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대니 보일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헐리웃에 진출해서 만든 <인질>(1997)과 <비치>(2000), 두 작품도 모두 좋아합니다. 두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고 이후 대니 보일 감독은 헐리웃을 떠나 조용히 영국으로 돌아왔죠.
당시 세간의 평가는 단순히 대니 보일 감독이 헐리웃 진출에 실패했다는 거였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궁합이 잘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게 되었죠.
<127시간>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력의 영화 감독 대니 보일의 9번째 장편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이후 여기저기에서 많은 연출 제안이 들어왔을텐데, 대니 보일 감독의 선택은 아직 다뤄보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훨씬 단촐한 규모의 프로젝트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메인 이벤트라는 건 고작해야 좁은 협곡 사이에 갇혀서 괴로워하다가 죽기 직전에 이르러 마침내 빠져나왔다는 것이 전부이고,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는 완전한 예상 밖의 전개가 숨겨져있는 작품인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정중동(靜中動)의 영화라고 할까요.
한쪽 팔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인공 애런(제임스 프랭코)의 조용한 사투와 감정적인 변화의 향방를 면밀하게 따라나서는 작품이 <127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애런이 조난을 당한 이후 구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조난 당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여행 계획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캠코더로 유언을 남기는 중에 어머니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던 자신의 무심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영화는 애런을 구원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애런이 알고 지냈던 다른 사람들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비록 연락을 닿을 수는 없지만 그들과 만들었던 추억과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의지가 애런으로 하여금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지요.

특히 화장실과 같이 비좁은 장소에서 다채로운 아이디어로 스펙타클한 비주얼을 잘 만들어내곤 하는 대니 보일 감독의 재능이 이토록 작고 비좁은 영화에서도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