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을 가진 사나이”, 무릇 짬뽕에는 물을 타지 말지어다

 

 


 


 



 


 


 


철권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Iron Fists, 2011)


 


아빠의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나는 아들내미, 업소에 일하는 여친을 빼내려고 닥치는대로 돈되는 일을 받았다가 두 팔이 잘려나가는 대장장이, 중국 술집에서 음탕하게 놀고있는 정체모를 배 나온 유럽 아저씨.


 


이들 삼인방이 펼치는 정의와 복수의 액션 활극. 과장된 액션, 피와 살이 난무하는 B급 취향이 흘러 넘쳐 강을 이루고 있는 지극히 타란티노 형님스런 영화다. 그런데 감독, 각본, 조연까지 RZA라는게 소소한 함정이라는 거.


 


못하는 게 없는 힙합 용사 르자(RZA)와 더불어 루시 리우, 러셀 크로우, 몸짱 레슬러 형님 바티스타 등 화려한 출연진은 나름 눈을 즐겁게 하지만 정작 영화는 긴장감도, 시원함도 없이 왠지 고무줄 늘어난 빤스처럼 축축 처지기만 한다. 등장 인물들의 갈등을 한껏 부풀려서 마지막에 한방에 터트리는 풍선장치 역시 시원찮기는 마찬가지.


 


 


 





사무라이와 힙합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성공적으로 비벼놓은 명작


 


 





너무 젊은 나이에 하늘로 올라가신 누자베스 형님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앞서 일본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참프루’에서 선보였던 걸작 힙합활극이 있기에 이러한 아쉬움이 더 커진다.


 


힙합 프로듀서 누자베스가 참여했던 ‘사무라이 참프루’는 사무라이에 힙합을 접목시키며 매우 독특하고 역동적인 작품을 창조해내었다. 특히 감독은 누자베스의 음악을 그냥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는데 힙합의 비트와 합을 이루는 액션은 눈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마찬가지로 ‘철권을 가진 사나이’에서도 힙합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르자가 참여했지만 안타깝게도 ‘사무라이 참프루’에서와 같은 효과는 발휘하지 못한 채 힙합의 비트는 허공으로 휘발되어 버린다.


 


타란티노가 어떤 생각으로 르자를 참여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경음악 곳곳에 힙합을 깔아놓은 것을 보니 분명 무협 영화에 힙합적인 요소를 첨가한 하이브리드 짬뽕밥을 만들려 했던 것 같지만 그 결과물은 물 탄 짬뽕마냥 밍밍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래도,


 


 


 




 






 

 

포스터는 정말 주옥같구나~!


영진공 self_fish


 


 


 


 


 


 


 


 


 


 


 


 


 


 


 


 


 


 


 


 


 


 


 


 


 


 


 


 


 


 


 


 


 


 


“타워”, 불구경하기 영화에서 감동은 어디에 있는 건가

 


 

 


 


 



 


 


 


재난영화를 만들떄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다.


영화로서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절대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사람이 죽고 다쳐나가는데 그걸 보면서 ‘우와’ ‘대박’ 뭐 이런 탄성이 나오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재난이 그저 우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구조적 결점이나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난의 영화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아야하며, 애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게 만든 나쁜 놈들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난은 …… 그냥 사고다.


구조적 병폐나 인간의 탐욕이 주원인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물론 헬기가 비행한 상황이나 건물주의 행동이나 소방국장이 벌이는 뻘짓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그토록 큰 재난을 일으킨 주범들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놈도 없고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도 없다. 그냥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나가는 대형사고를 그런 스펙타클한 화면으로 왜 봐야하는가. 그나마 찌질한 나쁜 놈들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응징도 가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봐야할 게 뭐고 어디에서 감동해야 하는 걸까. 실감나는 장면 연출? 불구경? CG감상? …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요즘 나의 고민은, 내 과거의 가난했던 경험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나의 가난에 대한 경험이 타인에게는 화두로 삼기에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어서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꼭 등장하는 ‘가난한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불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작위적인 설정(요즘 세상에 청소용역직에게 누가 3개월치나 월급을 가불해주나? 게다가 용역직 월급 120만원이라 가정하고, 석달치 360만원에 세금 때면 330만원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 하면, 그 가족은 3개월을 손가락 빨고 사나?) 때문만은 아니리라.


 



영화 한 편에 9,000원을 내고 보러올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현대의 가난’이란 소재가 외면하고 싶은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타워”에 등장하는 청소 아주머니는 감동을 위한 소재로서는 불편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정치인은 소방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VIP랍시고 안전하게 도망가고, 쓸데없이 고집부려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놈은 상황실에서 방방 뛰고, 애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쳐나가고 …… 그 와중에도 가난한 청소 아주머니는 그저 짐만 되는 사람으로 표현될 뿐, 이렇다 할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가난이란 그런 것일 듯 하다. 그저 불편한 짐.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약자가 표현되는 수준. 복지 예산으로 먹여살리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마냥 버릴 수도 없는. 딱 그 수준. 그게 우리의 투표 결과고, 현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계층의 모습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으라면 설경구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한다. 영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순교의 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갖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평소의 강인한 모습을 잊고 눈물을 터트리는 …… 그저 평범한 영.웅.


 



그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ㅆㅂ, 죽기 싫은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 욕심들만 채우려는 캐릭터를 보다가, 그나마 ‘양심’을 가진 캐릭터를 보니 살짝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영화에 대한 불만이 확 치밀어 올라왔다가 그 장면 하나에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슈퍼히어로를 만들지 않아서.


 


 


 


영진공 Red Subma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