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


 


 


 


 


 


 


 


 


 


 


 


 


 


 


 


 


 


 


 


 


 


 


 


 


 


 


 


 


 


 


 


 


 


 

[그 영화 그 노래] 이웃집 미쿡 토토로 ^^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애니 좋아하시는 분들, 그리고 근래에 아이 키우시는 분들 중에 “이웃집 토토로”(미야자키 하야오, 1988)를 모르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토토로에 대한 설명은 생략~ ^^


 


 


“이웃집 토토로”는 미국에서도 1993년에 최초 개봉하였고 다른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과 함께 그쪽의 애니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인지 “토이 스토리 3″에 우정 출연하기도 하였고 …


 


각설하고, 오늘은 금요일이기도 하고 비도 오고 해서 그냥 즐기시라고 미국 버전으로 “이웃집 토토로”의 사운드 트랙 중 “산보”와 “이웃집 토토로”를 준비해 보았다.


 


먼저, 미국에서 비디오와 DVD로 처음 출시된 건 Fox 라벨을 달고 나갔는데, 일단 그 버전으로 “산보”는 요렇게 불렀다.


 


 


 





 


 


그리고 Fox의 판권이 만료되자 Disney에서 2006년에 다시 DVD를 발매하였는데, 그때에는 다코타 패닝과 엘르 패닝 자매가 사츠키와 메이를 더빙하였다. 그럼 그 버전에 있는 “산보”를 들어보자.  


 


 


 





 


 


그렇다면 이제 오늘의 하일라이트! … (응?) … 는 아니고,


“이웃집 토토로”의 메인 테마를 미국 버전별로 들어보도록 하자.


 


우선, Fox 버전 …


 




 


 


그리고 Disney 버전,


 


 


 




 


 


 


확실히 영어로 부르는 토토로는 뭐랄까 … 맛이 좀 밍밍하달까 … 그렇긴하다.


그런데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국판이라고 해도 원어를 최대한 반영하고 어감이나 토씨 하나라도 바꾸길 원치 않았다 하니 … 그래서 그런가보다 해야지 싶다.


 


암튼, 좋은 작품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매우 뻔한 말과 함께 디즈니 버전 중에서 비오는 버스 정류장 장면을 감상하시는 걸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영진공 이규훈


 


 


 


 


 


 


 


 


 


 


 


 


 


 


 


 


 


 


 


 


 


 


 


 


 


 


 


 


 


 



 


 


 


 

영화의 세계 …… 그리고 내러티브



음악과 영화의 차이는 뭘까?
난 무엇보다 내러티브가 있고 없음이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계속 그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음악에는 내러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음악에도 코드 진행이 있고 리듬 패턴이 있으며 역시나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각의 세계다. 느낌의 무엇인 것이다. 그 세계의 구조와 미세한 변화는 숙련된 귀를 가져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숙련된 귀를 가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을 막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기에 음악이 좋고 들으면 행복해진다.







영화를 참 좋아한다. 음악 못지 않게 좋아했다. 한 때는 영상 만드는 데 관심도 많았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좌절점은 글 만큼이나 영상 역시 내러티브가 있고, 그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음악처럼 끝없는 상상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


그리고 영화는 음악도 글도 미술도 애니매이션도 다 먹어삼키는 괴물이었다. 음악이 절대 가질 수 없는 크기의 깊고 넓은 구덩이이기도 하고. 너무 자유로워서 (더더욱 감당할 수 없을만큼) 옭아오는 세계였다.

맘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영화를 참 안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주워 듣는 사람으로 참 창피한 얘기다. 그러나 음악처럼 내 머리 속을 마구마구 자극하는 무엇을 어느 순간부터 찾기 힘들어 영화 앞에서 주저했다.

기타 소리 하나에서 기타줄-픽업-바디-암-스프링-앰프-리턴-이펙터의 매커니즘을 상상할 수도, 담배 연기와 독한 술을 생각할 수도, 무대에 섰을 때 관객의 호응을 떠올리기도, 음악의 인상이 주는 인생의 좌절과 환희를 맛볼 수도, 혹은 지구 밖의 괴상한 꿈나라 속을 걸을 수도 있는, …… 그런 별의 별 생각을 다 떠올릴 수 있는 음악.


 





 


음악을 들으며 나는 답답하고 뾰족한 수 없는 그저 그런 인생 속에서 도저히 그려볼 수 없는 우주를 꿈꿀 수 있었다. 음악은 그랬다.


그러던 어느 연휴, TV 채널 여기저기서 나오는 영화들. 참 오랫만에 영화를 첨부터 끝까지 봤다. 꾸준히 보는 DVD영화 몇 편이 있지만, 그와 다른 느낌으로, 다른 자세로, 정말 영화에 빠져서, 조명이 어떻고, 화면 구성이 어떻고 표정이 어떻고 그런 거 다 잊고, 그냥 영화의 얘기에 빠졌다. (사실 짜증나서 채널을 돌려버린 영화도 몇 편 있다.)

잊고 있었던, 아니 피하고 싶던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놀았다. 예전에 갖지 못했던 기분이 온 몸을 적셔왔다. 영화 속 음악이 때론 거슬리기도, 과도하기도, 답답하기도 했지만 꿋꿋이 영화의 얘기에만 빠졌다. 이상하게 보는 영화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한 편, 한 편 끝날 때마다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오래 전, 하루에 영화 한 편 이상 보지 못하던 옛 기억도 났다. 한 편을 흡수하고 나면, 영화는 커녕 음악도 듣지 못하고 술만 겨우 마실 수 있던 정말 오래 전의 나의 모습 말이다.


물론 기억만 났다. 그 다음 날 저녁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피아노 트리오 음악이, 더블 베이스의 도약하는 연주가 땡겼던 것을 보면 과거의 내가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과거와 달리 내러티브가 전하는 떨림에 짓눌리지 않고 (그저)즐기는 내 모습이 싫지 않다.



만화책을 본다. 영화를 본다. …… 내러티브의 세계.


왠지 그 세계가 다시 맛있어 질 것 같다.


영진공 헤비죠


 


 


 


 


 


 


 


 


 


 


 


 


 


 


 

“고 녀석, 맛나겠다”(まえうまそうだな, 2010), 내가 니 밥이다!





감독
: 후지모리 마사야

어린 시절 아버지가 권해준 고기를 손가락 쪽쪽 빨아가며 맛있게 먹었는데 알고보니 그 육질 좋은 고기의 정체가 어제까지도 함께 뚝방을 누비던 누렁이였다는 식도를 죄여오는 사연이 종종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곤 한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애매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 시골 곳곳에서 벌어진 이런 비극은 살기위해 먹어야 하는 존재로서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숙명을 외면하고 단지 동심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애니메이션이,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어깨동무하며 놀아제끼는 빨갱이 같은 사회를 그리고 있다
. 이는 아이들과 철없는 어른들로 하여금 먹이사슬의 위계질서를 망각케 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예로 최근 10년간 호랑이와 같은 거대 육식동물이 애완동물로 키워지다 에피타이져 신세가 되었다는 해외토픽 기사의 증가는 이런 빨갱이 같은 애니메이션의 작품 수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 영화는 이런 생태학적 만행에 일침을 가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은 아무리 불알친구라도 자칫하단 골로 갈 수 있으니 긴장하며 지내라는 바람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원작은 “고녀석 맛있겠다”라는 동화책으로 동화 일러스트 작가 미야니시 다츠야의 단순한 형태와 원색들로 그려진 공룡 그림들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당연히 얘기지만 원작이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이렇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것이다.



동화책 “고녀석 맛있겠다는 티라노사우르스가 주인공으로 열연하고 있는 시리즈 중 하나로 현재 국내에는 5권이 출간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이 시리즈의 이야기들을 모두 엮어서 각색한 것이다. 하지만 동화책의 내용은 하나 같이 뛰어넘을 수 없는 주식(主食)의 벽 앞에서 이별을 맞이하는데 반해 애니메이션은 아쉽게도 이를 모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해피하게 편집해 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동화책과는 너무 다른 그림체이다
. 작가의 개성 넘치는 색과 형태가, 너무나 진부해 보이는 그림체로 바뀌어져 원작에 매력을 느낀 이라면 선뜻 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뚜껑을 열어 보면 애니메이션의 그림체 역시 각각의 공룡의 특징까지 감안한, 공들여서 그린 그림으로 원작과의 이질감은 금새 사라지고 애니메이션 나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작정하고 작품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고 있는 아기 안킬로사우르스는 정말 귀여워서 언제 잡아먹힐지 기대하게 만들지만 안타깝게도 잡아먹히지 않는다
. 그리고 동화책에선 볼 수 없는 육식공룡들의 아크로바틱한 액션은 본의 아니게 아이와 함께 시청할 수밖에 없는 아빠들의 지루함을 한방에 날려 줄 것이다

영진공 self_fish

“마루 밑 아리에티”, 하야오 없는 지브리의 미래



올해로 70세의 나이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언제 처음 은퇴를 선언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1997년작 <원령 공주> 때였던 것 같은데 작품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연출작이라는 소식에 일본에서만 2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을 했다던가 그랬었다. 그 이후로 감독의 은퇴와 복귀 선언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그리고 재작년 <벼랑 위의 포뇨>(2008) 을 계속 내놓으며 “지브리 스튜디오는 곧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등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간 후계 양성을 목적으로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연출 데뷔의 기회를 여러 차례 주어왔지만 – <귀를 기울이면>(1995)의 콘도 요시후미, <고양이의 보은>(2002) 의 모리타 히로유키,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2006)의 미야자키 고로 – 그 가운데 어느 누구도 두번째 연출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노감독이 마음 편히 뒷자리로 물러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195년에 처음 씌여진 영국 아동문학가 메리 노튼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각색과 기획, 제작을 담당하고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연출 데뷔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연출하지 않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스튜디오의 후계 구도에 관한 고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보았을 때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후계자를 찾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작품의 내용과 주제, 그외 기술적인 부분들까지 모든 면에서 창업주의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근작 <벼랑 위의 포뇨> 보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의 데뷔작 <마루 밑 아리에티>가 훨씬 더 미야자키 하야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쏙 빼어닮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과정에 각본과 제작자로 참여한 창업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바꿔 말하자면 신인 감독의 재량권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방법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원제목인 <The Borrowers>는 인간들의 도구와 음식을 빌려다가 사는 소인들이라는 의미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마루 밑에 거처를 마련해놓고 인간들 몰래 필요한 가재도구와 음식물을 얻어다 쓰며 살아가는 이 존재들은 외관상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외관을 갖추었지만 그 자체로 대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 인간 자신들을 모함해서 – 모든 생명체를 상징하는 듯 하다.

그런 상징적인 존재들이 조금씩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끼고 무언가 행동으로써 도움을 주는 등장 인물의 모습은 곧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돼” – 이 지극히 일상적인 작별의 인사말에 간절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은 <마루 밑 아리에티>가 지브리 스튜디오와 창업주의 세계관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곤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마루 밑 아리에티>는 비교적 작은 스케일의 작품이라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공간적으로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특별한 스펙타클을 전시하고 있지도 않는 편이다. 등장 인물들도 거의 만나자 이별인지라 개별 캐릭터에 깊이 감정이입이 되기 보다는 그들의 짧은 만남과 이별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전반적으로 넉넉하게 진행되는 전개 속도와 섬세한 작화 스타일 만큼은 확실히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시청각적 체험을 재연해준다고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으로도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계속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연출하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 사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체제 하에서 연출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했댄다 – 판타지를 기반으로 자연과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의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담아 때로는 인간의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 날선 비판을 던지기도 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고유의 작품 세계와 스타일이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에도 충분히 재현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는 앞으로 자주 언급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