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시니스트”, 지금 당신의 잠자리는 편안하신지?


머시니스트” (The Machinist, 2004)

   감독: “브래드 앤더슨”
   주연: “크리스찬 베일”, “제니퍼 제이슨 리”

헉! 그 몸짱 “크리스찬 베일”이 어쩌다 이렇게!!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만큼 가벼운(?) 몸을 이끌고 나와 뭇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인체의 신비展’에 전시되어 있던 미이라를 대역으로 쓴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인데, 한 작품을 대하는 배우의 열정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감탄이 튀어 나오게 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주연 배우의 다이어트 비법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허접 영화가 아니다. 크리스찬 베일이 무슨 기아체험 100일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게 아닌 이상 무모한 영화를 위해 무모하게 살을 빼진 않았을 터. 영화 자체도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이라는 제목과 주인공의 지독한 불면증을 보여주듯 저채도로 처리한 화면이라던가 몽롱하고 음산한 배경음악은 진짜 불면증을 앓는 듯 핼쓱해진 “크리스찬 베일”의 모습과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몰입도를 200%로 상승시켜주고 있다.

이 영화를 한밤중에 혼자서 불끄고 다시 봤는데 엔딩 크레딧 올라가며 나오는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주 오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게 극중 주인공의 느낌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최근 영화들의 트렌드에 따라 당 영화도 관객의 ‘뒤통수 가격하기’장르에 한쪽 발을 푸욱 담그고 있지만, 솔직히 이거 영화의 절반 이상 보고 있노라면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알아챌 수 있다.

일찍이 중국에서 거주하시던 맹자와 순자 할아버지는 인간의 본질을 인수분해 하여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이란 이론으로 요점정리 하셨더랬다. 요즘 일부 초딩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버르장머리의 기개를 보노라면 순자 할아버지의 팔을 번쩍 들어주고 싶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개념없는 교육정책과 교육열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맹자 할아버지 말도 맞는 듯 하다.

여튼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쉽게 악에 물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래도 돌아가고 있는 건 우리 가슴 속에 죄책감이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영진공 self_fish

머시니스트 (El Maquinista, 2000),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자체로도 충격적인 영화.”


흑백에 가까운 칙칙한 색감과 주인공의 과거를 되집어 나가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2002)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감추어진 과거의 기억이 수많은 데자뷰를 통해 단절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머시니스트>는 좀 더 난해한 공포물의 느낌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겪은 1년 간의 불면증과 결벽증, 심각한 수준의 체중 감소, 그리고 여러 정신 착란 증세들의 근본 원인이 속시원히 밝혀지지만 그것은 이제껏 보지 못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무엇이라기 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위안으로 자리 잡는다.

사실 <머시니스트>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이 영화를 위해 30kg을 감량했다는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그 자체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쯤되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예전에 <정사>(Intimacy, 2000)에서 케리 폭스의 연기를 봤을 때에도 새삼스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배우도 엄연한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연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크리스챤 베일의 성취와 연기에 힘입어 <머시니스트>는 보기 드문 강한 설득력으로 무장한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작된 주인공의 길고 긴 내면적 고통의 깊이가 관객들에게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배우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되찾은 영혼의 안식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머시니스트>의 에필로그는 바로 이러한 부분의 정점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