way I can convince you that this is not one of their tricks. But I don’t care. I am me, and I don’t know who you are, but I love you.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이 편지가 저들의 더러운 술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나는 나예요.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I have a pencil. A little one they did not find. I am a women. I hid it inside me. Perhaps I won’t be able to write again, so this is a long letter about my life. It is the only autobiography I have ever written and oh God I’m writing it on toilet paper.

내겐 연필이 있어요. 아주 작아서 저들이 찾아내지 못했죠. 난 여자라서 몸 안에 감출 수 있었답니다. 더 이상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여기에 나의 인생에 대해 긴 편지를 쓴답니다. 이건 하나 밖에 없는 내 자서전 인데, 그걸 화장실 휴지에다 쓰게 될 줄이야.

I was born in Nottingham in 1957, and it rained a lot. I passed my eleven plus and went to girl’s Grammar. I wanted to be an actress.

난 1957년 노팅엄에서 태어났어요. 비가 무척 많이 내렸죠. 열 한 살이 넘어서 여학교에 가게 되었죠. 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I met my first girlfriend at school. Her name was Sara. She was fourteen and I was fifteen but we were both in Miss. Watson’s class. Her wrists. Her wrists were beautiful. I sat in biology class, staring at the picket rabbit foetus in its jar, listening while Mr. Hird said it was an adolescent phase that people outgrew. Sara did. I didn’t.

첫 여자친구, 사라를 그 학교에서 만났어요. 그때 사라는 열 네 살이었고 난 열 다섯 살이었지만 둘 다 왓슨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죠. 그녀의 손목. 그녀의 손목은 아름다왔어요. 생물시간에 유리병에 담긴 토끼의 태아를 바라보면서 허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죠. 청소년기에 겪는 혼란일 뿐이라고. 사라는 그랬지만 난 아니었어요.

In 1976 I stopped pretending and took a girl called Christine home to meet my parents. A week later I enrolled at drama college. My mother said I broke her heart.

1976년에 더 이상은 숨기지 않고 크리스틴을 부모님께 인사드렸죠. 일주일 후에 연기자 학교에 등록했고요. 어머님이 그러시대요. 내가 당신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고.

But it was my integrity that was important. Is that so selfish? It sells for so little, but it’s all we have left in this place. It is the very last inch of us. But within that inch we are free.

하지만 나는 나와 내 삶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내가 이기적인가요? 비록 아주 하찮을 지 몰라도 나와 내 삶에 충실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이잖아요. 우리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것.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죠.

London. I was happy in London. In 1981 I played Dandini in Cinderella. My first rep work. The world was strange and rustling and busy, with invisible crowds behind the hot lights and all that breathless glamour. It was exciting and it was lonely. At nights I’d go to the Crew-Ins or one of the other clubs. But I was stand-offish and didn’t mix easily. I saw a lot of the scene, but I never felt comfortable there. So many of them just wanted to be gay. It was their life, their ambition. And I wanted more than that.

런던. 그 곳에서 난 행복했어요. 1981년에 난 신데렐라에서 단디니 역할을 했죠. 최초로 내 이름을 알린 작품이죠. 그때 세상은 기묘하고 소란스럽고 북적거렸죠. 밝은 조명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 관객들과 그 숨막히는 화려함. 재밌고 좋았지만 언제나 외로웠죠. 밤에는 크류-인같은 클럽에 놀러갔었죠. 하지만 난 항상 혼자 있었고 잘 어울리지 못했죠. 거기에서 많은 걸 보았지만 난 불편하기만 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게이가 되려고 했답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원하진 않았어요.

Work improved. I got small film roles, then bigger ones. In 1986 I starred in “The Salt Flats.” It pulled in the awards but not the crowds. I met Ruth while working on that. We loved each other. We lived together and on Valentine’s Day she sent me roses and oh God, we had so much. Those were the best three years of my life.

일은 잘 풀려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죠. 처음엔 단역이었지만 차츰 큰 역할을 맡았죠. 1986년에는 “소금 평야”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답니다. 상은 많이 받았지만 관객 동원은 별로였죠. 그 영화를 찍을 때 루쓰를 만났답니다. 우린 서로를 사랑했어요. 우린 함께 살았고 발렌타이 데이에 그녀는 내게 장미를 보내주었죠. 아, 우린 행복했어요. 그 때가 내 생애 최고의 삼 년 간이었어요.

In 1988 there was the war, and after that there were no more roses. Not for anybody.

1988년에 전쟁이 발발했죠. 그 이후 장미는 자취를 감췄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요.


 


 




 



In 1992 they started rounding up the gays. They took Ruth while she was out looking for food. Why are they so frightened of us? They burned her with cigarette ends and made her give them my name. She signed a statement saying I’d seduced her. I didn’t blame her. God, I loved her. I didn’t blame her.

1992년에 그들은 게이를 잡아들이기 시작했죠. 먹을 걸 구하러 나갔던 루쓰를 그들이 잡아갔죠. 그들은 왜 우리를 그토록 무서워하는 걸까요? 그들은 루쓰를 담뱃불로 지지면서 내 이름을 불라고 했어요. 그녀는 내가 그녀를 유혹했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했죠.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하느님, 난 그녀를 사랑했어요. 난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But she did. She killed herself in her cell. She couldn’t live with betraying me, with giving up that last inch. Oh Ruth. . . .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했답니다. 그녀는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녀는 나를 배신하고는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자신에게 허락 된 최소한의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갈 수 없었나 봐요. 아, 루쓰 …

They came for me. They told me that all of my films would be burned. They shaved off my hair and held my head down a toilet bowl and told jokes about lesbians. They brought me here and gave me drugs. I can’t feel my tongue anymore. I can’t speak.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죠. 그들은 내가 출연한 영화를 다 불 태워버렸다고 말하더군요. 그들은 내 머리를 깎고 내 얼굴을 변기 속에 박아넣었죠. 그러면서 레즈비언에 대한 농담을 주고 받더군요. 그들은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와서는 약을 먹였어요. 난 이제 혀에 감각이 없어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The other gay women here, Rita, died two weeks ago. I imagine I’ll die quite soon. It’s strange that my life should end in such a terrible place, but for three years I had roses and I apologized to nobody.

이 곳에 있는 다른 게이 여자 리타는 이 주일 전에 죽었어요. 나도 곧 죽게 되겠죠. 내 삶이 이런 처참한 곳에서 끝난다는 게 너무 기막히지만 그래도 내겐 장미와 함께 한 삼 년의 세월이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요.

I shall die here. Every last inch of me shall perish. Except one.

난 여기서 죽는답니다. 나의 것은 모두 다 썩어서 없어지겠죠. 단 하나만 남기고.

An inch. It’s small and it’s fragile and it’s the only thing in the world worth having. We must never lose it, or sell it, or give it away. We must never let them take it from us.

내게 허락된 최소한의 것. 작고 연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하나 가질 가치가 있는 그것. 우리는 절대 그걸 잃어서는 안되요. 팔아치워서도 안되고 남에게 내 던져 버려도 안되죠. 절대로 그들이 우리에게서 그걸 뺏어가게 해선 안된답니다.

I don’t know who you are. Or whether you’re a man or a woman. I may never see you or cry with you or get drunk with you. But I love you. I hope that you escape this place. I hope that the world turns and that things get better, and that one day people have roses again. I wish I could kiss you.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여잔지 남잔지도 모르죠. 난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릴 수 없을지도 모르고 당신과 함께 술에 취할 수도 없을테지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디 당신이 이 곳을 탈출 할 수 있기를 바래요. 세상이 변해서 사정이 나아지길 희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장미를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대에게 입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Valerie

발레리가.


영진공 이규훈


 


 


 


 


 


 


 


 


 


 


 


 


 


 


 


 


 


 


 


 


 


 


 


 


 


 


 


 


 

“솔로이스트”, 당신의 솔로는 오늘도 무사합니까?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명제가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사회나 팀스포츠에서 개개인을 어떤 틀이나 목표에 묶어서 조련을 하고 독려를 하면 그 개인 각각의 역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반면에 그 틀이 엉성하거나 감독의 방식이 그르면 오히려 결과는 매우 허접해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보면 저 말은 그렇다라는게 아니라 그래야한다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의 속내를 보면 그 안의 부분들이 고르게 더 나은 결과를 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위는 역량보다 몇 배 뛰어난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어떤 단위는 역량에 근접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또 어떤 단위는 아예 결과를 깎아먹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틀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단위는 슈퍼스타가 되고 어떤 단위는 소위 “Loser”가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그닥 차이가 없어보이는데도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걸까.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많이 다른 단위들을 하나의 틀에 넣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보면 모든 단위에게 어느 정도의 획일성과 몰개성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를 잘 받아들이면서 훌쩍 뛰어 넘으면 슈퍼스타가 될 터이고 그저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면 필요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단위가 될 터이며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루저가 될 터이다.

루저를 지나쳐서 아예 탈락자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개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섞이지 못하거나 섞임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별의 능력이 부족함에도 전체에 어떤 형태로든 과다밀착하여 마땅한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또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해 탈락하는 이들은 그저 못난이에 불과한 것일까.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게, 전체 속의 유용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에 서투른 이도 홀로 무언가를 만들고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매우 뛰어난 경우가 많이 있다. 역사를 살펴보거나 아니면 그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아도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쯤되면 전체와 부분을 구분한다는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전체 속에서 훌륭히 기능하는 단위는 따지고 보자면 유능한 Soloist인 것이고,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하는 Soloist도 그에게 맞는 전체가 주어지면 또한 훌륭한 단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나다니엘 (제이미 폭스 분)에 대해서 국내 홍보문구는 “삶의 길을 잃어버린 천재 음악가”로 써놓았는데, 사실 영화 속 내용에서는 나다니엘을 천재라고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가 본 아이 중 가장 재능있다고 한 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홍보태그도 “Nathaniel Ayers had lost his way. He was about to get a second chance. (삶의 길을 잃은 나다니엘, 두 번째 기회를 얻으려하다.)”라고 돼있다.

여하튼 첼로연주에 재능을 가진 나다니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의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한채 오로지 밤이고 낮이고 첼로에 몰두하였고 ‘홀로’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음악계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걸로 유명한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허나 그 순간부터 나다니엘은 길을 잃기 시작한다. 재능있기로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료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함께 연주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겹치면서 낙오를 하고야 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던 나다니엘은 우연히 유명 신문 칼럼니스트 스티브(로버트 다우니 쥬니어)의 눈에 띄게 되고, 첼로를 연주하는 부랑자라는 점에 끌린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정상(?)의 삶으로 끌어올리고자 애쓰게 된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 생활환경을 제공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유명 지휘자와 종교인 등에게 소개를 시키고 후원을 부탁하는 등 스티브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나다니엘을 정상인, 아니 그 이상의 훌륭한 연주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브가 그리는 그림일 뿐이었고, 나다니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고 발벗고 나선 이들 누구도 정작 나다니엘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나다니엘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래서 벗어나야만 했던 틀과 유사한 틀을 다시 씌워주려 했을 뿐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여러가지로 다르게 다시 해도 무방하다. “절이 싫으면 뜯어 고쳐라”, “절이 싫으면 사람들을 모아 새 절을 만들라”, “절이 싫으면 힘을 길러 주인이 되어라”, “절이 좋으면 사람들이 더 모이게 애쓰라” 등등 ……

하나의 절이라는 전체가 훌륭한 각 구성 부분들이 합쳐져서 그렇게 좋아진 것 만큼이나, 각각의 구성 부분을 전체로 잘 아우를 수 있어야 좋은 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 전체와 부분은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전체를 위해 부분이 과도하게 희생하거나 일부가 전체인양 모든 걸 좌지우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굳이 말로 다시 쓸 필요가 없겠다. 그러니 절이 싫으면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 틀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구성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인지를 잘 가려서 그에 따라 대처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데에 있다. 보통 부분은 전체에 비해 힘이 턱없이 적고 여러 부분들이 힘을 합쳐도 기존의 전체와 맞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중들이 떠나고 만다.

오늘도 나의 솔로는 경계선에서 연주되고 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중간 쯤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 전체의 문제점에 대해  적절히 분노하려고 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이 초라한 연주도 아니다. 이런 솔로는 매우 많아서 보통 다른 이들의 연주와 뒤섞여 그냥 퉁쳐서 한묶음으로 들린다. 참 피곤하면서 티도 안나는 솔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들 중에도 어느 하나는 전체를 이끄는 한편, 어느 솔로는 전체와 동떨어져서 홀로 연주하곤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퉁쳐서 한묶음 속에서 연주하면서 거기에서도 나서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속에서 연주도 안하고 놀면서 묻어가려고 한다. 이 중에 어느게 좋은 건지, 맞는 건지는 당연히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터이지만.

자, 당신의 솔로는 어떠하신지. 오늘도 무사히 그럴듯하게 연주되고 있나요.


영진공 이규훈

브이 포 벤데타, V For Victory, 승리의 V를 위해

 

2008년의 대한민국에 이 영화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공포와 증오

공포는 복종을 낳고 복종은 방조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종과 방조의 아래 어디쯤 어두운 곳에서는 증오가 함께 자란다.
공포의 원천에 대한 증오와 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공포 속에서 안주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정체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질기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지라 빛을 모른다.
빛을 모르니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도 모른다.
다만 그 증오는 터져버릴 때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이다.

V는 증오이고 복수이다.
V는 눈 먼 증오이고 복수이다.

사랑과 믿음

증오는 파괴를 부른다.
되 갚아 줘야 하기에 부셔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포의 원천과는 공존할 수 없기에 뿌리까지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포의 원천이 사라지면 증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증오가 새로운 세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사랑과 믿음으로 새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포와 방조에 짓눌려 감겨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와 남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시 싹 틔워,
너와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vey는 사랑이고 믿음이다.
Evey는 힘겹고 어렵게 사랑과 믿음에 눈을 떠야 할 당신과 나이다.

V가 처음 모습을 보인 건 1981년 영국에서이다.

그 시절 영국은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수상의 자리에 오른 마거릿 대처가 혹독한 밀어붙이기로 사회 전반을 휘몰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엄격한 도덕과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누진세를 폐지하여 긴축재정을 편성하면서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였고 거의 모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실행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그녀는 1982년에 느닷없이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유발하여 국면 전환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노동조합과 끊임없이 대립하여 무력화 시켜나갔는데, 그녀의 재임기간 중 영국 내 최대 노조였던 석탄노조는 거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무참히 깨졌다.

경제부흥을 기치로 집권 11년 동안 공공분야에 대한 국고지원 대폭 삭감, 복지예산 대폭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을 몰아붙이며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발로 물러나게 된다.

V는 대처의 집권 초기에 “대처리즘”의 음산하고 잔인한 내음을 감지한 Alan Moore와 Dave Lloyd의 만화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7년 동안 10권 분량의 작품 속에서 V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공포와 증오로 대체된 사회에 대한 복수(Vendetta: 복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감행하였다.

V의 출현 배경에 대해 Alan Moore는 1988년 캐나다 판 “V for Vendetta”의 서문 속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It’s 1988 now. Margaret Thatcher is entering her third term of office and talking confidently of an unbroken Conservative leadership well into the next century. My Youngest daughter is seven and the tabloid press are circulating the idea of concentration camps for person with AIDS. The new riot police wear black visors, as do their horses, and their vans have rotating video cameras mounted on top. The government has expressed a desire to eradicate homosexuality, even as an abstract concept, and one can only speculate as to which minority will be the next legislated against. I’m thinking of taking my family and getting out of this country soon, sometime over the next couple of years. It’s cold and it’s mean-spirited and I don’t like it here anymore.”

“이제 1988년입니다. 마가릿 대처는 수상 3선 임기에 들어섰고 깨어지지 않을 보수의 리더십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신념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막내 딸은 일곱 살이 되었고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 격리수용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사화하고 있습니다. 새로 조직된 시위진압 경찰과 그들의 말은 검은 투구를 쓰게 되었고 그들의 차량 꼭대기에는 회전하는 비디오 카메라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비록 추상적 개념이긴 해도 동성애자를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다음 표적은 아마도 소수민족이 될 듯합니다. 나는 이, 삼 년 내에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려 생각 중입니다. 이 곳은 춥고 잔인한 기운이 가득하여 더 이상은 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Alan Moore의 소회는 Evey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큰 공포와 증오가 짓누르고 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은 2008년. V는 1981년의 우리가 아닌 2008년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1981년의 우리에게 V의 메시지가 공포를 이겨내는 증오의 힘과 공포의 원천에 대한 복수를 전하는 거라면, 2008년의 우리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전하지 않을까.

암울했던 시절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부정되던 공포를 이겨내고 증오의 힘을 모아 원천을 타격했던 동력이 Vendetta(복수)였다면, 이제 그 V는 사랑과 믿음을 원천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승리의 Victory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엔딩,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영진공 이규훈


잡담.
1.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Guy Fawkes는 실존인물이다. V가 쓰고있는 가면도 Guy Fawkes 가면이다. 그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자 1605년 11월 5일에 의회 건물 지하에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했으나 일당 중 밀고자의 밀고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혔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2. 원작 속 Norsefire 집단의 구호는 “Strength Through Purity, Purity Thorough Faith(국가의 힘은 순결성에서, 순결성은 종교적 신념에서)” 이지만 영화에서는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국가의 힘은 단합을 통해, 단합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로 나온다.

권위와 인간의 존엄

 

우선 영상 두 개부터 보시죠 ^^

본 사람도 많겠지만. 위의 영상은 EBS의 지식채널-e 에 나온 ‘광우병’ 관련 영상이다.

난 광우병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1980년대의 ‘영국’을 이야기 하려 한다.

위의 영상들의 시초는 모두 영국의 1980년대다. 물론 ‘미친 공장’의 경우 1970년대부터 시작된 소의 사료 이야기지만 그 배경에는 역시 ‘인간’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이 있다.

영국은 1970년대 – 1973년과 1979년 – 오일쇼크를 두 번 겪었다. 그 중 두 번째 오일쇼크 덕에 정권이 ‘철의 여인’ 대처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이 배경에는 숙련 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넘어가면서 ‘변절’하는 등의 여러가지 사건이 많지만 어쨌든 ‘경제 위기’ 덕분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복지 따위 집어 치우고 닥치는대로 ‘민영화’를 시켜버린 대처가 수상이 되어버린 거다.

대처는 이 때부터 1990년 퇴임때까지. 12년을 영국의 수상으로서 온갖 ‘암울한 일’을 벌였다. 이후에 ‘토니 블레어’ 총리 시대때 대처가 벌여놓은 ‘경제 호황’을 누렸다고, 경제가 발전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처 덕분에 영국은 빈부 및 지역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영국의 근본적인 경제 문제의 근본은 건드리지도 못 했다.

어떤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경제 발전 시키겠다고 국민을 현혹시켜 당선 되어 놓고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닥치고 민영화’? 더불어 그 뿐인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사람’이라는 최대의 가치를 가볍게 다루는 이 ‘정권’에게 저런 과거의 영국이 걸었던 길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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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V for Vendetta의 원작인 만화는 저런 ‘대처리즘’의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동시대를 살던 만화가가 ‘대처’ 때문에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기 위해 만든 거다.

권위주의 정부.

시장 논리를 내세우며 기본적인 ‘인권’ 마저 ‘국가’라는 명목으로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 버리는 정부.

더 할 말이 없다.

‘사람’을 위해,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할 사람’을 위해.
우리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하면 안 될까?

복지를 줄이고, 민영화를 시키고, 빈부 격차를 넓히고……

그렇게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세상이라 말하고 싶은가?

약육강식의 세상이 ‘본능’이 아니라 저 빨간 털 원숭이처럼 ‘함께’ 살아야 하는 게 인간 아닌가?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