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멜빌,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면 ...
이 영화를 보면서 틀림없이 원작소설이 있고 그걸 각색한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imdb를 찾아보니 자크 드발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나옵니다.. 조금 놀랍군요. 뭔가 ‘문학적인’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고, 아주 살짝은 실망을 했고, 그럼에도 마지막 여운은 짠했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림자 군단>을 보고 그 간결하면서 건조한 화면에 쇼크를 받으며 열광을 했더랬는데, 뭐랄까, 역시 인간의 심리를 복잡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야 하는 영화는 멜빌과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멜빌전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이미 거진 다 보았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역시 최고는 <암흑가의 세 사람>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어야 할 <바다의 침묵>(원작소설이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은 다소 당황스러웠다고 하니까요. 만약 다른 감독이 만들었다면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는 꽤나 억장을 무너지게 할 슬픈 멜러영화가 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됐다면 이 영화가 더 좋은 영화가 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멜빌 버전은, 묘하게 사람 애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긴 해요.


수녀원에서 정식 수녀로 서원하기 일주일 전, 테레즈는 부모님의 급사 소식을 듣고 어린 여동생 드니즈를 보살피기 위해 수녀원을 나와 집으로 옵니다. 그녀는 부모님이 하시던 문구점을 드니즈와 함께 이어받고, 자신에게 대단히 의지하는 드니즈를 엄격한 규율과 따스한 애정으로 돌봅니다. 한편 천하의 몹쓸 바람둥이 막스는 이혼을 앞둔 부유한 여성인 이렌 포게레를 꼬셔 그녀에게 얹혀살다가 우연히 드니즈를 알게 되고, 마침 포게레 부인을 찾아온 드니즈를 호텔방에서 강간합니다. 드니즈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테레즈는 막스를 협박해 드니즈와 결혼을 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막스는 테레즈에게 한눈에 반했다며 그녀에게 구애를 합니다.


어느 해안가 장면 위에 오프닝 타이틀이 지나간 후, 영화의 본격적인 첫 장면은 수녀원을 찾아온 테레즈의 조부와 수녀원장의 씬입니다. 저는 조부가 수녀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수녀원장이  테레즈를 불러오고, 조부가 전하는 소식에 충격을 받는 테레즈의 장면을 정말로 그렇게 다 보여줄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여기서 어? 하면서 살짝 실망을 했더랍니다. 물론 이 씬은 테레즈라는 인물과 그녀의 배경을 설명하는 씬입니다만, 필요이상으로 길어요. 심지어 수녀원장의 명을 받은 다른 수녀가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테레즈를 불러세우고, 이들이 수녀원장실로 향하는 장면까지 나오니까요. 수녀복을 입은 쥘리엣 그레코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멋지긴 하지만,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멜빌 치고는 첫 시작부터 쓸데없이 늘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테레즈와 드니즈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테레즈가 전반적으로 매우 검소하고 엄격한, 수녀원 출신다운 외모를 보여준다면, 드니즈는 훨씬 발랄하고 아름답습니다. 사실 외모부터도, 테레즈 역의 쥘리엣 그레코는 조금 딱딱하면서도 날카로운 외모에 거의 표정이 없는 얼굴이 하고 있습니다. 반면 드니즈는 대단히 풍성하게 아름답지요. 그렇기에 이 아가씨가 강간을 당한 뒤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매우 애처롭고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 옷을 단정하게 입긴 하였으나(심지어 스타킹까지!) 머리는 살짝 흐트러져 있고, 완전히 멍한 상태로 길을 나서 배로 향합니다. 그녀의 자살은 그리 ‘충동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배의 갑판 문을 확인해 보고, 배를 타기 전 카페에서 작성한 유서를 가방에 놓는 침착하고도 주도면밀한 면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이 일어나는 게 거의 영화의 반이 지나서입니다. 사실 막스와 드니즈가 처음 만나는 장면 자체가 영화 시작하고 30분 정도 지점일 거예요. 앞부분이 좀, 많이 길죠. 왜 이렇게 느끼냐하면, 이 영화가 빛나는 지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드니즈가 자신에게 청혼한 막스가 잘해준다며 그저 좋아하고, 막스는 드니즈에게 친절하게 굴면서 공공연히 테레즈를 유혹하며 작업을 걸고, 이에 대해 테레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 그러나 그 뒤로 어딘가 흔들림이 느껴지는 얼굴로 –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일련의 대립과 비밀의 장면들이거든요. 발랄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드니즈는 막스가 테레즈에게 던지고 있는 그 무수한 낚시와 추파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워낙 여자를 후리며 돈을 빼먹는 막스의 사기짓거리를 (멜빌이 영화 초장부터 자세히 보여준 덕에) 잘 알고 있기에 그가 테레즈에게 하는 고백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막스 트리베 역을 맡은 필립 르메르의 얼굴은 뺀질하고 비열해 보이면서도 매끈한 부분이 있어서, 그 고백들을 100% 거짓이라 단정하기도 힘이 듭니다. 저 노련한 뱀같은 말을 듣는 테레즈의 얼굴은 또 대단히 무표정해서, 그러나 그 얼굴이 한편으로는 어딘가 흔들리고 있는 듯해서, 여기에서 바로 긴장과 스릴이 발생합니다. 사실 저렇게까지 열렬하게 사랑 고백을 하면 믿고싶은 게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적어도 저는, 테레즈가 결코 막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를, 그러나 저 고백 자체는 사실이기를 바랐답니다. 막스의 진심이 뭔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요.


드니즈의 금을 훔친 막스가, 테레즈가 자신을 뒤따라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저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막스가 정말 진심인 건지, 아니면 바람둥이로서 너무 용의주도한 것인지 헷갈렸어요. 물론 막스는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아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설마, 저게 진심이란 말이야? 싶었지만, 그가 워낙 악당이기에 쉽사리 그 마음을 믿을 순 없어요. 그리고 아마 테레즈의 마음도 딱 그랬을 겁니다. 사실 테레즈는 꽤 현명해서, 설사 막스가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남자와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끝까지 막스에게 단호하게 구니까요. 하지만 해변가에서 막스가 다시한번 구애를 하고 테레즈가 단호하게 구는 장면에서는, 테레즈의 차가운 말들과 달리 테레즈의 모습이 다소 흐트러져 있습니다. 영화 내내 그토록 단정하게 빗어올렸던 테레즈의 풍성한 머리가 풀려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것도 이 장면이고,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허둥대며 뛰어다니는 단 한 씬도 바로 이 장면입니다. 테레즈의 마음이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다소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던 장면들은 드니즈-막스-테레즈의 삼각 구도 이후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하고, 거침없이 엔딩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은… 꽤 애잔함을 줍니다. 우리는 테레즈가 정말로 수녀원으로 가려고 했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지만(이후 그녀의 기도에서도 확인되기는 합니다), 그가 막스에게 갈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테레즈가 막스를 만나기로 한 곳은, 막스가 죽음을 맞이한 레자크 역이 아니라 마르세이유 역이었고, 영화는 마르세이유 역에 도착한 그녀가 곧바로 수녀원으로 향하는지 아니면 막스를 찾아 두리번거리는지는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아마 그녀 역시, 막스의 열렬한 구애에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비밀’로 묻혔고, 오직 죽은 막스와 테레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완전히 묻혀버린 기억이 됩니다. 드니즈는 평생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약혼자가 뜻밖의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에만 슬퍼할 것이고요.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 타이틀 때처럼 다시 해안가를 비추면서 끝납니다. 처음과 끝이 동일한 이 장면은, 결국 모두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살아갈 것이고, 오로지 테레즈의 가슴 속에서만 폭풍이 몰아치고, 테레즈의 기억 속에서만 막스가 잠시쯤은 어떤 열정을 보여줬던, 그러나 그 열정도 실은 믿을 수 없는 그런 남자로 기억되겠죠.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진심의 사랑을 느꼈던 여인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자란 굉장히 불쌍한 존재이긴 한데, 이 친구는 사실 워낙 저지른 죄가 많아서 그래도 싸다, 싶고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음에도, 그 마지막의 시체를 보니 연민이 눈곱만큼은 생기더군요. 사실 막스가 처음으로 사람다워 보이는 게 그가 시체가 됐을 때입니다. 도대체 이 인간은, 그 사랑이 나름 진심이긴 했구나 확인되는 순간에도 밉살스럽게 구니까요. 다만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드니즈와 막스를 위한 연민의 기도를 올리는 마지막의 ‘수녀’ 테레즈의 모습은, 영화의 전반적인 건조한 느낌 때문인지 더욱 짠합니다.


영화의 제목,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면…”은, 모두 편지를 쓴 이가 ‘미래’를 가정하고 쓰는 구절입니다. 영화에서 세 번이 나오는데, 한 번은 드니즈의 유서의 첫 시작 내용이고, 두 번째는 막스가 비케에게 보낸 편지지요. 드니즈의 구절이 결국 ‘삶’으로 연결됐다면, 막스의 구절은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연결됐다는 점이 또한 아이러니한 매력이겠죠. 이 구절은 원래 막스 오퓔스 감독의 영화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의 그 편지 첫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라 합니다.




영진공 노바리

ps. 쥘리엣 그레코는 우리에게 이브 몽탕과 함께 부른 ‘고엽’으로 너무나 유명한 샹송가수죠. 그녀가 부른 ‘La Mer’ 같은 곡들을 어렸을 적 꽤 자주 들었구나 싶기도 한데… (불과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만 해도 라디오에서 샹송이 심심찮게 나왔답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무대에서 검은 옷을 즐겨 입었죠. 이 영화에서 계속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나오는 그녀의 모습과 겹칩니다. 참, 그녀는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의 마일스 데이비스와 연인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제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유로피안 재즈의 모든 것>에 모습을 잠깐 드러내는 것 같군요.

ps2. 이 영화는 멜빌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의 각본이 아닌 남의 시나리오로 연출한 영화입니다. 아마도 스토리와 스타일이 서로 어긋나는 듯한, 좀 안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장르도 장르지만 그 이유가 큰 걸까요? 멜빌의 다른 영화들을 보지 못해서, 다른 영화들 중에도 이런 어긋남이 보이는 게 있는지 모르겠네요. 멜빌전이 다 끝나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할텐데… 멜빌 전은 벌써 중반을 달리고 있고, 전 이제 이 영화 한 편만 본 상태랍니다. 제발, 다음 주엔 영화들을 볼 시간이 나야 할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