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게임 셧다운제와 청소년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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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게임이용시간을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제한하자는 소위 “게임셧다운제” 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밤 12시 이후에는 청소년 이용자들의 게임접속을 차단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자는 것이다. 비록 지난번에는 소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이 안건은 조만간 실제로 구현될 기세다.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70903264532134&linkid=4&newssetid=1352 ]

어떤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과연 이런 법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결과가 기대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뭐든 실제로 저지르기 전에 생각을 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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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시작되어 1848년에 비로소 마무리된 프랑스 혁명의 근본 이념이 자유ㆍ평등ㆍ박애임은 다들 아실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이후 ‘선택의 자유’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마무리되는데 60년이 걸린 프랑스 혁명처럼, 이 자유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뿌리내리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온전한 인간 즉,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유의 수유, 배변훈련, 도덕성의 습득,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었다. 다시 말해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기위생을 관리하고, 양심이 있고 어른 구실하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쯤 후에 태어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은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바로 자기정체성identity이 그것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주체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에릭슨은 우리가 진정한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와 1902년에 태어난 에릭슨 사이에는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중시하지 않았다. 무의식의 힘을 중시한 그에게 자유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봉건사회에서는 주어진 도덕률에 순응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사는 인간이면 충분했다.

반면에 에릭슨에겐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근거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다.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성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와 에릭슨, 둘 사이에는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가 있다.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는 이유는, 이 문제에는 우리가 청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컴퓨터 게임 중독을 ‘영혼을 파괴하는 병’이라고까지 부른다. 물론 게임 중독에 빠져서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사례들을 보자면 이런 표현이 지나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것이라 단정하기 전에 그 영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영혼’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봉건시대에는 신이 부여한 인간의 기본 속성인 양심이나 죄책감 혹은 신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인간을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에서 영혼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의미한다.


물론 도덕성도 중요하고 양심도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는 로봇이나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태도에서도 차이를 만든다. 전근대적인 청소년 육성은 엄격한 훈육을 통해 도덕관과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반면에 근대 시민사회의 청소년 육성은 자유의지를 인식하고 다룰 수 있는 성인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의 인권, 특히 참여권이 중시되는 이유는 청소년에게 자율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경험해본 이들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대부분의 규제들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에서 점차 자율규제 방식으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에도 반영되어 있다. 청소년정책은 초기에는 신체적인 육성이나 청소년 보호 중심의 정책이었으나 1989년에 제정된 『청소년육성법』을 계기로 청소년활동을 강조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청소년 중심적인 정책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들의 권리를 강조한 『청소년기본법』을 통해 좀 더 선진적인 태도로 발전되어왔다. 즉,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훈육 중심의 청소년 육성에서 청소년의 자율권을 인정하고 강화함으로써 시민의식과 민주의식을 가진 성인으로 키워내는 방향으로 변화해온 것이다.

 




이 달의 우수게임 시상식 -.-;;;

이제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자.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 제도의 핵심은 청소년들의 활동에 강제적인 시간규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게임을 언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국가가 부분적으로 청소년 대신 선택을 해주는 것이 이 제도의 기본 목적이다.


물론 청소년들의 수면시간을 보장하고 과도한 게임이용으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청소년 게임이용에 관한 여러 가지 법적ㆍ제도적 규제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이렇게 과격한 규제를 시도하려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자유의지를 가진 청소년 육성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역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에 셧다운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게임들

만약 이런 법안이 발효된다면 청소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남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상태로 12시 이후에는 잠을 자거나 혹은 시험공부를 하는 방법이 첫 번째 선택이다. 아마도 잠을 못자고 공부를 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쨌든 게임은 못한다.


두 번째 선택은 법적 규제를 무시하고 12시 넘어서까지 하고 싶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불가 게임에 자기 부모의 주민번호로 접속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두 가지 모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첫 번째 선택은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범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짜투리 시간에 마땅히 다른 할 거리가 없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짜릿하고 즐거운 활동들을 하다가 가끔씩 게임도 할 수 있는 삶을 누리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 시간 규제가 아니라 다양한 청소년활동프로그램의 제도화와 함께 지나친 입시경쟁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나 역시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12시가 아니라 10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강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길 바란다.


혹은 최소한 부모와 자녀간의 약속이나 부모의 권위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우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유로운 시민이다. 자신이 혹은 자기 자녀가 몇시까지 게임을 할지 조차 국가의 규제에 맡기겠다는 생각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현과 동일하다.


우리가 청소년들의 ‘영혼’을 걱정한다면 특히 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영혼이 파괴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게임 중독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저 강제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게임셧다운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태국과 중국이다.
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시나… 중국은 아실테지?
지금 우리가 태국하고 중국 따라하잔 얘긴가?



  

영진공 짱가

지능검사의 역사 (1), 최면술에 열광했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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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는 1857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1878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비네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하면서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심리학 책을 빌려 읽으며 독학으로 심리학을 공부했다.

1883년에는 프로이트도 배웠던 샤르코의 최면술에 열광해 최면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그런 사이비 과학에 부화뇌동했다는 이유로 학계로부터 사과요구를 받기도 했다. 1885년과 1887년 두 딸이 태어나자 비네는 관심을 최면술에서 인간의 성장으로 옮겼고 그 이후 자신의 두 딸이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던 21년간 실험심리학, 발달심리학, 교육심리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비교 심리학 분야에 대한 책을 2백권 넘게 저술했다.

비네가 자기 딸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며 얻은 심리학적인 통찰은 이후 지능검사를 개발하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한데, 비슷한 사례는 삐아제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발달심리학을 연구 하려면 자녀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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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코의 최면치료를 묘사한 유명한 그림. 사실 이 그림 밖에 없는 듯 …

비네는 이후 연령별로 아이들의 지적인 능력이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인 테오도르 사이먼Theodore Simon과 함께 먼저 여러 연령대의 정상적인 아이들과 비정상적인 아이들을 선발한 다음, 이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풀어보게 하면서 그 나이 또래의 정상적인/비정상적인 아이들이 각각 뭘 할 수 있고 뭘 못하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했다. 이를 통해서 연령별로 아이들의 지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검사항목을 만들었다.

검사항목 중에는 단순히 검사자와 악수를 할 수 있는지, 혹은 불켜진 성냥의 움직임을 쫒아가며 시선을 옮길 수 있는지와 같이 아주 쉬운 문제도 있었고, “옆집에 낯선 손님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사가, 그 다음에는 변호사가, 가장 최근에는 신부님이 다녀가셨다. 옆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와 같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다들 아시겠지만, 이 문제의 답은 ‘옆집의 어른이 죽어간다‘이다. 위독하기에 의사가 다녀갔고, 유언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변호사가 필요했고, 종부성사를 위해서 신부가 다녀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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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게 뭘까?

그러던 중 1904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아동심리 전문가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지체아동을 어떻게 찾아낼 것이며 그 아동들에게는 어떤 특수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를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최초로 보통교육을 실시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국민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민을 표준적인 보통교육을 통해서 기본적인 상식과 공통적인 의식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교육 시스템은 몇 살짜리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표준적인 교육안을 필요로 했는데 아무도 각 연령대의 아이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1900년대 당시에는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다음 셋 중 하나로 구분되었다. 아예 혼자서 생활을 할 수 없는 백치(idiots), 도움을 받아 혼자 생활이 되지만 학업은 불가능한 치우(imbeciles), 학업이 가능하지만 특수교육이 필요한 약질(debiles). 그런데 이 세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에 따라 같은 아이의 진단도 다르게 나왔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위원회가 설립된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비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기초로 공립학교에서 표준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즉 특수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검사도구를 만들었다. 이것이 최초의 지능검사였다. 이 검사는 이후 6년간 꾸준히 수정 보완되어 마침내 1911년 최종판이 완성되었으며, 그와 동료인 사이먼의 이름을 따서 비네-사이먼 검사라고 불린다.
 


비네-사이먼 지능 검사 도구

이 비네-사이먼 지능 검사는 원래 검사자와 검사 대상 아동이 1대 1로 실시하는 개인용 검사였다. 지능 검사의 내용은 3세부터 15세 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같은 연령대의 정상적인 아이들에 비해서 얼마나 지능이 더 높거나 낮은지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앞서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각 연령대에 해당하는 정상적인 아이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의 목록을 가지고 비네는 그 연령대 아이들의 지능 표준을 만들었다. 이렇게 연령 단위로 아이들의 지적인 능력을 측정했기 때문에 비네의 지능 검사는 IQ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정신 수준(Mental level)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정신 수준을 산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3살 짜리 아이가 표준적인 3살짜리 아이들이 풀 수 있었던 문제 10개를 모두 푼다면, 그 아이의 정신 수준은 3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표준적인 3살짜리 아이들이 풀 수 있었던 문제들 중에서 절반을 풀지 못한다면, 그 아이의 정신수준은 3살에 미치지 못하며 2.5 정도에 해당한다. 만약에 표준적인 3살짜리 아이들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전부 풀고 4살짜리 아이가 풀 수 있는 문제 중에서 절반을 푼다면 그 아이의 정신수준은 3.5가 되는 것이다.


정신수준 개념

이제 인간의 지적능력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려는 노력의 첫번째 성과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지능 즉 아이큐가 되기까지는 아직 몇단계를 더 거쳐야 했다.

영진공 짱가

“샤이닝”, 내 속의 또 다른 나

공부하면서 읽은 발달심리학 책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부분의 서두에 인터뷰 기록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은 “너는 누구니?” 라는 질문에 대해서 4살짜리와 8살짜리, 그리고 13살짜리가 한 대답을 녹취한 글이었다.

4살짜리는 아주 천진난만하다. 내 이름은 아무개이고, 나는 오렌지색 강아지와 아빠 엄마와 누나 둘이랑 같이 살고, 나는 힘도 세고 알파벳도 하고 숫자셈도 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자랑한다. 물론 그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못하고 숫자셈도 잘 못한다만, 상관없다. 이 나이때는 세상의 중심은 자기자신이니까.

8살짜리는 4살짜리와 약간 다르다. 남이 어떻게 보던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신나게 떠들던 4살짜리와는 달리 이 8살짜리 아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나는 아주 인기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인기는 내 능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인기를 얻기는커녕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고, 혼자서는 인기인이 될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다.

즉, 인기는 내가 보는 나(철학자들은 이것을 주관적 자아라고 말한다)가 아니라 남들이 보는 나(이것은 객관적인 자아이다)의 문제이다.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은 내 언니를 더 예쁘다고 하는 걸까 …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산수시험 성적이 나보다 좋은 애가 있을까 … 이 흔들림이 자아를 성장시킨다.

13살짜리는 더 달라진다. 그 아이의 인터뷰 첫 마디는 “나도 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자아는 간단명료하지 않다. 내 속에는 희망과 절망, 선의와 악의, 정직과 위선이 뒤섞여 존재한다. 천사와 악마는 모두 내 속에 존재한다.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by ~freys on deviantART

다중성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확히 다중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도 이 장애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영악한 범죄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증상에 대해서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내 속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숨어있다면, 이거 상당히 무서운 얘기 아닐까?

『수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의 대오각성도 결국 자기 속에 숨어있던 영웅스러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잘 아는데 결코 영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는 영웅의 반대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자기 속에 숨겨진 게 영웅이 아니라 골룸 같은 비루함이나 짐승 같은 잔인함이라면? 내 마음속의 심연에 그런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다면? 아마 그 어떤 공포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괴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그 괴물과 맞서 싸워서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면 나는 도망칠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괴물도 존재할 것이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도 하고 소설도 쓰는 한 남자가 한겨울 콜로라도산 속의 빈 호텔에 들어선다. 그는 널럴한 마음으로 폭설로 도로가 끊겨 5개월 간 휴관하는 이 호텔을 관리나 하면서 소설을 쓸 심산이었다. 그런데 호텔 지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남자가 이 호텔이 휴관할 때 임시 관리인으로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자기 가족을 다 죽였다는 거다. 얼마 후, 주인공은 호텔에 존재할 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그 살인마가 바로 당신이잖소!” 라고 말이다.


『샤이닝』은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살인마에 대해서, 내 마음속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해서, 그것이 눈을 뜨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속의 괴물을 느껴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

초보, 중수, 고수는 총잡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발달심리학자 J.R.Harris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개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마치 모래시계 모양이라고 한다.

나는 사회화는 일종의 모래시계 같은 모양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인으로 시작해서 집단의 압력에 의해 한데 묶여서 보다 비슷해진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집단의 압력은 점차 약해지고 개인차가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독특해지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의 특이함을 숨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과 달라져도 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는다 (Nurture Assumption, Ch.15)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릴적에는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가진 존재였다가, 학교에 입학하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당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면 서로서로 비슷비슷해지고, 회사에 가서도 조직문화에 적응하느라 비슷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다 점차 승진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예전에 억눌러왔던 개성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거다.

그럴듯한 얘기다.

그런데 이런 모래시계 모양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를 생각해보자.
그림의 초보자들은 정말 제멋대로 그림을 그린다.
이 규제받지 않은 상태의 그림들 중에는 후앙 미로 같은 대가의 그림과 별 차이없는 개성과 창의성이 보이는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초보다운 어설픈 그림들이다. 그러다가 그림교육을 받으면 그림 그리는 방식들이 서로 비슷해진다. 이게 중급자 단계다. 이때도 재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가끔 드러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림만 보고는 어느 그림이 누구 건지 잘 분간이 안된다. 제대로 교육을 할수록 그림간의 차이는 적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면, 그래서 그림 속에 자기의 마음을 담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면 이제 그림속에 그린 이의 개성이 녹아들게 된다. 이게 고수의 상태다.
이건 글도 마찬가지고,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어디서나 초보는 제멋대로고, 중수는 획일화되어 있고, 고수는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제멋대로가 된다. 초보의 제멋대로는 미숙하기 때문이지만, 고수의 제멋대로는 기술을 통해서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액션영화는 이런 초보와 중수, 고수의 차이를 드러내는게 매우 중요한 장르다.
총을 쥐고 겨누는 방식을 예로 들어보자. “스티븐시갈”이 총을 들고 약실을 확인하고 표적을 겨냥하는 방식은 조금씩 남들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럴 듯 하다. 그의 포즈는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어설픈 초짜 경찰이 덜덜떨며 총을 겨눌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거다.
 

실제 특수부대원들에게서도 이런 차이가 나타난다고 한다. 지난 20-30년간 FBI에서 가르치는 권총사격 자세는 계속 바뀌어 왔다. 그냥 카우보이처럼 무조건 뽑아서 쏘라고 가르친 적도 있고, 급해도 신중하게 가늠자와 가늠쇠를 정렬한 다음에 쏘라고 가르친 적도 있다(요즘은 후자란다). 쏠때도 방아쇠 울에 손가락을 걸라고 가르친 적도 있고, 그게 균형을 깨트리니까 그냥 손잡이만 마주잡고 쏘라고 가르친적도 있다. 그런데 FBI의 고참 수사관은 오래 전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이므로 이런 훈련방식의 변천과정이 그대로 몸에 배게 된다.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만의 쏘는 방식을 체화하는 거다. 반면에 FBI 훈련소를 이제 막 마친 중수급의 신참 수사관은 훈련소에서 배운 대로 총을 쥘 것이므로 동기단위로 똑같은 포즈가 될 것이다. 이런 신참 수사관들도 관록이 붙으면 자기 체형과 경험에 맞는 자기만의 자세가 저절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대로 된 액션영화를 표방한, 『쉬리』에는 정말 여러 가지 애석함이 넘쳐난다. 스토리도 빈틈이 많고, 현장요원과 분석요원의 구분도 없는 첩보기관이라는 설정도 허술하고, 특수폭탄이 필요한 이유같은 개연성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애석함 중에는 이 특수요원들의 자세도 포함된다. 어떻게 된게 북한군 특수부대나 OP 요원들이나 총을 쥐고 겨누는 자세가 아주 똑같다. 그것도 고참 신참 구분이 없다. 어떻게 남한과 북한에서 똑같은 사격자세를 가르치겠는가, 그리고 “최민식” 같은 실전에서 잔뼈가 굵은 요원과 “한석규”의 자세가 같겠는가…. 뭐 나름대로 영화 촬영 전에 총기관련 훈련을 받은 결과라지만, 그래서 홍콩영화처럼 양손으로 쌍권총 난사하는 말같지 않은 장면을 없앴다고 자찬을 하더라만, 제대로 된 액션연출이 되려면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한 거다.
 

『쉬리』만 그런게 아니다. 사실 그 이후에 나온 총기를 다루는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초보수준의 자세(이건 아예 훈련도 안시킨 거다)이거나 중수 수준의 자세에 머무른다. 거기엔 다양성도 없고 개성도 없다. 그냥 총을 쏘는거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총을 다루는 기본만 가르치고(쏠 일이 없을때는 반드시 방아쇠에서 손가락 뗀다 같은…) 나머지는 제각각 알아서 하게 하는게 더 그럴듯한 연출이 될 수도 있다. 개성을 드러내려면 실제 포즈의 미묘한 차이를 과장해도 되니까 말이다. 꼭 양손으로 총을 쥐어야 실감이 나는게 아니다. 고수쯤 되면 한손으로 총을 쏠수도 있지 않겠나.

대표적인 총 뺏아야 되는 포즈, 해머코킹 한 상태에서 방아쇠에 손가락 걸고 폼 잡기... 대략 오발사고 내고 싶어서 환장한 자세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에서도 출연진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당시 사격자세의 기본을 충분히 숙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게 획일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미묘하게 다른 차이까지 보여주곤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총잡는 기본뿐만이 아니라, 그 기본의 다양한 패턴에까지 통달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우리 영화에서 초보와 중수 그리고 고수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액션연출은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