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정신과 철들기



내가 아는 어느 교수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누군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넌 군대도 갔다 온 녀석이….’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군대’에서 뭘 가르친다고 생각하길래 그런 ‘불합리한 생각’에 수긍할거라고 믿는지 의아스럽다.

더불어 가끔 어떤 분들이 ‘애가 군대를 갔다 와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표현을 쓸때, 그 표현에 담긴 내용이 ‘게으른 것을 타파키 위한 의도’라면 이해해 줄 법도 하지만 부당한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는 떼쟁이의 모습에 대고 내지른 일갈이라면 되려 반문하고 싶다. 그래, 그렇게 적응하는 것이 좋은가?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 ‘아나폴리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별칭이다. 아나폴리스라는 지역에 위치해서 ‘아나폴리스’다. 마찬가지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웨스트 포인트에 위치해서 ‘웨스트 포인트’라 불린다. 물론 공군사관학교도 있지만 생긴지 얼마 안 되었거니와 해군비행단이 훨씬 우수하므로 전통에서 좀 밀린다.

어쨌든, 이 두 사관학교가 1년에 한 번 미식축구로 승부를 보는데, 미국의 최고 경기가 ‘슈퍼볼’이듯, 얘네의 이 아마추어 게임도 상당한 인기를 끈다. 생도 때, 웨스트 포이너(west pointer)인 생도(cadet)와 아나폴리스의 생도(midshipmen)의 격전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는데, 흥미 있던 부분은 게임이 아니라 관중석이었다.


웨스트 포인트 애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정갈하게 정렬해서 스탠딩 관람을 하고 있었지만, 아나폴리스 애들은 완전 개판이었다. 복장도 동정복(冬正服)을 양쪽이 입었으나, 해군은 단추 풀어헤친 사람부터 시작해서 스카프 풀어 휘휘 돌리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이건 문화적 충격이었다. ‘오와 열’을 중시하는 ‘군대 문화’에서 이런 해군의 ‘개날라리’ 모습은 새로운 것이었고,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장교들이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흔히 얘기하는 ‘할 땐 하고, 놀 땐 놀자’라는 정신이리라.

물론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테잎을 보여준 사람은 해사를 나와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과정을 위탁교육으로 졸업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군 내부의 전반적인 보수성향보다는 진보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육군이든 해군이든 우리나라는 군복에 주름 하나 잘못 잡혀도 꼭 한 소리 하거나 심하면 완전군장 돌리는 돌아이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제복은 옷이다. 옷은 입는 사람의 ‘사고’를 제한한다. 그런 격식과 규칙이 사고를 제한하고 지배하는 단체는 쉽게 통일성을 갖추고 지휘하에 놓일 경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곳에서는 ‘튀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며, 체제에 불응하는 것도 허용되지 아니한다. 더불어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것이 당연한 곳이기에. 불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바로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무비판적인 사고로 수긍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대이고, 맨 처음 언급했던 사람들이 얘기하는 ‘체제에 대한 순응’을 투영시키기에 좋은 군대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다.
‘군인 정신’이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과거 김종학 PD가 만든 ‘백야 3.9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병헌이 공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였다가 불명예 전역을 하고 안전기획부(지금의 국정원)로 들어가서 북한군 장교인 최민수의 공작을 와해시킨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병헌이 불명예 전역을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율곡 사업의 비리. 당시에 불거졌던 F-16의 기체 결함 이슈에 겹쳐서 김종학 PD가 머리 굴려 만들어 낸 작은 에피소드지만 참 멋진 대사를 만들어 냈다.

기체 결함으로 추락하는 와일드 캣에서 탈출한 이병헌이 전투기 수입과 관련된 정부와 군의 비리를 캐내다가 공군 심리에서 결국 비리를 입증한 후 불명예로 전역한다. 이 때 심리장면에 군 수뇌부 역할로 출연한 정동환 씨에게 이병헌이 왜 이런 ‘불합리한 전투기 수입’을 벌였는지 이의를 제기하자, 분노하며 일갈하기를,

‘그게 바로 군인정신이야’

라고 하였다. 군인이라면 정치인의 꼼수와 이런 저런 알력에서 겨우 건져낸 ‘불량품’을 갖고도 열심히 ‘싸워야 하는’것. 그게 바로 군인이라는 주장이었다. 아, 이 얼마나 엿 같은 소리던가. 물론 상당히 ‘애국심’에 가득 찬 일갈이었으며, 어느 면으로 보면 ‘그래 그게 군인정신이지’라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군인정신이 아니다. 군인은 ‘불합리한 침략’에 맞대응하며, 그런 ‘불합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존재이지, 그걸 그대로 ‘순응’하면 그건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는 존재의 배반이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군대가, 내부에서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때부터 그 군대는 비리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사회를 병영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군대의 시스템을 적용시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논리를 고스란히 돌려주자. 이 사회에서 시끄럽기 그지 없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 사회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에 대해 일갈하는 사람들은 사회 내부에 있는,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자정능력에 대해 일말의 기대감을 걸고 현실 개혁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저 혼자 잘난 양 독야 청정하는 선비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이 덜 들어서’ 바른 소리를 해대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고,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권위와 권력의 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허황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가면 늦다. 나는 계속 깨어 있고 싶어도, 지친 삶의 무게에 눈꺼풀이 내려 앉을 것이며, 아무리 청년이고 싶어도 세월의 고집은 보수를 지향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불합리를 불합리라고 인지하고 그에 반항할 수 있을 때,
이 때가 바로 내가 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때다.

당신들이 배운 ‘군인정신’이 권위에 짓눌려, 권력에 신음하는 맹목적 복종이라면,
내가 배운 ‘군인정신’은 불의에 항거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지켜주는 일이며, 인습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뼛속 깊숙이 전사의 기질을 가진 그것이다.

시원스레 뻗은 평탄한 길에서 모난 돌은 잘 구르지 못하지만, 울퉁불통하고 중간중간 끊어진 길, 음습한 이끼들이 잔뜩 끼어있는 곳에서는 모난 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진공 함장

『반지의 제왕』을 통해 살펴보는 박정희 신화의 의미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한때 [안좋은 추억] 시리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개그맨 정준하는 왜 떡국을 기억 못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떡국에 관한 안좋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왜 개구리를 싫어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개구리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들도 모두 좋건 안 좋건 자기만의 추억을 한 두개씩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킨드(D. Elkind)는 이런 자기만의 추억을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라고 불렀다. 내가 어떻게 연애에 성공하거나 실패했는지, 내가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거나 낙방했는지, 내가 어떻게 직업을 찾고 어떻게 그 직업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같은 것들이 모두 이 개인적 우화다. 술자리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나 가끔 흘릴 뿐, 남들에겐 잘 하지 않는 나만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우화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로또 당첨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에 범상치 않은 꿈을 꿨거나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누구는 불나는 꿈을 꿨다고 하고, 누구는 똑같은 번호의 버스가 연달아 오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이나 경험이 로또 당첨을 설명해 주는 개인적 우화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이상한 꿈 때문에 로또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되니까 지난밤 꿈이 이상해 보이는 게 더 맞다. 생각해 보라. 꿈치고 이상하지 않은 꿈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진짜 이상한 꿈을 꿨다 싶어서 복권 샀는데 꽝인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최소한 일주일에 수백 만 명이 그렇게 이상한 꿈을 꿨다는 이유로 복권을 살 것이다. 모든 꿈은 다들 어딘가 이상하지만 우리는 그런 꿈을 꾸면서도 별일 없으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나중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지난번 꿈도 덩달아 특별해진다.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실제 사건의 세부사항 중에 어떤 것은 생략되고 어떤 것은 덧붙여지면서 결국 실제 사건의 본질은 왜곡되어 버린다. 사건이 개인적 우화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런데 어떤 개인적 우화는 한 개인만이 간직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러다보면 개인적 우화가 아니라 전설과 신화가 된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우리나라에서 보다 영국미국 문화권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 영화다. 우리에게 이 영화는 그저 영화 『트로이』급의 웅장한 대작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영미 문화권 사람들에게 이건 원초적인 세계관을 집대성한 기념비다.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세계는 서양 판타지 문학에서는 언제나 등장하는 공간이다. 이 서양 판타지 문학이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된 것이다.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 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다.

J.R.R. Tolkien

이 모든 것은 이 이야기의 창조자 J.R.R. 톨킨에서 시작되었다. 아시다시피, 톨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19세기 말(1892년)에서 20세기 중반(1973년)까지 영국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으로『반지의 제왕』을 써냈다. 하지만 그가 신화들을 조합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세계는 단순히 판타지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살아생전에 겪어야 했던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대량학살 전쟁의 시작이 된 1차 세계대전

톨킨은 이 역사적 대사건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 시작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내는 개인적 우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에겐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그의 개인적 우화는 책이 되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고, 그 전설은 공유에 공유를 거쳐가며 영미 문화권이 역사를 설명하는 신화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신화가 만약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그건 사실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만약 2차 세계대전이 반지의 제왕이야기라면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할 거다. 거기다가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하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가 그렇던가?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의 무리들과 그 부하인 흉칙한 괴물들

선함을 상징하는 백색의 마법사

빛과 어둠의 싸움...2차 대전이 이런 전쟁이었나?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 쪽 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다.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으니까.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뭔가 그럴듯한 다른 이유가 붙었다. 그것은 선과 악의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2차 대전 덕분에 일본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끔찍한 사건일 뿐이었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왕을 세우기 위해 우리 같은 민초들은 셀 수 없이 죽어나간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 신화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가면 갈수록 더 대단한 대통령이 되어간다. 사람들은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불가능했었고,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오래 전에 공산당 국가가 되었을 거고, 심지어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핵보유국이 되었을 거라고들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던가. 박정희 때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고 고속도로를 깔기 시작한 거는 맞지만, 그 계획은 박정희가 쫓아낸 장면 정부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박정희 때는 늘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열심히 차관을 빌려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치금융과 관치경영의 기초를 닦았고, 지역감정을 뿌려놓았으며, 군사문화를 뿌리박아 놓아서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박정희 ...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결코 박정희 신화를 무너트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신화가 된 이유는 경제의 기적을 일으켜서도, 조국 근대화를 이루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의 일생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현재를 가장 극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별 하나짜리 장교가 나라를 집어삼키고, 수십년간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 집권기간 동안 우리나라 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점이 바로 그를 전설로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그 어떤 사소한 경험도 그걸 박정희와 연결짓는 순간 더 이상 사소한 개인사가 아니라 거대한 전설의 한 줄기로 의미가 격상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 그 자체는 일어나자마자 흩어져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즉 우리 마음대로 그 사건을 해석하고 덧붙인 개인적 우화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단위에서 정리된 과거들만으로는 사회가 구성되고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공동체는 구성원들의 과거 기억을 통합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건 결국 개개인의 우화가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에 전승되는 전설의 형태로 통합되고, 그 전설은 다시 그 집단들이 뭉친 국가의 신화가 되는 과정이다. 이게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는 말의 뜻이다. 이 이야기, 이 신화가 무엇이냐가 우리의 현재 경험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가적 단위의 신화보다는 부족단위의 전설들만 있는 거 같다. 최소한 두 개 부족의 전설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 한 쪽 전설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 우리나라가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개조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또 다른 전설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가 치유불능의 망국으로 치닫으리라 여긴다. 나 역시 이 두 부족민중 한명인데, 한 쪽 부족민의 입장에서, 나는 도무지 상대부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세대갈등이니 좌빨이니 하는 얘기가 오간다.  결국 문제는 전설의 통합이다.

박정희 전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는 일. 그게 이 골 때리는 현시국의 미친 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거다.

서비스컷: 아르웬 ...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