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우강호”, 사랑은 강호의 악연을 넘어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 얻은 실망감은 왠지 한 주 뒤에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검우강호>로 – 엄밀히 말하자면 오우삼 감독은 제작자에 가까웠던 것 같고 실질적인 연출은 대만 출신의 수 차오핑 감독이 도맡은 듯 – 반드시 상쇄시켜줘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관람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의도했던 대로 결과는 꽤 성공적이네요. 무협 영화에 관해 특별히 축적된 이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미있었고 또 기대했던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부분들 역시 많았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와이어에 의존하게 되는 무협 액션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거나 광동어로 연기하는 정우성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누가 보더라도 크게 흠잡을데 없이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할만 합니다.




<적인걸>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80년대 홍콩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액션과 함께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오려고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결합 때문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텐데요, 일단 <검우강호>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최근 중국 블럭버스터들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 대신 고전적인 무협에 멜러적인 요소를 버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와호장룡>(2000)을 연상케 하기도 했습니다.

너를 산 채로 묻어 저 위의 다리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하겠다는 잔뜩 뒤틀려버린 사랑과 서로 칼을 겨눌 수 밖에 없었던 악연을 끝내 극복해내는 진심어린 사랑을 직접적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나아가 <검우강호>는 탐욕과 배신,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혈전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제 곧 50세의 나이가 되시는 양자경 누님이 <예스 마담>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바야흐로 2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멋진 쿵푸 액션을 보여주고 계신 거네요. 이제는 슬슬 예스 마님 역을 해주셔야 할 시기에 우리의 한류 배우 정우성과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역할을 맡으셨으니 – 아마도 해외 배급을 위한 선택이었던 듯하고 양자경이 직접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걸 말이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드리고 싶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적인걸>과 <검우강호>에는 공통적으로 얼굴 성형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설정으로 들어가 있는데요, <적인걸>의 성형이 비과학적인 변신술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검우강호>에서의 성형은 나름대로 고대 의학 기술의 쾌거임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 다르더군요. 영화 속에서 양자경은 정우성과 멜러의 합을 맞추는 데에 있어서 물론 분장을 잘하고 나온 덕도 있었겠지만 성형 수술을 통해 한 차례 개조된 얼굴이라는 설정의 덕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검우강호>에서 정우성은 영화의 절반 이상 어리버리한 연기를 하다가 – 이 역시 설정의 덕을 보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역시나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세우(양자경)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분노하는 부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는 아니지만 필요한 때에는 제대로 터뜨려주곤 하는 정우성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이루게 되는 흑석파의 고수들의 면면도 각자의 개성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허황되지 않는 캐릭터들이어서 보기가 좋더군요. 특히 냉소적인 표정과 자세로 일관하는 여문락의 캐릭터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흑석파의 두목으로 출연한 왕학기는 어디에서 낯을 익힌 배우이신가 찾아봤더니 <8인 : 최후의 결사단>(2009)의 마님이셨더군요. 흑석파 두목은 자칫 의도와는 달리 희화화되기 쉬운 캐릭터였는데 왕학기의 연기 내공이 잘 커버해준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고전 무협의 상상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소화해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