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을 알아 본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나는 무슨 낙으로 살죠?”
그래, 인생에 낙이 없으면 뭐하고 살지? 각자의 대답이야 다르겠지만 극 중에서 이우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예전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꼭 한번 만나고 싶다”를 보다 보면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런 건가? 더 사시면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인 건가.

“매기(Maggie Fitzgerald)”는 서른 두 살이 되었다.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고 그다지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꿈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남긴 고기를 몰래 집으로 싸가지고 가 허기를 때우면서라도 자기의 꿈을 위해 돈을 모았고,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리라 믿는 이를 계속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버스 안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참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에디(Eddie “Scrap-Iron” Dupris)”는 퇴물복서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복서시절의 상처로 한쪽 눈이 먼 채 체육관 청소를 하면서 산다. 잘 곳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체육관 한 켠에서 생활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에겐 꿈이 없다, 아니 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겐 낙이 있고 여한도 있다.

그의 낙은 꿈이 있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 경기를 해보고 싶다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한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디”는 “매기”를 알아본다. 자기에겐 없는 꿈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그녀의 존재감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 그게 그의 낙이니까.

“매기”는 그저 앞을 향해 뛰어갈 뿐이다. 꿈을 좇아 뛰는 그녀에겐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다시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등의 고민은 없다. 꿈을 이루려면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는 게 즐거울 따름이니까.

그렇게 “매기”는 꿈을 이룬다. 딱히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기의 삶에 그만큼이라도 찾아와주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 꿈은 대가를 요구했고 그녀는 그걸 치러야 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아니 남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면서 그녀의 꿈보다 더 크고 탐스런 걸 얻는 이도 많지만 “매기”는 그런 건 크게 억울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꿈은 내 것이고 나는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거니까.

“에디”는 “매기”가 꿈을 이뤘다는 걸 안다.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못 이룬 그이기에 그녀가 이룬 꿈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꿈을 이룬 대가로 더 이상은 꿈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에 “에디”는 그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낙도 없고 여한도 없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는 알아채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런 답을 적지 못할 것이다. 언제쯤 그 답을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나의 등 뒤에서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재미 없다. 너무 실망이야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그 분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 분은 아마도 아직 삶 속에서 쓰라린 아픔이나 꿈의 절실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리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이 영화가 그닥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게 느껴졌으리라 내멋대로 해석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걸어 나오던 내 머리 속에는 내내 “매기”가 버스 안에서 짓던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꿈을 바라보며 아무런 꾸밈없이 해맑게 웃는 그 미소가.

영진공 이규훈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아이리쉬 코드들




미국에서 소수인종학을 가르치고 있는 일레인 김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썼던 글이, 나의 뿌리,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민족주의로 결론을 맺는 걸 보고 허걱!한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미국 땅에서 원래부터 기득권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는 굳이 민족의식, 자신의 뿌리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인종과 민족이 섞이고 여러 혈통이 섞인다 해도,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네를 이루고 결혼하고 사는 경우가 많고, 그 동네별 출신별 특성이란 게 결국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고난과 차별을 당하고, 한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나라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긍지와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신뢰와 사랑으로 뭉친 유사 가족이 피로 이어진 전통적인 가족을 대체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도 꿈을 찾는 사람들이 나누는 최고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 ‘여성 복싱’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진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플롯에서 풀어내지만, 매끈하게 잘 만든 영화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노인의 지혜와 따스한 사랑이 곳곳에 배어있을 뿐 아니라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훌륭한 테크닉까지.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 내,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그토록 오랜 고난과 한을 쌓아온 아일랜드계, 즉 아이리시들의 주체성이나 긍지 같은 걸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영화에서 나오는 아이리시 코드를 살펴보고, 우리가 접해온 수많은 다른 영화들의 아이리시 코드를 잠깐 디벼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1.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드러나는 아이리쉬 코드들

먼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모태가 된 책, “불타는 로프(Rope Burns: Stories from the Corner)”를 쓴 F.X.툴은 아일랜드인이다. 당연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역할을 맡은 영화의 주인공 프랭키 던 역시 아일랜드 계통. 그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의 퉁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게일어(아일랜드 전통어)를 들여다보고, 게일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 예이츠의 시를 즐겨읽는다.

미국식으로 퓨전화된 레몬파이가 아니라, (정통 아일랜드 식의) ‘수제’ 레몬파이를 먹는 게 인생의 낙이었기도 하고. (매기와 함께 레몬파이를 먹고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건 먹는 것 갖고 오버한 거라기보다는 그런 향수를 표현한 것일 게다.) 그리고 … 매기 역시 아이리시다. 미국인 이름들 중 ‘오하라 O’hara’나 ‘맥도날드 McDonald’, ’피츠제럴드 Fitzgerald’처럼 O’나 Mc, Fitz로 시작되는 라스트 네임은 그가 아일랜드 계통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원래 “~의 아들”이란 뜻.)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프랭키가 매기에게 선사하는 ‘모쿠슈라(Mo Cuishle)’라는 말은 게일어, 즉 아일랜드어인데, 이 이름이 새겨진 가운을 처음 입고 등장한 경기 장면에서, 그녀의 등판의 글자를 보고 관객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등판에 글씨 봤어?”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신기하고 특이한 이름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름이 바로, “나는 자랑스러운 아일랜드인”이라는 선언문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녀가 처음 그 이름을 걸고 나선 그 경기가 바로 영국땅에서 벌어진 영국 챔피언과 싸우는 경기였기 때문에 아이리쉬 관중들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가 됐던 것이다.

아일랜드인 소설 원작자가 굳이 모쿠슈라의 첫 경기장으로 영국을 택한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른 유럽 원정경기를 생략한 채 이 장면을 스크린에 담은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쿠슈라의 가운 색, 초록색은 아이리쉬의 최대 명절인 성 패트릭 데이의 상징색이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며, 그 날을 기념하는 성 패트릭 데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초록색과 네잎 클로버이다. 그냥 초록색이면 우연한 선택일 수 있지만, 게일어로 된 별명이 새겨진 초록색 가운은, 그냥 초록 가운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리시를 상징하는 가운인 것이다.



이후 경기장마다 모쿠슈라를 환호하는 사람들은, 그저 권투 잘 하는 선수 하나를 응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아이리쉬의 전통을 내걸고 아이리쉬의 긍지와 주체성을 전면에 표현한 자신들의 대표주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헤비급이건 뭐건 미국에서 차례대로 선수들을 이기는 어떤 황인선수가 영어로 된 이름이나 단어가 아닌 한글로 “내 사랑”이라고 쓴, 청색과 붉은 색이 섞인 가운을 입고 매 경기에 출전한다면, 그리하여 첫회 KO승으로 연승을 거둔다면, 미국 내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밑바닥 한국 출신 미국인들에게 과연 어떤 긍지와 자부심을 줄지 말이다.

어쩌면 매기가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다 이긴 게임에서 결국 상대의 반칙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고단하고 한 많은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2. 다양한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고난과 한의 이름, 아이리쉬

원래 영국 본토에서 살고 있던 토박이들은 켈트인(혹은 셀트인)들이다. 아이리쉬의 선조들. 하지만 이 땅에 앵글로-색슨 족이 들어오면서 땅을 두고 싸우게 되고, 결국 켈트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역사적 저항과 반발심이 만들어낸 켈트 영웅이 바로 아더왕이다. 작년에 개봉한 “클라이브 오언”의 『킹 아서』은 바로 이 시기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적인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아더를 비롯해 갤러해드, 랜슬롯 등의 원탁의 기사들과 귀네비어가 모두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켈트인들, 그것도 여러 핏줄이 섞이기 이전의 켈트인들이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에서 주도권을 차지한 앵글로-색슨 족은 일찌감치 왕조를 열었고, 켈트인들은 잉글랜드로 흡수되거나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고 또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에 모여살게 되는데, 특히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은 지리적 특성상 자신들의 문화를 강하게 보존해오게 된다. 영국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합병해 브리튼 제국을 경영하게 된다. 노르만인이 앵글로-색슨 왕조를 접수한 이후에도, 아일랜드는 영국 왕에 따라 때로는 브리튼 왕의 간섭을 받는 자치 왕(종주왕) 하에 자치를 하기도, 영국 본토의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결코 독립을 위한 봉기를 멈춰본 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영국 왕이 국교를 영국 국교로 전환하고 난 후에도 아일랜드인들은 카톨릭을 고수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인 대다수에겐 위대한 왕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착취와 차별과 직접통치, 그리고 개종을 강요한 왕인 것이다.

1800년에 아일랜드가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통합된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결국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루어내어 아일랜드 공화국(그 이전은 에이레, 수도는 더블린)을 성립하긴 하지만, 이것은 아일랜드 섬의 일부일 뿐이다. 여전히 독립 자치국이 아닌 영국령으로 있던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이 잉글랜드의 본토인들을 역사적으로 계속 이주시켜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혼재되어 있었고, 독립을 외치는 아일랜드인과 영국령에 속하기를 원하는 잉글랜드인 사이에 여러 모로 민족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남-북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IRA와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잉글랜드인들 사이의 반목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분쟁’의 배경인 것이다.

우리가 ‘피의 일요일’이라 알고 있는 사건 – 영화 『블러디 선데이』, U2의 노래 “Sunday Bloody Sunday” 등 – 역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아일랜드인들을 향해 영국 군대가 총칼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더 복서』 등을 감독한 “짐 쉐리단”의 일련의 작품들이나 “테리 조지” 감독의 『어느 어머니의 아들』은, 바로 이러한 긴장 속에서 아이리시들이 부당하게 받은 탄압을 고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편이니 과연 아일랜드 사람들의 박탈감이 어떻겠는가. 영국 본토에 의해 계속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계속 독립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더욱 영국 본토에서 아무리 개발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한들 아일랜드는 여전히 못 살고 가난한 동네에 불과할 뿐이다. 영국 내에서도 변방에 변방일 수밖에 없는. “알란 파커”감독의 전설적인 음악영화 『코미트먼트』의 주인공들은 바로 음악을 통해 삶의 희망을 갖고자 하는 아이리시 청년들이며, 이 영화에서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흑인이다”라는 대사까지 나오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IRA, 즉 북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단체가 무장 투쟁하는 것 역시 (그들의 방식에 대한 찬반은 논외로 치더라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의외로 IRA가 등장하는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아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아버지와 갔던 곳이라며 프랭키를 데려가는 파이집 이름이 바로 IRA ROADSIDE DINER이다. IRA는 ‘아이라’라는 여성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IRA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존 부어맨” 감독의 『제너럴』은 어떨까?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더블린이다. 바로 아일린드 공화국의 수도. 『제너럴』의 영어가 도통 알아먹기 힘든 영어인 것은, 아이리시의 ‘사투리 영어’이기 때문이다. ‘장군’이라 불리던 도둑왕 마틴 카힐이 총을 맞는 것은 IRA한테서인데, 그가 아일랜드의 보물격인 명화들을 바로 왕당파 – 즉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 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닐 조단” 감독의 경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헌신한 아이리시 영웅 마이클 콜린즈에 관해 만든 영화가 바로 “리암 니슨”이 열연한 『마이클 콜린즈』. 『크라잉 게임』은 좀 별난 로맨스가 아니라, 사실 매우 정치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영화다. 우리의 주인공 스테판 리가 바로 IRA의 일원이며, 그가 억류했던 영국인 병사인 포레스트 휘태커는, 정통 앵글로-색슨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만나게 되는 제이드 데이비슨은 흑인 혼혈에 트랜스젠더. 이쯤 되면 이 영화는 결국 정치적인 거대담론 때문에 정작 싸우고 죽이고 죽는 건 소수자들끼리일 수밖에 없는 모순을, 사랑을 통해 화해를 시도하는 영화가 아닌가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미국으로 가보자.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미국땅에 발을 딛는 건 19세기 발생한 감자기근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인들은 미국행을 택하기도, 영국행을 택하기도 했지만, 영국으로 갔던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정부에 의해 미국행을 강요받았다. 이 결과 이 시기에 대규모 아이리시의 미국 이민이 이루어진다. 고국에서 재산깨나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야 새로운 신천지 미국땅에서 새로운 농장을 일구며 부를 축적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건 당연한 일. 아마도 아일랜드 이민사에 대해서는 “톰 크루즈” 주연의 『파 앤 어웨이』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리시들은 미국에 막 이민왔던 당시 ‘흑인 금지’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인 금지’ 팻말의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인종차별은 언제나 가난과 함께 심화되는 법. 그렇기에 그런 삶은 소방관이나 경찰처럼 말급의 공무원 진출이나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암흑의 세계에도 빠르게 진출한다. 지금이야 미국 갱영화 하면 『대부』를 비롯한 이탈리아 계통의 마피아를 떠올리지만, 『대부』의 알 카포네가 자기 권력을 확립하면서 축출해낸 이전 갱이 바로 아이리시 갱 두목인 오배니언이었다. 코엔 형제의 걸작 누아르 『밀러스 크로싱』은 바로 아이리시 갱들 사이의 세력다툼에 관한 영화이다. 갱과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했던 영화들, 예컨대 『워터프론트』 같은 영화는 바로 아이리시 갱과 아이리시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하는 영화들이다.

미국영화에서 또 재미있는 건 경찰과 소방관들이 대강 아이리시인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지금도 미국 전체 경찰의 1% 이상이 아이리시라 한다.『분노의 역류』에서 소방관들의 장례식에 백파이프가 동원되는 건, 미국의 소방관들의 꽤 많은 퍼센테이지가 아이리시이기 때문이다. (‘백파이프’하면 바로 생각나시리라.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푸른 곰과 싸우는 웰터급 타이틀 매치를 할 때 프랭키가 “밴드도 불렀다”며 백파이프 연주자들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장면을.)

이는 가난하고 전문기술이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위해 선택한 직업들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서부극에서 유난히 아이리시들이 많이 활약하는 현상도 이해가 된다. 대거 이민 당시 벌어진 남북전쟁에 아이리시들이 참전을 많이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이 서부를 떠돌게 된 것.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의 영웅 “존 웨인”이 바로 아이리시다.

그뿐 아니라 “존 포드” 그 자신이 아이리시로, 이 사람은 심지어 자기 사촌이 IRA 일원이었고, 아이리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러한 정체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만들어낸 감독이다. 그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전형적인 ‘아이리시 성격’이며, 심지어 서부극이 아닌 “존 포드”의 영화 『분노의 포도』에서 극단의 빈곤으로 이곳저곳을 유랑하고, 그 와중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주인공 역시 아이리시 가정의 아이리시인이다.

원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90% 이상이 카톨릭을 믿는다. 주로 미국에서 터를 잡은 대다수의 아일랜드 출신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백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닌 성당인 것. 아이리시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들에 성당씬이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교회’가 아닌 ‘성당’이, 목사가 아닌 ‘신부’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리시 계통이기 때문이다.

3. 소중한, 나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렇게 아이리시 코드들을 살펴보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가 매기를 향해 모쿠슈라, 즉 “내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조금 더 다면적으로 다가오고, 또한 사람들이 그토록 ‘모쿠슈라’를 연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조금더 짠하게 다가온다. 혹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매기가 경기를 벌이는 경기장 안에서 그녀를 응원하는 관중들이 심지어 아일랜드 국기를 들고 있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성이 더욱 드러난다.

아일랜드 국기

실제 자신의 피를 나눈 딸과 소식이 끊겨버린 그에게 ‘의붓딸’과도 같은 매기는, 아이리시들 특유의 문화습성을 가지고 있긴 해도 특별히 자기 뿌리에 대한 열망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팬들이 주로 아이리시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고, 병상에 누워서는 프랭키에게 “또 그놈의 잘난 게일 책 봐요?”라고 묻는다. 게일어 책을 노상 들여다보고 예이츠의 시에 심취한 프랭키와는 완전히 다르다.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의 전통문화유산을 영국의 문학 전통에서 새로이 정립하고자 했던 흐름에 서 있다.) 이들이 유사 부녀간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보수적인 사람으로 하여간 아들래미가 아닌 새로운 딸래미를 훈련시키고, 또 안락사하게 하는 정이란, 시대의 변화를 맞이한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에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아주 흐릿하게, 아이리시로서의 정체성이 놓여있고.

원래 민족주의란 보수적인 것이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 ‘우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우리’를 만들어가는 테두리를 어떻게 놓을 것이냐에 따라, 유연성있는 보수와 꼴통 보수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겐, 제대로된 보수주의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립다. 똥배짱 부리면서 자식들을 쥐어패는 보수주의자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접고서 자식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또한 다른 이를 기꺼이, 자신의 가족으로, 혈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의 보수주의가 놀라운 건, 원래 제대로된 보수주의가 그래야 하듯 넓디넓은 포용력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어느 한 구석은 찜찜한 느낌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두 번 전율했는데, 한 번은 이 영화가 너무나 완성도 높은 걸작이기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가족주의와 가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4. 맺으면서

미국이란 나라는 내가 어느 민족 출신이냐보다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냐가 더 중요한 나라다.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살려면 그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흔히 재미교포 2세, 3세가 한국어도 못한다고 욕하는 한국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으로 가족나무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미덕, 그것이 특히 눈으로 척 보기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이다.

다양한 문화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유한 문화습성을 서로 알고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공존’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살펴본 아이리시 코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해서 일관되게 나타나긴 하지만, 아이리쉬가 아닌 이들을 배척한다거나 미국 내 소 아일랜드를 세우자는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와중에 자신의 뿌리라는 걸 조금 더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막말로 아이리시가 아니라고 해서 매기의 팬이 못되는 것도,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감동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흑인인 윌리와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얼마든지 그 체육관에, 가족 비슷하게 받아들여졌고 말이다

이 글은, 어차피 한국에서만 살 사람이라면 별로 읽을 필요도 없지만, 미국영화를 조금 더 재미있게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며 쓴 글이다. 이런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 글에서 짚어본 아이리시 코드를 과도하게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연결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 참고서적 :
   박지향, [영국사 –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오치 미치오 외, [마이너리티의 헐리웃]


 


영진공 노바리


 


 

그랜토리노 (Gran Torino),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 이번 미국 아카데미 측의 최대 실수는, <그랜 토리노>(2009)를 주요부문에 단 한 개의 후보도 올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2009)의 작품상 수상에 이의 없지만 <그랜 토리노>를 제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를 후보에 올린 건 명백한 실수이며 숀 펜(<밀크>(2009))의 남우주연상 수상에 박수를 보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탈락시키고 브래드 피트에게 후보자격을 준 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랜 토리노>와 이 영화에서 영감님이 보여준 연기를 ‘찬양’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코왈스키가 타오를 만났을 때

<그랜 토리노>에서 영감님이 맡은 역할은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월트 코왈스키로, 해리 칼라한(<더티 해리>(1971))이 나이를 먹으면 됐음직한 인물이다. 첫눈에 봐도 냉혹한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손녀의 배꼽티가 맘에 들지 않고 아들이 일본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것이 불만이며 이웃이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한마디로 이것이 미국의 ‘변화’된 현재라서 화가 나는 것. 그래서 코왈스키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이다. 50년 이상 근무했던 포드社의 1972년형 그랜 토리노를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모습은 과거의 미국적 가치를 지키려는 코왈스키의 상징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의 연출 목적에 대해 “코왈스키를 통해 미국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원래 이 영화의 배경은 시나리오 상에서 미네아폴리스였다. 이를 이스트우드가 죽어가는 자동차 산업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트로이트로 바꿨다. “이는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된 사회적 이슈였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경제는 불황을 겪고 있고 실업률은 매우 높으며 갱들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범죄와 폭력은 일상이다. 그 세계에 씁쓸한 참전 군인이자 포드社 노동자 출신인 코왈스키가 살고 있다는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미국의 현재에 변화를 가져온 범죄와 폭력은 코왈스키에게는 대척점에 서있는 가치다. 그것들이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수록 역설적으로 그는 또 다른 변화, 즉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변화가 코왈스키에게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되는 과거로의 퇴행이 아닌 말 그대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전진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랜 토리노>는 변화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코왈스키가 변화를 위해 지독한 편견을 버리고 대립각을 세우던 이웃과 융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그 대상이 흥미롭다. 코왈스키가 그렇게 혐오하는 흐멍족 이민자 소년 타오(비 뱅)다. 그가 다른 이민자와 다르다면 ‘소속감’이 부재하다는 점인데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흐멍족 소년에게서 코왈스키는 올바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 이는 코왈스키의 보수주의자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그가 이민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건 백인과는 다른 유색인종이라서가 아니라 도대체가 미국시민으로 융합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의 원, 즉 커뮤니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코왈스키의 입장이다. 안 그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영화에서 보여준 세계는 순환하는 원과 다를 바 없었다. <체인질링>(2008)에서 보여준 1928년 LA 공권력의 거대한 부패는 2009년 현재에도 재현된 역사의 순환이었으며 <아버지의 깃발>(2007)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7)는 미군의 시각과 일본군의 시각이 개별적 존재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화로 짝패를 이룬 하나의 세계였다. <그랜 토리노> 역시 다르지 않다. ‘구세대’ 코왈스키와 ‘신세대’ 타오가 미국의 새 역사를 모색하기 위해 손을 잡는 말 그대로 순환구조로 이뤄져있다.

코왈스키에게 현재의 그랜 토리노는 주인을 찾지 못해 운행을 중단한 미국(의 가치)이다. 그가 호시탐탐 그랜 토리노를 노리는(?) 친자식들에게, 그리고 이웃의 젊은 갱들에게 차를 넘기지 않는 건, 그러니까 정신 나간 고집쟁이 늙은이 같은 행동을 고수하는 건 그들이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전시물에 불과한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건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백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온갖 인종이 들끓는 미국의 미래는 젊은 유색인종들에게 달렸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하여 나의 조국 미국을 지켜야겠다는 코왈스키의 보수적 신념은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닌 교화와 융화를 통한 발전적 모색으로 변모한다. 코왈스키에게 열쇠를 물려받은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미국이라는 세계의 마침표이자 출발점인 셈이다. (장례식으로 시작해 디트로이트 중심가 배경으로 영화를 마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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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가 프랭키를 만났을 때

이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는 영감님의 평소 철학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에게 ‘고전주의자‘라는 명칭이 붙은 건 기교와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그의 신작이 항상 전작과 비교해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10년 전, 20년 전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눈에 띄게 뚜렷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코왈스키의 거친 면모 때문에 한때 <더티 해리> 시리즈의 최종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건데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1970년대를 주름 잡았던 <더티 해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2009년 버전 해리 칼라한인 월트 코왈스키는 성난 청년에서 사려 깊은 노인으로 성장한 이른바 ‘어른의 초상’이다. <그랜 토리노>의 까칠한 코왈스키가 보여주는 즉각적이고 마초적인 행동은 그의 전부라고 하기엔 무언가 사연을 감춘 듯한 인상이 짙다. 해리 칼라한이었다면 그런 행동은 오로지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코왈스키에게는 이제 반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코왈스키가 한국전 참전 당시 행했던 정당하지 못한 일로 심각한 내적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50여 년간 마음에 심어두었던 반성의 씨앗이 책임감이라는 신념을 통해 숭고한 희생의 열매를 맺으니 이야 말로 어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찰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코왈스키는 해리 칼라한이 나이를 먹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프랭키로 변모한 인물이다. 권투도장 관장 프랭키는 지금껏 여자는 단원으로 받은 적 없는 지독한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슴 아픈 가족사에 자신의 사연이 겹치며 책임감을 느껴 그녀와 팀을 이룬다는 점에서 코왈스키와 흡사한 인물인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더티 해리>와 비교해 크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만큼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서서히 진화해왔다. 알려진 바대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로 감독 데뷔한 그는 20년 만인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작가의 위치에 올랐다. 이와 관련, 인상적인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르영화들을 하면서도 특정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장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지점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갔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영화 뿐 아니라 그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영감님의 영화처럼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이라는 지혜가 쌓여갈수록 서서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황한 설명 필요 없이, <그랜 토리노>의 코왈스키에게는 평상시 욕을 섞어가며 허물없이 지내는 이발소 친구 마틴(존 캐롤 린치)이 등장하는데 그는 <더티 해리>에서 조디악 킬러를 연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에서도 주요한 용의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형사와 범인의 관계였던 코왈스키와 마틴이 <그랜 토리노>를 통해 죽마고우로 등장한다는 설정은 노인이 된 이들이 지금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려 깊은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트우드 영화의 백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이 힘이 느껴진다는 것. <더티 해리>가 폭주하는 청년의 영화(캐릭터)였다면 <그랜 토리노>는 한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어른의 영화(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성형의 영화라고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세월이 쌓여갈수록 늘어나는 나이테의 지혜가 영감님의 영화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30년생인 그의 나이 올해로 79세. 배우로써는 은퇴일지도 모를 <그랜 토리노>지만 그는 현재 넬슨 만델라를 다룬 차기작 <휴먼 팩터>의 촬영에 들어갔다. “은퇴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즐겁습니다. 영화를 그만 두고자 했다면 벌써 그랬겠죠. 어머니는 2년 전 97살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여전히 20년 가까운 창작력이 남아 있겠죠.” <그랜 토리노>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세계지만 여전히 영감님의 세계는 ‘어떤’ 완성을 향해 진화하는 중이다. <그랜 토리노>를 지금 막 보고서도 여전히 그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 본문에 인용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판에 등록된 글의 일부로, <듀나의 영화게시판>에 올라온 srv님의 번역문을 부분,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