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아메리칸 갱스터> – 미국식 자본주의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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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부터 간지 폭발.
(우리나라의 조폭영화들을 포함해) 갱스터 영화들은 그들이 속하고 있는 사회가 어떤 폭력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르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걸작’들이 갱스터 영화라는 틀을 이용해 그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폭로했으며, 나아가 그 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원리(즉 자본주의)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화하는지 고발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미국의 갱스터 영화들은 종종 미국이라는 거대 근대국가의 탄생부터가 철저히 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또한 지금의 ‘거대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얼마나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운용하는가를 고발하는 영화들이기도 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최근작 <아메리칸 갱스터> 역시 그러한 갱스터 영화의 미덕을 충실히 수행한다. 다만 이 영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기존의 영화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갱스터 영화들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놓인 자본주의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적 실천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인물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이것의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이른바 ‘기업 CEO 같은’ 갱을 보여주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마약 시장이라는 일종의 불완전 경쟁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가 기존 갱들처럼 총과 칼에 의한 협박과 살인과 갈취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기업활동’으로서 마약의 제국을 건설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생산자 직거래와 대량 구매로 원가를 절감하고 운송비를 절약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이로써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훨씬 좋은 상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이른바 ‘공급 경쟁’의 원칙을 구현해낸다. 이미 거대 기업의 체인망 확대와 대형화 등 후기 자본주의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던 60년대 후반의 뉴욕에서 루카스의 사업적(!) 스승인 범피 존슨(클레어런스 윌리엄스 3세, 이 캐릭터는 <코튼 클럽>과 <후드럼> 두 영화 모두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바 있다)은 이 후기 자본주의적 현상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루카스는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기업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결국 이런 대량 유통을 통해 시장의 절대 지배력을 장악하고 독점 공급자의 위치에 오른다.


애초에 지역 판매에 만족하고자 했던 그가 일종의 ‘전국 유통 대행’에 해당하는 계약을 맺고 판매처를 전국으로 확장한 것은 꼭 그의 사업적 야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시장 독점을 형성하게 된 것에 대해 기존의 마약 도매상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고(여기에 그의 피부색은 더욱 반발감을 가져왔다), 그는 이것을 돈 카타노가 이끄는 이탈리아 갱과의 제휴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굳이 마르크스의 탁월한 예견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후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독과점, 혹은 대형화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상표권 분쟁’도 겪는다. 애초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마크 제이콥슨의 기사 ‘거물의 귀환(The Return of Superfly)’를 읽어보면, 당시 헤로인은 루카스가 팔았던 블루매직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브랜드’를 달고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다고 하며, 마크 제이콥슨이 열거하는 브랜드만 해도 얼추 열 개가 넘는다. 다만 자신의 상표를 도용한 니키 반즈(큐바 구딩 주니어)를 찾아가 항의하는 프랭크 루카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나이브’한 인식을 갖고 있던 당시의 다른 이들과 달리 그가 현대적인 의미의 브랜드 마케팅에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인 안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사실 그가 10년이 훨씬 넘게 뉴욕의 뒷골목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본주의의 원칙, 특히나 미국에서 1960년대에 발흥한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충분히 인식하고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 추종자들이 ‘자본주의의 승리’라며 칭송할 만도 했던 이 모범적이고 능력있는 사업가 프랭크 루카스에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가 취급한 상품이 ‘마약’이었다는 사실뿐이다. 만약 그가 마약이 아닌 다른 합법적인 상품을 취급했더라면 흑인 최초의 거대기업의 CEO가 될 수 도 있었겠지만, 그가 범죄의 세계에서 마약왕이 된 것은 시대가 그의 인식을 뒤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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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형 갱스터 -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

한편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60년대에서 70년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기가 미국의 격동기였다는 사실은 프랭크 루카스를 좀더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어준다. 이 시기는 베트남전과 이에 대한 반대의 시위가 들끓으며 히피 정신이 널리 퍼지는 한편 격렬한 시민권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의 진짜 목적은 ‘석유, 고무, 주석’이었으며,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전이 뜻밖에 장기화를 겪으면서 전쟁 전에 회복했던 경기와 전쟁 초기에 누렸던 유례없는 호황이 장기적인 침체로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미국의 경제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피부에 느껴지는 경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를 위시해 갱들이 이끄는 지하 세계의 경제가 그만큼 활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랭크 루카스가 이끌던 암흑 경제는 베트남 종전 후에 불어닥칠 급격한 경기침체를 어느 정도 완만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한마디로 표현해 ‘언제나 전쟁으로 먹고 살았던’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 전에 있어서도 꼭 석유, 고무, 주석을 위한 군수물자 뿐 아니라 (비록 미국 정부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헤로인에 의한 경제가 되는 셈이기도 한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미국식 자본주의’, 나아가 ‘미국식 제국주의’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랭크 루카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미국의 암흑경제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틴 루터 킹과 말콤엑스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시민권 투쟁은 한편으로 흑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을 폐지하고 흑인 자신의 주체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편견과 차별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으로는 반감에 의한 편견이 오히려 더 강화될 수 있다. 루카스의 경우 물론 그가 범피 존슨의 사업철학을 따라 워낙 할렘가를 잘 챙겼고 또 한편으로 불필요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옷차림과 행동거지에 있어 워낙 수수한 검소함을 이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의식을 찾기 시작한 흑인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시민권 투쟁의 일련의 혜택을 입었을 뿐 아니라, 그가 흑인이기에 여전히 차별받는 바로 그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마약왕으로 암흑경제의 주축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흑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 편견 덕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인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지어의 경기장에 그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가장 좋은 좌석에 앉아 비로소 리치 로버츠의 주목을 끌었을 때조차도, 리치 로버츠는 그가 암흑경제의 바로 그 ‘거물’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표적이 된 것은 리치 로버츠가 비로소 편견을 버리고 사건에 접근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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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그림 뽑아내는 솜씨는 과연 예술.

아이리쉬 갱부터 이탈리아 갱(이른바 ‘마피아’), 그리고 흑인 할렘가의 마약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지하세계를 주름잡았던 갱의 계보에 수많은 전설적인 갱들이 있었음에도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갱스터’라는 보편 명사를 쓴 이유는, 아마도 프랭크 루카스가 보여준 행적이야말로 지극히 현대적인 미국의 후기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의 윤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지금 미국이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영토는 프랭크 루카스 시절의 뉴욕 할렘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미 FTA를 들먹이는 건 분명 ‘오바’이지만, 영화의 제목에서 American의 n을 떼고 그 자리에 쉼표(,)를 붙여보는 장난을 쳤을 때 도출되는 새로운 의미에 새삼 한기를 느끼는 것은 그리 ‘오바’인 것 같지 않다.


영진공 노바리



ps1. ‘화목한 가정의 범죄자’와 ‘가정이 파탄난 형사’의 구도는 누아르 영화에서 꽤 오래된 농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한발 더 나간다. 추수감사절, 루카스네가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한 추수감사절 파티를 벌이는 장면 바로 뒤에, 콘플레이크를 뿌려 혼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리치 로버츠의 모습이 붙는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이 바로 뒤에 붙는 트루포 형사의 모습. 리치보다도 더 초라하게 혼자 밥을 먹던 그는 산 칠면조와 폭탄 선물까지 받는다.


ps2. 단순한 대화장면마저 박진감 넘치는 리들리 스콧씩 화면 짜기. 주인공 클로즈업만 잡았다 하면 화면이 썰렁해지는 한국영화들을 보다가 이 영화를 보니 눈이 다 맑게 씻기는 듯한 느낌이다. 두 사람의 대화 씬에서 액션-리액션-액션 씬으로 끊어지는 컷들을 잘 만들기 위해 한국 감독들과 배우들은 제발 이 영화의 대화 씬들을 면밀히 연구해 보시기 바란다.


ps3. 덴젤 워싱턴, 아주 신이 났더라. 하긴 그가 이제껏 지나치게 모범적인 이미지로만 나온 것도, 뒤늦게야 비로소 악당 역으로 선회하면서도 퍽 조심스러웠던 것도 그에게 ‘흑인 이미지 전체’에 대한 막중한 부담과 책임감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야심이 있는 이라면 지독한 악당 역을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인데, 그간 덴젤 워싱턴이 그토록 모범적이고 반듯한 역할만 해오면서 ‘너무 모범생 이미지’ 소리 들었던 것도 결국은 흑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 때문이고, 배우 본인은 정작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나 싶다. 이 영화에서 너무 신나서 완전 날아다니는 덴젤 워싱턴을 보노라니, 이 배우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새삼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리들리 스콧, <아메리칸 갱스터> – 미국식 자본주의의 단면”의 6개의 생각

  1. 덴젤워신턴 악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트레이닝 데이를보세요.

  2. 개인적으론 덴젤워싱턴보단 리치가 외롭게 투쟁하는 모습이 더 인상깊었다죠 ㅋ 전 영화중반까지 백만달러를 신고한것때문에 따당하는 줄 몰랐어요 ㅋ 경찰이 그렇게 부패해있었다니 ㅋ

  3. brett / “뒤늦게야 비로소 악당 역으로 선회하면서도 퍽 조심스러웠던 것도”

    < 트레이닝 데이>을 시작으로, 덴젤 워싱턴이 악역이나, 악역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히 타락하거나 껄렁한 역할을 맡은 영화들이 꽤 됩니다. 일례로 < 인사이드맨>에서의 역할도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닳고 닳은 껄렁한 형사 역할이었죠. (과거 < 본 콜렉터>나 < 펠리칸 브리프>, < 크림슨 타이드> 같은 영화에서 줄곧 맡았던 올곧고 정의감 넘치며 모범적인, 덴젤 특유의 캐릭터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역할 역시 ‘악역’까진 아니어도 덴젤에겐 꽤 모험적인 캐릭터 선택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런 역할들의 연기에 대해 물론 기술적인 완성도야 뛰어나긴 해도 관객들의 심리적 저항감도 꽤 있었고 배우 자신도 좀 엉거주춤해 하는 면이 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아메리칸 갱스터>에 와서야 악역 연기 중에서도 최고의, 덴젤이 원래 갖고 있는 퀄리티의 연기를 신이 나서 보여주었다는 의미로 붙인 게 ps3입니다.

  4. 핑백: Who is DArk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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