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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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제목, 그러나 어울리는.


작년 초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시나리오 상의 영화는 지금 완성된 영화와는 아주 약간 뉘앙스가 달랐습니다. 내용도 거의 다르지 않고 현재 홍보 역시 ‘아줌마’를 키워드로 잡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시나리오로 읽었던 영화는 좀더 ‘막장 인생의 마지막 비상의 화려함’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승부와 상관없이, 나도 가치있는 인간이며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달까요. 완성된 영화 역시 이것을 강조합니다만, 그보다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승부차기 골에 실패하고 승부가 결정된 순간 아쉬워하며 주저앉고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들의 모습 때문인지, 죽도록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하는 비장미 쪽이 더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실 시나리오 상으로는, 미숙(문소리)이 승부차기를 막 던지고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은 채 막바로 무지화면에 “이 날 핸드볼 팀은 결국 은메달을 땄다”는 자막이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돼 있었습니다. 그 시나리오에 그토록 흥분하며 눈물을 쏟았던 것도 바로 그 엔딩 때문이었는데, 전 지금도 이 엔딩이 지금의 엔딩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 대중영화로서 그리 친절한 엔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델마와 루이스> 같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에서도 영화사에 길이 남는 특별한 엔딩을 본 적이 있는걸요. 이 영화가 그 앞에서 계속 고양시켜 왔던 흥분은 이기느냐 지느냐, 전세계 최고가 되느냐, 금메달을 따느냐를 이미 초월한 것이었고, 안승필(엄태웅)도 힘주어 말하듯 이기든 지든 그 순간은 그들에게 ‘최고의 순간’이라 붙여도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투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전 정말로 이 영화가, 우석훈 박사의 논의를 빌면 누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었던 X세대에 속하면서도 ‘여성’이기에 혹은 대졸이 아니기에 이미 88만원 세대보다 일찍부터 88만원 세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지금의 30대 초중반 여성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또 그들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술자리에서 뵌 심재명 대표에게 흥분해서 ‘이 영화의 존재가 너무 고맙다’고까지 말을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오히려 패배감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게 현실이지 않냐고요? 하지만 같은 패배라도 장엄하고 숭고한 패배가 있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패배가 있는 법입니다. 패배의 역사를 오히려 승리로 전화시켰던 <판의 미로>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노동계급을 위한 판타지’라는 건 그저 우울하고 절망적인 패배도, 손쉽고 ‘우기기’에 불과한 승리도 아닌, 이렇게 당당하게 근거를 가진 아름다운 패배의 승리로 수놓아져야 마땅합니다. 가장 모범적인 예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저 하늘 높이 비상하고, 형과 아버지가 객석에서 눈물어린 박수를 치는 마지막 장면이며, 위에서도 언급했듯 <델마와 루이스>의 아름다운 우정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뭐, 시나리오 상의 설정은 실제 영화를 찍으면서 바뀌기 마련인 거고, ‘책’ 상태를 가지고 지금의 영화가 어때야 했다 저때야 했다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한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과 화합입니다. 우리는 크게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의 갈등, 혜경과 승필의 갈등, 그리고 노땅그룹과 신진그룹의 갈등을 목격하며, 비인기 종목이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당연히 메달 따와야 하는 종목인 핸드볼을 하는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환경의 갈등을 봅니다. 미숙과 혜경, 혜경과 승필을 잡는 카메라는 매우 고집스럽게도 각 인물들을 각각의 프레임에 가둡니다. 바닥을 닦고 있던 혜경과, 승필로부터 혜경이 돈을 마련해준 것이란 사실을 듣고 혜경에게 온 미숙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 두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잡는 컷이 없습니다. 한 컷에 한 인물씩 장면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들이 비로소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잡히는 건, ‘가출했던’ 미숙이 다시 선수촌에 돌아와 혜경과 훈련을 같이 하는 장면부터입니다. 혜경과 승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선수촌을 나가는 혜경을 잡기 위해 왔으면서도 잡는 말을 못 하는 승필과 혜경을 차 안에서 함께 잡는 씬이, 비로소 처음으로 두 인물을 한 화면에 잡는 장면입니다. 이런 식의 구성 방식은 분명 각 인물의 고립감과 고독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컷과 컷이 매우 단조롭다는 느낌, 그리고 화면 안이 상당히 비어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문소리와 김정은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런 단독 컷들을 다 채울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각자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이런 프레임이 과연 좋은 프레임인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이 씬 구성에 굉장히 놀랐어요. 너무 어설퍼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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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임순례 감독은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추락하는 인물들을 통해 더없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풀어냈지만, 그가 정말로 재능이 있는 분야는 코미디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애초 그를 주목받게 해주었던 단편 <우중산책>에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만든 단편 <그녀의 무게>(인권영화인 <여섯 개의 시선>에 수록돼 있습니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남자였고, <우중산책>과 <그녀의 무게>의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건 단순히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성별이 가지는 섬세함과 디테일함의 표현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애초 장르 자체가 코미디인 건 아니지만 영화 내내 굉장히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웃음을 안겨주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의 그 생동감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합의 드라마에 대한 낙천적인 시선의 디테일 묘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임순례 감독은, 여성을 묘사하는 데에 더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한다는 얘기지요. 사실 같은 영화 안에서도 승필에 대한 묘사는 좀 상투적인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신진그룹 선수 중 하나가 “지들끼리 다 해먹으라 그래”라는 대사를 하는데, 저는 이게 무척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미숙과 혜경이니 만큼, 우리는 ‘노장의 나이에도 열심히 뛰며 심지어 젊은 선수들을 압도해버리는’ 그녀들에게 손쉽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만, 미숙과 혜경의 존재는 한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야 할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미숙과 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생활을, 경력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암울한 현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노련함과 연륜으로 젊은 선수들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신진 선수들을 휘어잡는 것을 무턱대고 응원만 하기엔 마음 한 구석이 어두운 것도 사실이네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미숙과 혜경의 사정 역시 매우 절박합니다만, 이것이 젊은 선수들의 앞길을 막고 뺏으면서까지 해결돼야 하고 응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를 화두로 잡게 된 저로서는, 특히 감독대행에서 곧장 선수로 다시 위치를 바꾸는 혜경의 선택이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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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이 맞닿은’ 게 진짜 뽀인트. 핸드볼은 단체경기라니깐요.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마지막 결승전이네요. 전 당황스러웠던 게, 이 영화가 본경기가 끝났고, 동점 상태에서 첫 번째 연장전,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두 번째 연장전, 그리고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승부차기로 가는 그 긴박감과 박진감이 완전히 지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 전반전인지 후반전인지, 첫 번째 연장전인지 두 번째 연장전인지, 아나운서의 해설 멘트를 통해 정보를 주는 건 매우 진부한 수법이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긴장감을 계속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는 코트 안에서 선수들을 따라잡는 데에 바빠서 그런 식의 정보를 그리 명확히 주고 있지 못하고, 응당 필요한 긴박감 조성에도 실패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예정돼 있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기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설마 영화를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 경기를 모두 TV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승패와 화려한 경기보다 각 캐릭터들의 감정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그 감정의 스펙터클 역시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을 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역시 장면 구성에 있어 실패한 씬이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제발 ‘흥행감독 임감독’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빌었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진 듯합니다만, 뭐랄까, 임순례 감독의 굉장한 강점과 매력을, 한계와 함께 봐버린 듯해서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근간에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응원과 지지를 받아야 할 영화라는 사실은 여전합니다. 이 영화가 시도한 새로운 도전들과 그 도전들을 감내한 용기들(여러 모로 ‘장사 안 될’ 소재들을 갖고 보편적인 감동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이 영화는 선취해 내고 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

“임순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한가지 생각

  1. 잘 읽었습니다. 전 < 슬램덩크>에서 이미 최고의 “내 생애 최고의 순간” 묘사를 보았다고 생각하기에…이 영화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보긴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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