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부조리


1.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번역이 개판인 문제도 있었지만 정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두달 반 걸려서 두 번 완독했는데도 이건 내가 책을 읽는건지 활자를 훑는 건지 분간이 안갔지. 근데 미팅 나가서는 “순수이성비판은 2판본은 개악이라고 말했던 헤겔 말이 진리예요”라고 개 허세를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창피하지.

도구의 인간이라고 육욕의 도구로 철학을, 그것도 칸트를 들이미는 내 수준은 생각하면 지금도 낮짝이 화끈거린다.

근데 이게 또 은근히 먹혔어요. 형이상학을 무기로 허리하학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나도 가관이었지만 그거에 또 홀딱 넘어가는 세상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였던 거라. 돈으로 치자면 한 2천원짜리 수준의 논쟁이었지.

대신, 돌베게에서 나온 책들은 눈에 쏙쏙 들어와. 간결해. 명쾌해. 자본론은 의외로 머리에 콕콕 박히더라 이거지. 때는 92년. 87년 봄의 끝물같은 세상에 아직도 먹히는 아이템이었기에 나는 맑스도 읽고 레닌도 읽고 막 그랬을거야. 아니 그랬어. 도구의 인간.

내 정치적 지향점이 된 순간은 창피하지만 육욕의 도구로 시작된 철학적 욕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력의 종이 되어버린 칸트의 철학은 자본론 앞에 무참히 깨어져 버린 셈이지”라고 맺고 낮게 투쟁가 한소절 부르면 ‘동지적 결합’이라는 탈을 쓴 욕망의 달콤한 선물이 툭, 떨어졌다.

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2.
부조리.

안전벨트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선 더 잔인한 장면을 찾아야 하고, 불쌍하게 죽은 경찰을 위해선 그 가족의 비통한 오열을 잔인하게 담아야 하고, 한 노동자의 분신을 이야기 하기 위해선 굳이 필요없는 고용자 가족의 개인사도 헤집어야 한다. 희망을 주기 위해선 처한 환경보다 더 못한 누군가의 비루함을 꺼내야 하고, 꿈을 주기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이 다시 되돌아 보기 싫은 지옥같은 경험을 토하도록 해야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끔찍하게 죽어가는 암환자와 그 가족의 비통한 눈물에 뷰파인더를 집어 넣어야 한다.

3.
이번 정권을 보고 있자니, 스무 살 때 내 치기를 보는 것 같아. 다를게 하나 없는거야. 친서민을 외치면서 뉴욕에 쳐바를 돈 50억 빼느라 없는 자의 몫을 빼는 거. 그거 진짜 육욕에 미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거거든.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말들, 칸트 번역했던 그 개똥같은 책 만큼이나 뭔 말인지를 모르겠어. 와나. 이거 뭐 국격의 수준이 내 스무 살 욕망의 수준이랑 차이가 없으니 누구한테 이야기하기도 쪽팔린거야. 누구 말대로 복지는 혜택이 아니고 권리야. 이거 고등학생 정도 수준의 애들 교과서만 봐도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그나마 사회 나가서 사람과 부대끼고, 힘든 사람들 눈물을 보고, 그들 눈물과 별 차이없는 내 통장의 잔고를 보고, 58원이 빈다고 새벽 2시에 가계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 아내를 보고, 커가는 자식 놈 키우면서 아둥바둥 사니까 난, 반성이라도 했다.

바르게 살자고. 바르게. 남 피해는 안주게.

어렵지. 그래 어려워.

그래도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사람들이 이정도 어려움은 좀 뼈져리게 느끼고 살면 안되는 거야? 나 같은 놈도 반성하는데 말이야. 씨**들아.

4.
부조리.
혁명을 위해서는 부패가 있어야 하고, 민중이 일어서려면 죽음이 있어야 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꼭 피를 봐야하는 거. 슬프다. 겁나는 건 그거다.

누군가 안한다면 그게 내가 해야 할 몫일 수도 있는 거.

그래서 우린 전태일에게 박종철에게, 이한열에게, 그리고 지금의 김진숙에게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거다.

제기랄.

누가 좀 멈춰줘요. 아니 내가 멈춰야 하는 데 그거 한 발이 무섭고 떨리고 겁난다. 내 한 발 떼서 나가야 하는 용기가, 내 마누라, 자식, 엄마, 여동생, 친구, 2층집 할머니, 아들놈 유치원 동창이랑 그 녀석 아빠가 막 생각나.

제발, 이번 정권에서 우리가 상처입고 반성만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한다. 그게 부처님이건, 알라건, 예수건 암튼 제정신 박힌 신이라면 듣겠지 하고 말이다.

부조리. 세상은.

영진공 그럴껄

“결혼 피로연”,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학부시절, 노년심리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노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을 ‘우내성경애조유의’ 라고 외웠다. 기억력 나쁜 내가 아직도 이건 잘 기억하는걸 보면 참 신묘한 기억법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진다(우).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외모도 삭아버려서 아무도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다가,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점차 밀려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니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늙으면 내향적이 된다(내). 사실 내향성과 우울증은 거의 같이 가는 증상인데 사람들은 침울해지면 밖으로 나도는 대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다. 그게 내향성이다. 평소에 매일같이 친구 불러내서 술 퍼먹던 사람도 우울해지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우울한 자의 유일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니까.

또한 성역할이 바뀐다(성). 대부분 남자 노인들은 여성적이 되고, 여자 노인들은 남성적으로 바뀐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이유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서는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한다.

사실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역할에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데 (그래서 실직한 남자는 심리적으로는 거세된 남자와 비슷하다) 그 사회적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노년기에 남자가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주도권을 놓으면 누군가 그걸 다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여자노인이 하기 쉬우니 여자가 남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늙으면 사람이 경직되어 뻣뻣해진다(경). 신체적으로도 유연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모험심이 줄어들며, 도덕적으로도 경직되어간다. 늙은 개는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한다가 아니라 새 재주를 못 배우는 개가 늙은 개란 얘기다.

늙으면 또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늘어난다(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못 찾는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쓸데없는 물건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니까. 내가 예전에 입었던 옷들, 읽었던 책들, 샀던 물건들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쌓아둘 만큼 정체성의 역사가 길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늙으면 조심성이 늘어난다(조).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늙으면 몸이 특히 뼈가 약해져 잘 부러지는 데다 부러진 뼈가 잘 붙지도 않는다. 정정하던 노인도 한번 뼈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가버리시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활동을 계속 해야지 정신도 온전한데 병원에 오래 누워 있다보면 활동을 못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덩달아 몸도 약해지면서 결국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말년 병장보다는 노인들이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후대에 뭔가 유산을 남기려 하고(유)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의). 사실 유산은 자식을 위해서 남기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유산은 재물인 경우도 있지만, 정신이나 전통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유산상속의 욕구인 것이다. 사실 자식은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산이자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를 낳는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이런 욕구들을 채우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일단 험한 꼴 볼 때까지 오래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거니와, 한해라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비교우위를 갖는 동네이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좀 적었고, 변화가 없는 사회이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별 흠이 되지도 않았고, 후손들이 대부분 고분고분 말을 들어줬으니 전통이라는 유산도 전수하고 삶의 의미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에는 노년이 매우 고달파진다. 순환이 반복되는 사회에서야 한해라도 오래 살아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게 득이 되지만, 작년 다르고 내년 다른 세상에서는 축적된 경험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금방 닥쳐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경직성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돈을 빼고는) 정신적 유산을 받길 원치 않는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오래 살기까지 하니, 그 고달픈 노년을 이전 세대보다 몇 십년이나 더 지속해야 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노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진짜 삶의 진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유산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공수래 공수거라는 진실을 어떻게든 기만해보려는 눈가리고 아옹질이라고 본다. 전통이 제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결국 매 세대마다 결국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전통은 이전세대의 것이 아니라 당대의 것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자손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않는데 손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유전자의 입장에서야 자손이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자손은 그냥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녀라는 화살을 미래로 쏘아보내는 활일 뿐이다. 자녀는 당신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와호장룡』으로 유명해진 “이안”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영화 『결혼 피로연』은 바로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아니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매끈하게 살고 있는 여피족 게이 남자와 그의 미국인 애인(물론 남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게이 남자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전수 받기를 바라고, 자기가 남긴 유산이 지속된다는 증거를 보여주길 다시 말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당연히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행여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아버지의 끝없는 성화에 못이긴 아들은 가짜 신부를 하나 구해서 가짜결혼식을 열어 아버지를 초대한다.

드디어 유산을 남기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날아온 아버지. 그러나 눈치만 100단이 되어버린 노인네는 점차 일이 자신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에겐 사실을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생물학적인 손주를 임신까지 한 명목상의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진짜 애인인 사이먼을 며느리로 인정한다. 아버지가 해변에서 사이먼과 산책을 하다가 건네는 붉은 돈봉투는 바로 그걸 상징한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버지는 빈손으로 대만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 노인네가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금속탐지를 받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평론가 정성일은 그 장면을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 모습은 항복한 패잔병처럼 처연하기보다는 마치 하얀 학이 날개를 펴드는 것처럼 우아했기 때문이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선이지 ……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속세에서 뒹굴어 댈 때, 신선은 학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영진공 짱가

 

“토일렛”, 영혼까지 어루만져주는 영화의 경지





세상에는 2시간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있고 – 그 중에는 그나마 충분히 재미있지도 못한 경우가 많지만 – 단순한 재미를 넘어 훌륭한 메시지와 감동을 전해주기까지 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런데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는 재미와 감동 뿐만 아니라 이제는 보는 이들의 영혼까지 어루만져주는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만들어진 영화가 재미 있다/없다, 내용이 좋다/별로다, 감동이 있다/없다를 이야기할 때에조차 객관성과 주관성의 이슈가 있을 수 밖에 없는 판국에 무슨 영혼이 어쩌고 한다는 건 그야말로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영혼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영역에 해당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니만치 나 역시 부담없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에 관한 주관적인 생각을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도 있는 판국에 영혼을 위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라는 표현에 특별히 심각해질 이유는 없다고 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과 비교할 때 이번 <토일렛>은 미국의 모처를 배경으로 – 실제 로케이션은 토론토에서 진행했다지만 내용상의 설정은 미국이다 –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로 진행되며 주인공들 역시 북미에서 캐스팅된 배우들이라는 외형적인 요소들 외에도 몇 가지 변화의 시도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가족이라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끌어오고 있는 면에서도 그렇고 클래식 음악을 사용하면서 작품 전반의 격조와 무게감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는 연출 의도가 느껴진다. 영화의 중심은 일본인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 이전까지 생면부지였고 말도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삼남매의 이야기이지만 자세하게 소개되지도 않는 죽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관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요소가 된다.

일본 영화에서는 이따금 등장 인물이 죽은 이후에 강한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등장하곤 하는데 <토일렛>에서는 할머니가 죽은 이후에 그 유언에 따라 재를 어머니의 무덤 위에 뿌리는 장면 – 이제껏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척 감성적인 연출이랄까 – 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토일렛>을 통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가 일순간에 확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작들이 슬로우 라이프 선언문에 가까웠다면 이번 <토일렛>은 삶의 고민거리들을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슬로우 라이프가 아닌 다른 곳에서 – 낯선 이국이나 외딴 섬이 아닌 내가 살던 그 집안에서 – 모색하고 있을 따름이다.

4년째 공황 장애를 겪고 있던 모리(데이빗 렌달)는 어머니가 남긴 낡은 재봉틀로 직접 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다시 피아노 콩쿨에 나설 수 있게 되고 가짜가 아닌 진짜의 삶을 살고 싶어하던 막내 리사(타티아나 마스라니)는 Air Guitar라는 아이러니한 방법을 통해 – 놀랍게도 실제 핀란드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대회가 있다 –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된다.

프라모델 오타쿠에 연구원으로 살면서 남들과 접촉 없는 삶을 추구하던 둘째 레이(알렉스 하우스)의 경우 남겨진 형과 동생, 그리고 생면부지의 할머니 때문에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인물이지만 그 역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구원할 수가 있게 된다.


 




세 명의 남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열어주는 인물은 역시 일본인 할머니(모타이 마사코)다. 영어를 한 마디로 못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 낯선 존재에 대해 냉정한 성격의 레이는 자신들의 친할머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하지만 – 갖고 싶은 프라모델을 포기하며 진행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레인은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 결국 말도 안통하는 자신의 손자들 각자에게 변화의 계기를 제공해주게 된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에 개근으로 출연하고 있는 유일한 배우 모타이 마사코는 이번 <토일렛>에서 대사가 단 두 단어 – 두 문장이나 마디도 아니고 정말 딱 두 단어만 하는게 전부다 – 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감이란 감독이 직접 ‘나의 뮤즈’라고 하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

<카모메 식당>과 <안경>에서도 모타이 마사코가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외딴 섬과 같은 존재였으나 이번 <토일렛>에서는 드디어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고 이는 작품 전체의 변화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차이점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영화 상영 후에 이어지는 GV, 즉 감독이나 출연자들이 나와서 갖는 관객과의 대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 <토일렛>은 미리 알고 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 상영 후에 이어진 GV에 흔쾌히 참여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상영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영화를 보고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GV까지 먼 발치에서나마 지켜보았던 과정 전체가 영화 <토일렛>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이번 영화는 작품 그 자체만이 아니라 영화를 접했던 전체적인 경험으로서 오래 기억에 남겨둘 만한 좋은 추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가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작품 자체가 남다를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심지어는 유치원생들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 영화를 보는 중에 주변에서 어린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더라도 어색하게 느끼지 말아야 할 것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는 데뷔작 <요시노 이발관>(2004)부터 연소자 관객들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누가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들면서 그 안에서 관객 각자의 몫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니 이거야 말로 성서나 불경에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아주 높은 수준의 경지가 아니겠나 싶다.



영진공 신어지







 

“러브 앤 드럭스”, 슬프지만 상큼하게




‘러브 앤 드럭스’ 매기와 제이미

운명의 어쩌고 하는 진부한 사랑얘기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영화 ‘러브 앤 드럭스’는 무척 흥미로웠다. 자칫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에 그치고 마는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약점을 피할 수 있었던 건, 파킨스 병이란 소재가 이야기의 굵직한 주축을 이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화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균형이 매우 잘 이뤄진 듯 보인다. 무엇보다 이미 ‘브로크백마운틴’에서 부부로 열연한 두 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앤 해서웨이가 적절히 가벼워져야하는 장르 안에서도 마치 춤을 추는 제 역할에 흠뻑 빠져 매력을 발산한 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좋겠단 순진한 심정으로 두 배우의 전라의 베드신을 훔쳐보는 동안은 제법 두근거린다. 영화에서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 매기가(앤 해서웨이) 태어나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사랑한단 고백을 해본 적 없는 제이미(제이크 질렌할)를 위로하며 건네는 대인배 다운 대사들은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어 말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남는다.

점점 떨려오는 손으로 사진을 찍고 스크랩하는, 매기의 예술혼을 담은 조용한 장면들은 마치 장문 속 쉼표같아 아련한 마음으로 휴, 숨을 달래게 된다. 괜히 덩달아 들떠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진공 애플

 

[근조] 최고은


최   고   은

1979 ~ 2011. 1. 29.


고인의 작품, “격정소나타”

[ 작품 보기: 온라인 단편영화 상영관 ‘유에포’ ]
(링크를 클릭하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