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데뷔작, <졸업>을 다시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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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졸업생'(발음은 '그래듀잇')이다
미국의 6, 70년대 청년들 모두가 섹스, 마약, 로큰롤에 탐닉한 건 아니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그룹에나 너드 범생은 한둘 씩 꼭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언제나 충실하게 기성세대의 가치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너드였던 학창시절 속으로는 반항심이 드글거렸으며 그 결과 지금 이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까. 하여간, 그럼 그 당시 겉으로는 아주 충실하게 부모 말 잘 듣는 생활을 했던 아이들은 실제로 어떤 생각과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았을까. 이게 궁금하다면 <졸업>을 보면 될 것이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부터 벤저민의 고난은 시작된다. 고등학교 땐 대학이, 대학에 가서는 졸업이 목적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금 그에겐 마땅히 하고픈 일도 없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렇다고 부모가 요구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뜩치 않다. 그에게 처음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은 로빈슨 부인의 유혹에 의해서며, 섹스, 마약, 로큰롤의 시대이던 당시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버진이었던 그는 로빈슨 부인의 유혹을 받고 결국 매일 밤마실을 나가게 되면서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드는데, 문제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자발적 선택’이라곤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거다. 어리버리하고 멍한 벤저민의 영화 초반 모습은 충분히 코믹하며, 더스틴 호프먼이 새삼 코미디 배우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되새기게 된다. 이 영화는 더스틴의 출세작이기도 하지만 첫 주연작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일에 어수룩하고 어리버리하던 벤저민이 비로소 사람 꼴이 돼가는 건 일레인을 만나면서다. 자신에게 성의 신비로운 세계를 처음 알려준 ‘어른 세대’인 로빈슨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일레인을 만나고, 일레인이 다니던 학교 근처로 이사가 그녀를 뒤쫓고, 결혼식까지 깽판놓게 되는 건 모두 벤저민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행동에 의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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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실제론 6살 차이


여기엔 꽤 재미있는 해석 가능성’들’이 있다. 일단 그의 세계를 열어준 것이 모두 여성이고, 어머니 또래의 여성을 배반하면서 자기 또래의 여성을 선택하는 것을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변형으로 해석해도 재미있을 것이며, 벤저민의 반항과 선택에서 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자신의 부모, 특히 아버지와 로빈슨 씨가 아닌 로빈슨 ‘부인’으로 설정된 것에서도, 당시의 시대가 가지고 있던, 여성주의 관점에선 ‘한계’로 볼 수 있는 지점들(즉 아버지에게 반항 못하니 어머니 혹은 유사-어머니한테 반항하는) 혹은 이것을 오히려 ‘한계’라기보다 또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지점들(가부장제는 성인/기득권 계층의 ‘여성’의 도움 없이는 완성이 불가능하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뒤에서야 처음 성관계를 하고 자신의 선택을 하는 벤저민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사회화가 늦어지면서 성인이 되는 시기가 늦어지는 현상, 즉 키덜트가 등장하게 되는 현상의 시초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시스템이 지극히 폭력적이며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거기에 저항할 수 없기에 무력감을 느끼며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그 본질을 드디어 뻔뻔하게 까발리고도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이 완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개인은, 청년들은 분열증을 겪으며 결국 어른이 되기를 스스로 멈추거나 거부하고, 혹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더스틴 호프먼이 70년대를 대표하는 ‘청춘스타’이자 아이돌로만 머물지 않는 진정한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러한 청년상과 사회상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배우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졸업>은 67년도작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바로 <졸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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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어찌나 아름다우신 옵퐈의 옆 모습이신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일레인과 버스를 잡아타고서 뒷자리에 앉은 벤저민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많은 평론가들은 그간 결코 밝을 수 없는 미래, 해피엔딩이지만 결코 해피하지 않는 엔딩 방식에 대해 말하곤 했다. 나는 ‘어느 순간 굳는 표정’ 보다는, 일레인과 벤저민이 서로를 바라보는 타이밍이 계속해서 어긋난다는 사실이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사실 ‘표정이 어떻게 굳나’ 아무리 지켜봐도, 표정이 확 굳어버리는 건 벤저민보다는 일레인 쪽이더라는. 그리고, 이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는가. 당시는 여성의 운명이 여전히 배우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오히려 결단은, 비록 벤저민의 입장에서 ‘상대’이자 ‘타자’가 되었기에 선택의 대상이 되긴 했으나, 그 선택을 받아들인 일레인의 결단이 더 크다. 내가 오히려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버스 뒷좌석에 막 앉아 마주 보고 미소지었던 이 두 사람이, 얼굴을 돌린 후에는 상대를 바라보는 타이밍이 번번이 서로 어긋나서 둘이 다시는 결코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분명히 벤저민은 그곳에 자기 차를 몰고 왔는데, 왜 떠날 때엔 버스를 타고 떠나지? 벤, 차는 어쨌수?) 나는 이 엔딩을, 결코 ‘그럼에도 밝지 않은, 언해피 엔딩’으로 보고 싶지가 않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협력하여 이루어 가는 관계라는 걸, 그렇기에 서로 마주보는 것도 사랑이지만 함께 나란히 같은 방향을 보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으로 보고 싶다. (아, 나이가 드니 더럽게 해피엔딩 좋아하게 되는구나. 클클)

영진공 노바리


ps. 로빈슨 마님의 그 능란한 ‘작업 기술’은 본받아 마땅한 교본감이다. 권위에 꼼짝 못하는 아이를 잘도 얼르다가 호통치다가 한다. 만세!! (이 영화 찍을 당시 앤 밴크로프트는 더스틴 호프만보다 불과 6살 연상이었다.)


ps2. 마이크 니콜스는 원래 연극감독이었다.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세트 안에서 배우들의 동선과 카메라의 위치 움직임이 확실히 연극적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마이크 니콜스는 연극이 아닌 영화에서 카메라의 앵글이 창출해내는 특별한 효과도 알고 있었고 이를 적절히 써먹고자 했다. “로빈슨 마님 다리에 갇힌 벤저민 샷”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샷 중 하나다.


ps3. 역시 ‘신인감독’ 마이클 니콜스는 젊구나.


ps4.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특별전과 시네바캉스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제가 본 날은 7월 21일 토요일 오후 다섯시 반이었군요. 일하다가 그대로 뛰어나가 영화보고는 다시 들어와 일을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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