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발보아, “과욕이 부른 주책” <영진공 70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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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y is Back!
과욕의 주책인가, 아름다운 투혼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당혹스러움은 아마도 내가 아주 젊은 나이도 그렇다고 4, 50대의 장년층도 아닌 나이이기 때문이리라. 한 인간으로서,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 안에 열정과 야수를 품고있고, 그렇기에 그 열정을 좇아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추락하는 남자와는 또다른, 건강한 땀냄새와 활활 타오르는 열정, 더욱이 그것이 인생의 비애와 슬픔과 고통, 좌절과 소중한 순간의 고귀함과 기쁨을 아는 자가 신중하게 태워나가는 열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록키를 보며, 씨네21에 실린 한겨레 김은형 기자의 ‘노추’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내 곰씹고 당황했던 건, 록키의 크루(crew)에 속해있던 록키의 아들, 록키 주니어와, 마리의 아들 스텝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자. <록키 발보아>는 아주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이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그러나 점점 메인 무대에서 밀려나가는 사람이 그 안정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의 열정을 발산하기 위해 새삼 성실하게 노력하고, 다시 한번 도약하는 이야기이다. 벌써 여섯번째에 달하는 속편이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경이롭다. 속편답게 전편들의 화면을 매우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면서도,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아주 짧은 커트로만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적재적소에서 과거 록키 시리즈의 팬들에게 충분히 향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세월이 가져온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매우 훌륭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클래이맥스인 메이슨과 록키의 경기 장면은 복싱영화들 중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연출되어 있다. 일단 경기 시작을 위해 양 선수가 입장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을 마치 TV를 통해 중계 화면을 보듯 연출하면서 이 경기에 열광하는 관중들(실제 경기장의 관중들뿐 아니라 TV 앞에 모여있는 시청자들까지)의 모습을 하나로 연결한 것은 곧 세대와 장소의 구분, 세월이 가져온 변화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는 스크린 밖에서 16년만에 록키 시리즈의 새 속편이 개봉하면서 옛 팬들과 새로운 젊은 영화관객들이 한 스크린 앞에 앉는 현실의 모습과도 그대로 겹친다. CG 효과와 카메라 앵글의 시점을 적절한, 이러한 TV 중계화면과 같은 효과는 경기의 2라운드까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는 물론 경기를 지켜보는 구경꾼으로서의 시점이며, 두 선수의 전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매우 객관적 위치에서의 시점이다. 그러나 3라운드로 가서부터는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링 안에서 록키와 메이슨을 따라잡으면서 복싱 메인 경기의 박진감과 파워풀한 힘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장면들에서 쓰인 여러 가지 화면 트릭들은 깔끔한 편집과 함께 대단히 효과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러면서도 관객을 아주 빠르게 경기에 몰입시키는 한편 록키의 관점으로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카메라는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분명 외부에 존재하는데도, 철저하게 록키의 시점샷인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록키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이는 단지 내레이션의 사용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내레이션은 거의 마지막 라운드, 록키가 쓰러질 무렵 단 한 번 삽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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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왜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는가? 노익장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과정에 있어 자신의 친아들 및 아들뻘(혹은 손자뻘)의 인물을 철저히 자신의 응원자 위치로 내려보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잔뜩 주눅들어있었던 록키 쥬니어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심지어 직장도 때려치고는 (관중석이 아니라) 록키 바로 뒤에서 팀원으로 등장하는 것이라니? 게다가 마리의 아들 스텝마저 이 꼴로 등장한다. 젊은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뒤에서 수발들고 응원하는 자리로 기어들어오게 만드는 아버지란, 아무리 겉으로 친절하고 다정할지 몰라도 자식의 인생을 끝까지 틀어쥐고 흔드려는 과욕과 폭압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록키 발보아가 김은형 기자의 지적대로 ‘노추’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책’같은 말로도 부족하다. 스탤론도 조금은 쪽팔리는 게 뭔지 알았던지 경기의 승패를 판정에서 결국 록키가 지는 걸로 설정해놓긴 했지만, 만약 경기마저 이기는 것으로 설정했다면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다 스크린을 향해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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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싶냔 말이지... 왼쪽이 스텝, 오른쪽이 록키 주니어.


가뜩이나 사회가 무한경쟁화 하면서 젊은 아이들이 취직을 못 하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그런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는 자립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그 나약함을 성토하고 꾸짖는 것까지야 기성세대의 특권이라 인정해준다 쳐도, 자식 길을 틀어막고는 기어코 자신의 들러리 세우는 부모라니, 젊은세대를 자기 기리 가도록 응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영광에 봉사하고 응원을 바칠 것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기성세대라니,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결코 감동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건 보수를 넘어서 ‘수구’라고 부를 만하다. 아무리 그게 ‘아버지들의 판타지’라 해도.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나도 지금의 20대를 위해 내가 어떤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무얼 남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과연 나는 록키를 보며, ‘나도 록키처럼 나이 먹어도 내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며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내 앞에 길을 막고 서서 자신에게 영광을 바칠 것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가랑이 밑을 언제까지 기고 있어야 할지를 걱정을 해야 하는가. 그게,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느낀 당혹스러움의 정체다.


ps. 영화에 대한 불쾌감과는 별개로, 엔딩타이틀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올라 섀도 복싱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클립은 30년에 걸친 한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아주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상벌위 선도부 위원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마티 영감님, 축하합니다. ^^ <영진공 70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8일

‘뒷북 전문’ 아카데미 시상식이 이번에 마틴 스코시즈 감독에게 상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바다.  마티 할아범의 필모그래피는 숱한 ‘시대의 명작’과 ‘평범한 감독의 걸작보다 뛰어난 범작’들로 꽉 채워져 있다. 한국의 박스오피스에서 마티 할아범의 영화가 그닥 통하지 않았던 건, 그의 영화가 지독히도 미국적인 정서, 특히나 대체로 단일 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인들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다민족 이주민들로 구성된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기반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마티 영감님의 범작 <갱즈 오브 뉴욕>에서 서로 대립하는 집단의 정체성과 차이, 혹은 아이리쉬 어메리칸의 수난과 전투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한국관객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미국 땅에 이민온 다양한 출신의 이주민들이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 어떤 반복과 화해를 거듭해오며 미국의 역사를 구성해 왔는지,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솔직히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이것을 알면 <갱즈 오브 뉴욕>이, 또한 숱하게 많은 미국 영화들이 좀 다르게 보인다. 그 이전 마틴 스코시즈의 초기작들 역시 마찬가지. 물론 <분노의 주먹>이나 <택시 드라이버> 같은 영화를 보는 데에 ‘이태리 이주민’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굳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알면 보이는 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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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까지 <디파티드>가 휩쓴 것을 두고 말이 많다. 물론 마티 영감님을 사랑하는 팬으로서는, 그가 수상한 작품이 필모그래피에 가득한 그 무수한 명작들이 아닌 <디파티드>라는 사실에 조금 씁쓸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아카데미가 ‘뒷북 전문’인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 이에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마음 상할 이유도 없다. (마티 영감님 말고도 숱한 거장과 장인들이 최고작이 아닌 범작으로 상을 받곤 했다, 그것도 아주 늦게.) <디파티드>는 미국에서 평단과 흥행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어쩌면 이번 수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디파티드> 같은 졸작에 작품상을 주다니 역시 아카데미는…”과 같은 의견을 보며, 조금 기분이 우울해졌다.


물론 원작이었던 <무간도>가 훌륭한 영화였던 것은 사실이고, 또한 이미 <무간도>를 본 관객의 입장에선 <디파티드>의 흠결이 더욱 크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의 리메이크인 이상 두 영화를 비교하게 되는 건 인지상정으로 당연한 일이다. 나는 <무간도>가 <디파티드>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의견도 수긍할 수 있고 <디파티드>가 마티 영감님의 영화론 후지다는 의견도 수긍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과 소통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며, 관객이라는 집단은 다양한 맥락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천하의 걸작이 다른 동네에 가서 쓰레기가 되는 건 분명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 <디파티드> 감상문에서도 의견을 피력한 바 있지만 <디파티드>가 그토록 (절대적으로, 영화 미학적 측면에서) 후진 영화인가, 그토록 졸작인가, 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그런 졸작’ 운운하는 소리 앞에서 <디파티드>가 지나치게 부당한 폄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비슷한 줄거리를 공유하고 있다 해도, 두 영화는 접근하는 방향과 입장, 그리고 주제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디파티드>가 거장의 범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평범한 감독들의 범작/걸작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근거는 이미 감상문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한국인을로서는 쉽게 이해가 안되는(그리고 굳이 이해해야 할 당위가 있는 것도 아닌) 미국식 사고에 기반한 영화를 만드는 마티 영감님이 쉽게 이해가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런 미국식 사고가 익숙한 것도 아니며, 그렇기에 그의 영화를 100%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향한 미국 내에서의 환호가, 단순히 ‘훌륭한 영화(<무간도>)를 못 봐서인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 마티 영감님을 ‘그렇고 그런 흔한 헐리우드 감독 중 한 명’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관객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한,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넘치고 넘치는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나의 냉소가 갈수록 짙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마티 영감님의 영화가 한국에서 오해되건 말건 어차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티 영감님한텐 별 상관이 없는 일일 터이고, 사람들이 마티 영감님에 대해 저토록 오해한다 하여 내 애정에, 혹은 마티 영감님이 가진 굳건한 명성과 성취에 금이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 어쩌면 이 글의 본질이라는 것도 실은 ‘니들이 뭔데 마티 영감님을 욕해!’에 불과할런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틴 스코시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을 받을 만했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그저 멀리서 작은 축하를 드릴 수 있다. 마티 영감님, 진심으로 축하해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의 영화를 보여주세요.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태풍”에 대한 소회

재외공관소식
2007년 3월 6일

영화 평론가는 여간해선 새로 나오는 영화를 칭찬하지 않는다. 평론가란 으레 까대는 사람이라 생각해서일게다. 그러다 그게 흥행에 성공하고, 그와 장르가 비슷한 또다른 영화가 나오면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전범이라고 할 <천왕성의 꿈>이 보여 준 신선함과 참신성, 그리고 새로움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한 채 줄거리만 답습한 한심한 영화다.”

감독으로 주제를 바꿔도 그건 마찬가지다. 봉준호 감독이 <플란더스의 개>를 만들었을 때 평론가들은 별의별
용어를 다 써가며 영화를 까댔는데, 그가 <살인의 추억>을 만드니까 첫 번째 영화는 아주 좋았는데 거기서 보여준
장점을 이번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봉준호의 항변이다.

“내 참, 그렇게 좋으면 개봉했을 때 얘기 좀 해주시지, <살인의 추억> 찍고 나니까 그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 분들 보면 얄미워 죽겠어요…그런 사람들 <플란더즈> 때는 다 어디 가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다행히 <살인의 추억>은 기록적인 흥행을 함으로써 평론가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지만, 그들은 그런 실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먹이감을 찾아 나선다.

게다가 그들은 객관적이지도 못하다. <괴물>을 그다지 재미없게 본 나는 왜 그들이 그렇게 괴물을 띄워줬는지 잘
모르겠는데, 짐작가는 이유라면 그때가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던 시기였기에 <괴물>을 스크린쿼터를 지키는 상징적인 존재인
양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 영화가 1300만을 동원하며 신기록을 세우는 걸 보면서 평론가들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

<태풍>을 봤다. 당시 평론가들 은 이 영화에 대해 가혹한 린치를 가했고, 그 바람에 난 극장에서 못보고
이제야 DVD로 봐야 했는데, 보고나니 난 이 영화가 왜 그렇게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제작비를 많이 써서?
마초적 영화라서? 어느 분이 글로 쓴 것처럼 거기 담긴 이념이 촌스러워 그랬다고 치자.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영화는 없다고. 반공이나 막시즘처럼 거창한 이념만 이념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소시민 이데올로기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어떤 이념을 담았냐가 아니라, 그 이념을 얼마나 잘 포장해서 관객에게
내놓았냐는 것, <괴물>의 성공도 반미와 반정부라는 낡은 이념이 담겨서가 아니라 그걸 비교적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재미있게 관객에게 제시해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은 민족이나 국가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무조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모든 사람이 그런 영화만 만들면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고 해서 나쁠 게
뭐가 있담?

상벌위원회 부국장의 상념
서민(bbbenji@freechal.com)

테렌스 맬릭, <천국의 나날들> <영진공 69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7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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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디인가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였다가 왕에게 빼앗기고 되찾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천국의
나날들>은, 현대의 미국(아마도 대공황 시기)을 배경으로 날품팔이로 떠돌 수밖에 없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직 어린
그들의 자식같은 동생의 여정을 따라간다. 도시 빈민들이 대단위로 집없이 떠돌며 하루의 빵을 위해 일을 하고, 대농장엔 떠돌이
일꾼들이 한철노동을 하고 또 이동을 한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고대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서의 여러 규칙과 금기를 강조하는
교훈적 기능을 한다면, 현대, 특히 근대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인 위기를 맞았을 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가진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테렌스 맬릭은 <천국의 나날들>을, 단순히 한 여자를 두고 “뺏으려는” 탐욕스러운 대지주와 “뺏길
수밖에” 없는 착한 빈민노동자의 도식적인 대립을 다룬 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테렌스 맬릭은 이들의 신분과 계급과 존재의
본질마저 갈라버리는 ‘소유’라는 것이 대상으로 하는 것, 즉 땅과 자연이 가진 본질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자를 욕망하는 두 남성
– 농장주(샘 셰퍼드)와 빌(리처드 기어) – 의 공통적 속성을 끄집어낸다. ‘사랑’과 ‘결혼 제도’를 통해 여자를 소유하려는
남자들의 욕망은 소유와 독점욕과 경쟁과 질투로 분출된다. 자연을 여성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상투적인 상징이지만, 인간에게
곡식과 쉴 곳과 풍경을 제공하면서 계급을 가르고는, 이를 다시 비웃기라도 하듯 모진 재앙을 안겨버리는 자연은 인간이 결코 정복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희망없이 부유하는 삶에 살아갈 이유와 힘, 그리고 웃음과 쾌락을 주는 여인 – 애비(브룩
애덤스)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위태한 긴장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긴장과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욕망하는 주체들의 선택이다. 메뚜기
재앙이 과연 아무짓 안 한 인간에게 어쩌다 찾아온 자연의 재앙일까? 조용히 자기 삶을 사는 남자들을 여자가 휘저어 놓으며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단 말인가? 아니, 우리는 또렷한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 행복 속에서 장차 다가올(지도 모르는)
재앙을 두려워 하며,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 마치 뒷통수를 때리듯 재앙이 혹은 변화가 찾아왔을 때 그 앞에서 당황하고 절망하면서
결국 무너져 버리거나, 다시 일어나 맞서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선택을 할 뿐이다. 우리는 주저앉아 그러한 재앙을, 변화를
원망하고 마음아파할지언정 그 대상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거나 떠날 수는 없다. 떠났다가도 되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것이 옳은
방식이건 아니건 욕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 품에 다시 안길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리고 그 품이 주는 때때로의 행복에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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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으로 물들다

그리하여 매직아워 때의 촬영을 고집했다는 테렌스 맬릭이 네스토 알멘드로스의 카메라와 손과 눈을 빌어 그려내는 초원의,
들판의 황금빛과 해저무는 하늘빛, 그 하늘에 물든 구름은 극도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고, 심지어 메뚜기 떼가 덮쳤을 때조차 황금빛
화염이 불타는 한밤중의 밀밭에서 실루엣으로 움직이는 인간들의 사투 장면도 장엄할 수밖에 없다. 누더기를 입었든 결이 촘촘한 고운
쉬폰 드레스를 입었든 애비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 전투를 안팎으로 목격한 린다(린다 맨츠)는, 농장에서의
생활을 ‘한철 잘 논 것’으로 여기고, 문명을 체계적으로 학습시키는 ‘학교’를 떠나 다시 방랑의 길에 오른다. 부모도 아닌
오빠/언니의 세대와 연이 단절된 채, 끝없이 남자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그에게서 버림받는 친구와 함께.

ps.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공간,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는 것에 감사.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그 어느 때
좀더 커다란 화면과 좀더 좋은 사운드 시설로, 좀더 좋은 의자에서, 확고하게 ‘자기 집’을 마련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70mm면 더 좋겠지.
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김언수, <캐비닛>

재외공관소식
2007년 3월 2일

재미있다. 조각 조각 짬짬히 시간 내서 읽었는데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이틀만에 먹어버린 것 처럼 아쉽기만 하다.

처음엔 그냥 ‘기발하네’하는 느낌으로 읽다가
대단한 문장력과 유머감각과 표현력을 마주대하고는 대책없이 지하철에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중간 중간에는 ‘나도 비슷하잖아.’하는 자기연민에 빠져들기도 했다.
거기 나오는 기발한 것들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뛰어 넘고!

작가의 당선소감마저 맘에 들고, 인터뷰 내용마저 맘에 든다. 작가는 ‘겸손을 가장한 오만’을 떨지 않고 진짜 겸양의 말을 한다.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게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 올려라.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 해주어라.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고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이 소설 붕어빵, 호빵, 자장면 몇 그릇 이상으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줬다. 그래서 스포일러 안 밝히니, 사서 읽으시라고 권한다.

능청스러움과 창의력 게다가 그 안에 문학적 진실을 담아내는 능력까지 있다.
워낙 찬사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기에 거기에 나까지 첨언해 가며 굳이 그 대열에 동참할 필요는 없겠지만, 정말 재미있다.

제일 좋았던 건 lively하다는 점이다.
왕가위 영화에 나오는 양조위처럼 우울함과 도시인의 외로움을 쥐어 짜내는 소설들이 가득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 , 말도 안되는 상황과 기기괴괴한 설정 속에 동분서주 하면서도 마냥 웃을수 만은 없는 페이소스를 가득 담은 주성치 같은 호올오~ 도도한 소설이다. (에이 비유가 왜 이래)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라이(ley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