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과학대 이야기” <영진공 71호>

구국의 소리
2007년 4월 3일

어제 이송희일 감독 홈페이지에서 아래 게시물을 보고, 너무 속상해서 한참을 울었다. 이건 기막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

http://gondola21.com/bbs/zboard.php?id=fre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86

그리고 오늘, 경향신문 기사.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32&article_id=0000215658&section_id=102&section_id2=251&menu_id=102

이 친구들아.
한 달 70만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어
절박한 마음으로 저항하는 너희 어머니들에게
저렇게 마주 서서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고 나니 공부가 잘 되더냐.
아니, 마음이 편하더냐.
너희 대부분은 노동자의 아들 딸일 거다.
너희들도 졸업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되어 살아갈테고
그 중의 상당수는 딴세상 얘기처럼 여기고 있을 ‘비정규직’일 거다.
허리 굽혀 너희 발밑을 쓸고 닦는 저 분들만 노동자가 아니라
양복 입고 출근해서 70만원의 몇 배가 되는 월급을 받아가는
너희가 그리고 있을 미래의 모습도 결국, 노동자다 얘들아.
너희 존재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다고 쳐도
적어도 측은지심이란 게 있었다면 이렇게까진 할 수 없는 거다.
시끄럽다고만 생각했겠지.
그깟 몇 푼 안 되는 일자리에 목숨 걸고 소리 치고
알몸까지 되어가며 악을 쓴다니 어이없다고 생각했겠지.
얼마나 절박하면 그랬던 것일까 가늠해보지는 않았겠지.
무슨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해서
그래서 대체 뭐가 될 생각인지?

카툰돌격대의 분노
도대체(http://dodaeche.com)

<일루셔니스트>, “예술 – 테크네와 프시케 사이” <영진공 71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7년 4월 2일

예전에 이야기한 대로 일루셔니스트 감상평 올릴게. 물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어서 이번에도 영화를 보지 못한 횽아들은 백스페이스를
누르라고 말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의외로 일루셔니스트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횽아들이 좀 많아서 차라리 메타포들을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 사실 이 영화의 반전이라 봤자, 유주얼 서스팩트를 답습하는 정도니 오히려
반전을 기대했다면 별로 영화가 재미없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 그래서 반전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는 한에서 메타포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으니 봐도 좋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버네버 작은 스포일러도 싫은 횽아들은 요기까지~

1.기술과 예술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 알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유명한 말.

근데 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하필이면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걸까? 사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술이었어.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이게 왜 예술이라고 번역이 되었냐 하면 근대 이전에는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딱히
없었거든. 요즘에야 그런 구분이 명확하지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도끼 한 자루를 만들어도 쓰기 좋게 잘 만들면 그건 예술품
취급을 받았어. 그리스어로 그런 예술과 기술을 아우르는 말이 테크네(techne)야. 정확히 말하면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술(術:techne)는 길다”였어. 히포크라테스에게는 의술이 곧 예술이었던 거지.

그런데 근대에 와서 사물끼리의 모든 질적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수량과 금전적 가치에 의해서만 판단되면서 예술과 기술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맞이하게 되는 거야. 맥도날드 햄버거를 생각해봐. 다른 패스트푸드도 마찬가지고. 어떤 음식도 잘 만들면
예술의 경지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속도와 수량, 그리고 이윤의 크기를 고려해서 철저하게 제작되는 음식들은 절대로 그런 예술성을
획득할 수 없어. 그냥 어떤 이미지의 복제품일 뿐이지. 그건 오리지널 햄버거가 아냐. 오리지널 햄버거를 모사한 햄버거 비슷한 그
어떤 것일 뿐이지. 요즘 모든 음식들이 그렇잖아?  비니니 우유에는 바나나 과즙이 없어. 바나나 맛을 내는 향료가 있을 뿐이지.
이게 바로 현대의 조건이야. 진짜가 없는 가짜의 세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복제의 세계(이건 프레스티지에서도 한 번
언급했었지?) 엔디워홀의 통조림 그림 같은 팝아트는 현대의 이러한 속성에 주목한 예술이야. 키치말야.

2. 영화의 위치

그런데 현대의 그런 예술과 기술의 괴리 속에서 한 특별한 예술의 형태가 태어났어. 처음에는 단순히 기술에 불과했고 또, 그
기술을 이용해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저급한 상업수단에 불과했지만 곧 대중예술의 총아가 되어버린 것. 바로 영화였지.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영화는 예술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곧 대중예술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 일루셔니스트는 처음 아이젠하임의
유년기를 무성영화 초기의 질감으로 표현하는데서 암시하듯이. 이런 근대 이후의 예술, 특히 영화의 존재조건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어.

3.근대의 조건

프레스티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근대화의 시대였어. 영화에서는 근대화의 화신 같은 인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가
나오는데, 영화 속에서 그의 말과 행동은 모더니티의 특징들을 아주 잘 드러내주고 있지. 1.봉건적 관습과 사고 방식을
경멸하고(황제에 대한 반란획책), 2.세상에 존제하는 모든 현상을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매우
지적이고 지배욕도 강하지. 그의 방으로 통하는 길은 수많은 사슴과 동물들의 박제로 장식되어 있어. 한때는 살아있었던 생명들을,
죽은 것으로, 자기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재화로 만들려는 노력. 마술의 신비를 과학적 설명으로 치환하여 죽어있는, 생기를
잃어버린 따분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이 장면을 떠올려, 설마 영화를 위해서
진짜 박제를 동원한건 아니겠지? 후덜덜) 바벨에서도 일본인 소녀의 집에 있었던 사슴 박제가 기억나지? 이런 사냥꾼과 박제의
이미지야 말로 조금은 상투적이 되어버린 근대 탐험가, 정복자의 이미지지. 이것이 바로 소유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근대, 자본과
제국주의의 논리였어. 황태자는 황제가 이끌던 늙은 봉건제국을 전복시키고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근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차
있었지. 그가 단순히 자신의 권력강화의 일환으로 폰테쉔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듯이, 그에게는 사랑도 신비의 대상이 아니었어.  

4. 예술, 혹은 영화의 역할

그에 비해 아이젠하임은 전통 가구공의 자식이었어. 그들은 아직 산업화되기 이전의 장인들로 예술과 기술이 분리되기 이전의
사람들이야. 장인은 기술자와 예술가를 모두 아우르는 호칭이었어. 아이젠하임이 마술을 접하게 된 이야기가 영화에서도 그려지고
있는데, 의미심장한데가 있어. 노인은 일정한 주거가 없는 떠돌이 마술사였고, 나무의 환상도 같이 가지고 다녀. 그가 사라지자
나무도 같이 사라지지. 나무는 보통 신화에서 옴팔로스, 즉 세계의 중심에서 신비나 천계로 통하는 관문을 상징(재크와 콩나무,
단군신화, 싯달타의 보리수 등등)하는데, 사실 세계의 모든 부분이 신비가 머물 구석 없이 격자화 된 근대에서는 그런 나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거든. 이미 근대에서 그런 나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만 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렸어. 노인이 아이젠하임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가슴속에 심을 수 있는 환상을 만드는 방법이었어.

근대에 어울리지 않는 장인, 혹은 일루셔니스트가 세상의 모든 신비를 몰살해버린 근대의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아이젠 하임은 공녀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헤어지게 되지. 그 이후 오랜
떠돌이생활에서 돌아와서 성공한 마술사가 돼. 마스터(장인)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눈부신 테크네를 가진
아이젠하임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제국의 지배에 미묘한 균열을 만드는 작업이었어.
아이젠하임이 길을 가다가 어린 아이들에게 동전을 나누어주는 장면 기억 나? 사실 이 장면은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필요한 장면이지. 아이젠하임의 재능은 이미 마술쇼를 통해서 알려졌고, 따뜻한 마음씨는 공녀와의 로맨스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인식이 되었으니까 말야.

이 장면은 환상을 통한 제국의 전복이라는 메타포가 깔려 있어. 사실 화폐라는 것은 자본-제국주의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필수요소야. 이러한 화폐경제가 호황-활황-불경기-공황 싸이클을 되풀이하면서 자본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해 나가는 거지. 여기서
화폐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어. 그건 바로 제국의 지배력 자체에 반기를 드는 행위가 되니까 말이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폐범을 거의 살인죄와 같은 정도의 중범죄로 다스리는 전통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생겨난 거야.  아이젠하임은
아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줌으로서 환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무한하게 증식되는 화폐도 선물하는데, 이것은 바로 그의 예술이 근대제국에
대한 반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거지.

아이젠하임은 한 발 더 나아가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까지 해. 황태자가 주최한 마술쇼에서 아이젠하임은 아서왕의 신화를
원용한 검 뽑기 마술을 선보이지. 황제의 권력이 정말 하늘에서 주어지는 천부의 것이라면, 지상의 가장 절대적인 권력자는 황제여야
하고, 황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칼을 뽑을 수 있어야 해. 하지만 실제적으로 황제의 검 뽑기, 즉 절대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건 아이젠하임이지. 황제는 안색이 변해. 황제는 처음부터 아이젠 하임이 보여주는 마술의 신비가 자신의
근대적 마인드에 의해서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마술을 마술(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신비를 간직한 예술)로 즐기고 싶어할 때도 고집스럽게 해석(정복)을 시도하지.  하지만 그런 시도가 좌절되고 반대로 자신의
권위가 농락당하자, 황제는 아이젠하임을 끌어내리려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거야.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수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의 시학을 없에 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

5. 기술로서의 영화는 어떡게 에술이 되는가?-영혼찾기

그런데 과연 아이젠하임은 어떻게 마술의 기술들을 예술, 신비로움이 없어진 근대에서 신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예술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연금술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이 비밀의 메타포를 간직한 영화 속의 소품이 폰테쉔에게 아이젠하임이 선물한 목걸이야. 그 목걸이는 정교하게 제작된 기술의
산물이지. 하지만 그 기술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메타포가 표현이 되어 있어. 나무조각에 놋쇠로 모양을 낸 나비 문양이
보이지? 나비를 그리스어로 psyche라고 하지. 그런데 프쉬케에는 영혼이라는 개념도 있어. 그 나비는 바로 절대로 물화될 수도
없고 측정도 불가능한, 그래서 절대로 근대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영혼을 상징하는 거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이 머리가 아닌
심장에 머문다고 생각했어. 영혼이 열정을 가지면 심장이 타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 아리스토텔레스도 뇌는 단지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식히는 역할을 할 뿐, 사람의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생리학에서 설명했지.

자 이제 그 목걸이를 정교하게 비틀어보자. 뭐가 되지? 바로 심장이야. 폰테쉔이 마음속으로 항상 간직했던 아이젠하임의 얼굴,
그것이 바로 심장에 있었던 거야.(난 어째서 평론가들조차 이렇게 노골적인 은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대부분 평들을
보면, 평론가들조차 감상이 반전이나 마술자체에 맞춰져 있는데, 정말 그게 안보이는건가? 일반 관객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평론가들은 당연히 그런 훈련이 되어 있을꺼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이 없는 기술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어. 황제의 일급 과학자들이 아이젠하임의 기술을 흉내 냈지만 그것이 예술이라기보다는
조잡한 흉내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기술에는 프쉬케가 머물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거든. 그래서 철저한 자본논리에 의해
제작된 블록버스터 무비나 선전영화들은 예술이 아니라 역겨운 맥도널드 햄버거일 수밖에 없는 거지.

반면 사람들은 그 기술 안에서 영혼을 발견할 때, 그것이 한낫 꾸며진 트릭인줄 알면서도 감동받고 사실로 믿게 되는 거야.  방금
말한 나비문양의 펜던트를 조금 생각해보자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장치라는 걸 금방알 수 있어. 4조각으로 나뉜 펜던트를 그런식으로
비틀고 반으로 나누어 열어볼 수는 없잖아. 그러려면 최초의 접점이 2개가 필요한데 꺽이면서 그 접점이 유지될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거든 마법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마법은 그걸 가능하게 하지. 바로 상사력과 믿음의 힘으로. 조니 뎁 주연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본 횽들은 알거야. 예술과
마법은 신화적 상상력과 믿음에 있지 분석과 비판안에서는 생명력을 잃고 만다는걸. 그래서 아이젠하임이 사기죄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술이 모조리 트릭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때도 사람들은 아이젠하임의 마술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나 근대적 마인드에 경도된 사람들은 그런 영혼의 가치를 잘 파악하지 못해. 아이젠하임을 추적하는 경감이 전혀
추측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수건을 물어다준 나비(프쉬케)였는데도 불구하고 경감은 더욱 화려한 오렌지나무의 비밀에만
몰두하지. 사실 경감이 폰태쉔의 목걸이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오렌지 나무의 비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아마도 현대의
영화작가들은 기술이 근대의식에 경도된 일반 대중을 예술로 이끌 수이는 당의정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 결국 경감은 간직했던
목걸이(프쉬케)가 사라지는 지도 모르고 소년이 배달한 오랜지나무에 마음을 빼앗기게되는거야.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도 같은 함정에 걸려들었어.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마음을 적셔야 하는 영화인데,
어떤 관객들은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성 없는 고증을 탓하지. 이미 그 순간 그 관객들은 황태자처럼 “너무 똑똑해서
탈”이 되는 헛똑똑이가 되는 거거든.

반면 아이젠하임은 오렌지나무를 경감에게 주고라도 자신의 프쉬케를 찾으려고 했던 거지.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경감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 희대의 사기꾼이자 예술가인 “더 일루셔니스트” 아이젠하임에게 탄복하지. 그러면서
아이젠하임이 떠난 이 행복한 “처 푸른 초원 위의 집”을 상상하는 거야. 이 장면이 유치해보인 사람은 과연 나뿐이었을까?
당연하지. 현실이 아닌 마음속의 상투적인 환상을 그렸기 때문에 유치해보일 수밖에 없어. 계속 말하지만 그런 목가의 풍경은
근대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잖아? 아마 아이젠하임은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커다란 도시에 숨어서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했겠지.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런 목가에 대한 환상이 필요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말이지. 처음에 소년 아이젠하임의 마음을
빼앗았던, 노인이 나무라고는 없는 농경지에 환상의 나무를 심었듯이 말야.

이 영화는 프레스티지와 시대적 배경과 소제를 공유하는 쌍둥이 같은 영화야.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영화에서 마술사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전혀 달라. 참 신기한게 이런 비슷한 영화들이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완성도를 가지고 나온게 참 신기해. 그래서 아마 이 영화는 나한테 프레스티지와 이란썽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영화로 기억될
꺼야.

언제나처럼 긴글 읽어줘서 고마워.

사족: 듀나가 일루셔니스트 발음 문제를가지고 트집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 illusionist에서
s의 발음기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ㅅ과 ㅈ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발음인데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겠어.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느거지.–;; 사실 s발음 하나만 잘해도 영어가 얼마나 부드러워지는 건데.ㄲㄲ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특수 2팀
Rockid(rockid@gmail.com)

<프레스티지>, “우리가 마술을 보면서 바라는 게 뭘까?” <영진공 71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7년 4월 1일

원래 한참 게으름을 피우면서 나중에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일루셔니스트를 보고 맘이 바뀌었어. 쌍벽을 이룰 정도로 나에겐 좋은
영화라 그걸 보고 나면 이 영화만 집중해서 뭔가 글남기기가 힘들거 같았거든. 내가 원래 게을러서 보통 여기에 글 남길때는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해서 쓰는건데, 이건 말로 때워서 뭐 안써도 될뻔한 스토리야. 그런데 일단써놓으니깐 나중에 기억하기
편하더라고. 디씨질만 하면 뭐하겠어?^^;; 가끔 생산적인 일도 해야지. 예전에 날아라 횽이 보고 싶다고 해서 약속한 다음에
맘에 좀 걸렸는데 후련하네.

스포가 다수 있으니 안본횽들은 바로 백스페이스

1. 프레스티지의 배경

우리가 마술을 보면서 바라는 게 뭘까?

꿈? 믿을 수 없는 환상? 아니면 공포?

마술사가 무엇을 보여주던 간에  무엇이든 간에 사람들이 마술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만족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완벽한
통제야. 아무리 위험하고 종잡을 수 없어도 마술사가 그러한 상황을 통제함으로서 모두가 안전하다는 환상. 사실 마술을 즐기는
관객들은 그런걸 기대하고 마술을 보는 거야. 상상해봐. 마술사가 시작은 했지만 전혀 통제를 할 수가 없어서 점점 종잡을 수
없어져가는 그런 상황을. 몸서리가 쳐지지?

그런 점에서 근대의 마술은 이전의 마술과는 달라. 물론 아도르노 같은 학자가 말한것 처럼 선사시대의 주술사도 환경을 통제하고
이용하려는 욕망에서 생긴 거라지만 그래도 그 주술이나 마술실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였거든. 이를테면 토템이나
신 같은 거 말이지.

결국 자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술은 근대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정교한 알레고리가 되는 거야. 우리가 세상을, 시간과 공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여기서 근대가 시작이 되는 거지. 데카르트가 세상을 좌표의 격자로 나누고 모든 존재를 하나의 연장(tool 말고 延長)으로서
취급하면서 시작된 세계관 말야. 세계를 구획짓고 그 구획과 분석을 통해 개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세계관 말이지.

그래서 그 당시의 마술은 과학의 은유였고, 마술사들은 과학자의 속화된 이미지였어. 사람들이 마술을 즐기러 가는 것도 그런 것을
기대하고 간 거지. 마술을 보고 그 마술 속의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빅토리아조 영국)는 사람들은 세상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믿었거든. 이를테면 마술사는 루팡과 같은 도둑이었고, 그 비밀을 푸는 관객은 탐정 같은
거지. (그때 유독 탐정소설이 발달하고 탐독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지. 지금 CIS 같은 드라마의 기원은 사실 그러한 근대적
세계관에서 온거야. X파일같은 드라마는 그 반대의 세계관에서 연원한 거고. 약간 옆길로 세자면, 근대라는 세계의 매력이 좀 덜
해지니깐 탐정소설의 주인공들도 명민하고 이성적인 탐정에서 액션히어로 같은 타입으로 변화했지.)

프레스티지의 배경은 바로 이렇게 근대가 열리고 모두가 과학과 마술에 열광하던 때였어.

2. 미친 과학자 혹은 사기꾼.

그런데 사실 과학이라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게 아냐.
과학의 단맛을 보던 과학자들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고, 자신이 상황을,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에
휩싸이게 되지. 그 근저에는 어느정도 개인적인 컴플랙스도 작용하고 말야. 마징가제트의 헬박사, 백투더퓨처의 뭐시가더라..하여튼
그 박사, 에반겔리온의 주인공 아버지, 슈퍼맨의 렉스 루터까지, 수많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러한 미친 과학자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어. 그래서 그 과학자들은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지게 되지. 라이벌간의 경쟁도 심해져. 일단 대중들에게 갈채를 받게 되면
동종집단에서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하거든.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의 힘을 느낄 수 있으니까. 보든과 엔지어가 빠진 상황도 이런
거였어. 이중매듭 묶기 말이지.

근대성의 사고방식은 세상을 모델화해서 몇 가지 변수들을 뽑은 다음 그 변수들을 통제하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인데,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 현대에 와서는 카오스-프랙탈이니, 양자역학이니 하는 과학적 성과 때문에 이러한 근대적
사고가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지 오래지만 아직도 대중들은 근대성의 환상에 묶여있어. 그때는 과학자들도 그랬지. 뉴튼이 세상의
신비를 모두 밝혔고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그러한 연구들을 세상에 적용해서 정교화 시키는 일뿐만 남았다고 생각했지. 이미 미래의
로드맵이 머릿속에 있었던 거야.

하지만 현실은 이론이 아니지. 현실은 실제로 이론이 간과한 “불안요소”들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곳 이야. 능남 감독이 북산에게 진 것도 그런 이유 아니겠어? ㄲㄲ

그래서 사실 과학계에서는 미리 실험결과를 조작하거나 왜곡해놓고 미리 정한 결론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그런 쪽 공부를 아는 횽아들이 있다면 절감할꺼야.

결국 보든이 엔지어의 애인에게 이중매듭 도전을 종용했다가 실패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어.

엔지어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엔지어는 애인을 잃은 후, 보든의 순간이동 마술에 자극받아, 비슷한 마술을 계획하지. 자신과 닮은
배우를 끌여들여서 순간이동마술을 선보여. 그러나 그 배우는 오히려 통제권을 가진 엔지어를 조종하면서 상황을 파국으로 만들어가.
과학자가 그 성과에 대해 전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거.

엔지어는 나중에 테슬라기계를 이용한 마술에서도 아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로 스텝을 구성해서 전권을 통제하려고 해. 자기
자신만이 모든 사실을 통제하는 그러한 세상이지. 실제 역사에서도 많이 봤지? 이를테면 핵폭탄 같은 거 말야. 슈퍼맨의 렉스
루터나, 헐크의 주인공 아버지 과학자. 다 비슷한 은유라고 할 수 있지.

또 나중에 엔지어가 테슬라를 찾아가서 순간이동기계를 부탁하는 에피소드가 나오지? 테슬라는 사실 그 기계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식이
전혀 없었어. 테슬라는 단순히 영감과 자신의 계산에 의해서 기계를 만들고 기계의 성능을 예측했지만 그가 만든 기계는 이미 원래의
계획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져 있었던 거지.

게다가 과학자들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 자신도 통제 못해. 환호를 대신 받는 가짜 대신 지하에 숨어서 밖에서 들리는 환호에
취하는 엔지어. 이건 자신과 자신의 성과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냉철함을 잃어버리는 과학자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황우석 생각이 많이 날까? 엔저어를 돕는 커터가 엔지어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단호하게 마술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지만
엔지어는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해. 자신의 성과물에 의해 조종받는 노예가 되어있기 때문이지. 이게 근대의 아이러니야. 자신이
주인인줄 안 노예의 이야기지.  

근대성의 한계를 무시하면서 근대성이 담보한 통제력을 확인하려는 의지. 그게 사실 근대 과학의 필연적인 한계야. 미친 과학자는 그러한 한게에 도전하면서 자신을 파국으로 이끌어가는 인간조건의 상징이고 말야.    

3. 피 묻은 손-최초의 자본 만들기.

보든이 커터의 마술단에서 쫓겨나서 견습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하는 마술이 새장 사라지게 하기야. 새가 들어있는 새장을 손으로
내려쳐서 사라지게 한 다음, 옷소매에서 새가 나타나게 하는 마술 말야. 그런데 이건 그냥 그 마술에 속는 관객들이 이해하는
스토리고 진실은 무시무시해. 손으로 새장을 내려치는 순간 새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접히면서 안에 있는 새는 짜부라져서 죽는
거지. 마음의 눈을 잃지 않은 사라의 조카는 단박에 그 비밀을 알아채. 그러나 우리 같은 관객들은 뭐 그냥 당하는 거 아니겠어?

사실 과학자들이 업적을 만들어가거나 지금은 그야말로 근대의 주역이 되어버린 재벌들의 성공담 뒤에는 그러한 더러운 역사가
숨어있지. 근대의 주역들은 모두가 근면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리면 성공한다는 신화를 만들어내지만 사정은 전혀 달라. 뉴튼의
라이프니쯔 업적의 강탈, 에디슨의 전기의자, 황우석의 줄기세포,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 등등. 실제 성공스토리는 그야말로
역겹고 더럽지. 스콜세지의 대부시리즈나, 갱스터 오브 뉴욕, 올해 개봉한 드림걸즈도 어느 정도 그런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예를 들면 에디슨과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니컬러스 테슬라는 당시 유명한 라이벌 관계였어. 에디슨이 쇼맨쉽에 능한 황우석(물론
에디슨은 진짜였지)타입의 과학자였다면 테슬라는 이민자출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부족한 고독한 천재타입이었어. 예를 하나
들어볼게. 에디슨이 전기의자를 발명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왜 그랬는지 알아?  테슬라는 당시 교류전원을 이용하는
송전방식을 주장하고 에디슨은 직류전송박식을 주장했는데, 사실 교류전송방식이 당시 기술로서는 훨씬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기술이었지.
하지만 에디슨은 라이벌이 인정받고 성공하는 걸 원치 않았어. 그래서 교류가 얼마나 위험한지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서 교류를
이용하는 전기의자를 만든 거. 결국 그 전기의자는 네거티브선전의 산물이었던거지. 아무도 에디슨 위인전에 이런 이야기들을 써넣진
않지만 말야.

이러한 과학자들의 더러운 경쟁은 보든과 엔지어의 경쟁에도 그대로 투사되고 있어. 사실 보든은 천재 테슬라에 가깝고, 엔지어는
포장에 능한 에디슨에 가까운 사람이었지. 그들은 익명으로 상대의 마술쇼에 잠입해서 쇼를 망치는 방식으로 서로를 끊임없이
방해하지. 아예 엔지어는 보든의 마술을 그대로 포장만 새롭게 해서 자기 것으로 탈취하고 말야. 이러한 모든 풍경이 근대라는
합리성의 환상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만화경이었어.

4. 현실-흐려지는 경계

그렇다면 실제 현실은 어떨까. 명료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놀라우면서도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근대쇼의 커튼 뒤에서는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사실은 더럽고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걸까?

위에서 말했던것처럼, 모더니티의 세계관은 환상이었어. 세상은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않고,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통제가능하지도 않아.

근대의 시발점이 되는 자기정체성부터가 그래. 사실 자신을 인식하고 남과 구별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자아정체성은 근대의 핵심중의
핵심이야. 사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이러한 근대인의 의식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야. 자기
안에 자기가 모르는 영혼의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거 말이지. 이러한 근대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은 사실 근대이전, 정확하게 말해
서구의 근대 밖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성이야. 그들에게 있어서 오리엔트나 극동은 근대성의 빛이 미치지 목한, 탐험하고
개발되어야할 처녀림이나 같아. 보든과 엔지어가 새로운 마술에 대해서 고민하자 커터는 중국인 마술을 구경하고 오라고 하지. 거기서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두 개의 인생을 모순 없이 살아가는 중국인의 모습이었어.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역할 을 할 수 없다는 근대적 의식을 가지고 보든과 엔지어의 순간이동 마술을 즐겼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 중국인 마술사의 몸에 깃든 두 개의 삶, 보든과 조수가 사는 하나의 삶, 끊임없이 복제되는 엔지어.
과학자 테슬라와 쇼비지니스트인 그이 조수의 쌍생성(나는 이 부분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연상됐어. 점성술이라는 막내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천문학에 대해서 말한 그 코페르니쿠스말야)이것이 사실 근대라는 환상 속에 숨겨져 있던 세계의 참모습이고,
실제로 포스트모던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주목했어. 영화이론에 빠질 수 없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 관한 논의나,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 양자역학, 비선형이론 물리학자들. 아직도 현대인의 의식구조는 거의 근대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사실 일부
서구인들이나 산업사회를 제외하고는 근대에 도달도 못했지만 최소한 지식인사회는 근대가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지 80년은 넘었지.
바야흐로 현대가 도래한 거야. 사실 1914년의 그끔찍한 비극이후에 이미 근대에 대한 회의는 시작됐거든. 문학이 이러한 주제를
다룬것도 크게 보면 100년쯤은 됐고,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온것도 50년은 됐어. 영화는 그보다 조금 느렸고 요즘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하는 대중영화들도 끊임없이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지. 수면의 과학, 바벨, 일루셔니스트.올해만 해도 상당히 많네.

이 영화는 결국 근대라는 환상적인 마술쇼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꺼야. 물론 이 텍스트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해내느냐 하는 것은 당연히 감상자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5. 결말.

영화는 엔지어가 사실은 끊임없는 복제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죽고, 보든은 형제 중 한명이 죽고 한명이 살아나가면서 끝나. 글쎄?
이게 그냥 반전일까? 아니면 나름대로의 헤피엔딩일까. 뭐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봤어. 결국 자신의 일부를 억지로
죽이면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될 운명을 가진 근대성 자체 말야. 늦든 빠르든 말이지. 헐리우드의 관습은 절대로 노골적인 비극을
허용하지 않아. 나름대로 그 관습을 어떻게 비트느냐 하는것이 일종의 기예자랑이 되어버렸지^^

여기까지 읽어분 횽아들한테는 언제나처럼 땡큐.

사족: 테슬라로 분했던 데이빗 보위의 연기가 압권이었어. 능글맞게 슬라브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보위란 참…^^

사족2:언젠가 한번 한 이야기지만 일루셔니스트는 비슷한 시기의 비슷한 소재를 다룽 녕화지만 주된 주제는 상당히 달라,
프레스티지가 조금 더 내 취향에 맞는 영화였지만 일루셔니스트의 소품들이나 상징들은 보는 내내 즐거움을 주는 영화였어. 주제의식도
조금 더 소박하지만 더 전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고 말야. 내일 천년을 흐르는 사랑하고 같이 한번 더 보기로 했는데 보고 나서
며칠내로 리뷰 올려볼게.  

사족3: 영화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지만 더욱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소설을 읽고 싶으면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을 읽어봐.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쿤데라의 “정체성”도 좋은 선택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특수 2팀
Rockid(rocki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