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여행자> <영진공 68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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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ession: Reporter 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음, 아프리카 어떤 나라에서 기자인 데이빗 로크(잭 니콜슨)가 반군 게릴라를 찾아 헤매는 걸 보고 아니, 안토니오니가 설마 정치 스릴러를 찍었나?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제가 본 안토니오니 영화는 (고작 16mm로) <정사>와 <밤> 정도에 국한됩니다만, 그럼에도 안토니오니가 천착하는 주제가 공허하고 외로운 현대인들 특유의 정서라는 건 저 두 편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언젠가 안토니오니의 대표작들을 한번 제대로 좌라락 훑고 싶다는 욕심은 아주 간절합니다. 하이퍼텍나다에서 안토니오니 전을 한번 했다는 거 같은데, 제가 이 감독, 특히 이 감독이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에 반한 게 불과 3년 전이고 그 전엔 딱 잘라 ‘수면제 감독’이라고만 생각했었으니, 놓친 게 당연한 걸지도요. 어쩌면 당분간 이런 기회를 만나지 못할 것같습니다.) 역시나, 이 영화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는 호텔에서 만나 몇 마디 나눈 다른 백인 투숙객, 데이빗 로버슨이 죽어있는 걸 발견하고, 그의 여권 사진과 자신의 여권 사진이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 착안, 거의 충동적으로 여권사진을 바꿔치기함으로써 데이빗 로버슨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로버슨의 수첩에 따라, 그의 집과 약속 장소의 일정을 따라가지요. 그럼으로써 이 영화의 로케이션은 처음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런던, 뮌헨,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그 주변 근교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냥 사업가라고 밝힌 로버슨의 진짜 직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로크가 로버슨 행세를 시작한 뒤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동행하게 되는 미스테리한 젊은 여자 – 그녀의 이름은 끝내 영화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리아 슈나이버가 맡았죠 – 와 함께 하는 모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로버슨의 메모에 스케줄을 따라 이동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그는 로버슨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인지 “도대체 왜 그와 동행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고 성찰하는 타입”이던 그가 정반대의 방식, 즉 로버슨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며 소개한 “닥치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삶을 이어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는 물론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관객들도 바로 앞에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서스펜스가 발생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레이첼 로크(데이빗 로크의 부인, 제니 루나커)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새삼 그를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거의 마지막 장면에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보며 “나는 그를 안 적이 없다.”고 말을 하죠.


GV 시간에 이 영화를 소개한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와 연관성 있는 영화로 플롯과 설정 등의 유사성을 들어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언급했는데, 전 아무래도 마리아 슈나이더의 존재 때문인지 그녀의 출세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안다 / 모른다, 라는 것이 혹은 이 사실을 공식적인 ‘말’로 선언하는 것이 새삼 얼마나 다양한 결의 의미를 갖고 있는지요.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발견을 통해 현대인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외롭고 고독해하며 고통을 받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여행자>뿐은 아니며, 소위 ‘현대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는 꽤나 일반적인 주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을 바꾼 남자의 모험이란 측면에서, 이 영화는 현대인의 정체성이 내포한 의미, 그리고 인간 본연의 고독, 타인과 나와의 거리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탐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죠. 함께 여행을 하며 심지어 몸을 섞기도 하는 여자(마리아 슈나이더)에게, 로크는 두 번이나 “당신 도대체 여기서 나랑 뭘 하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 정도의 정보를 갖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만, 실상 그가, 그리고 관객인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에 한번도 안 나온 그녀의 이름을 안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죠. 도대체 왜 그녀는 런던에 있었던 걸까요? 로크의 부탁을 받고 호텔로 로크의 짐을 가지러 간 그녀는 프론트에서 왜 스페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물어볼까요? (분명 그녀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여성이고, 그 호텔 역시 바르셀로나에 있지 않던가요.) 도대체 그녀는 왜 낯선 남자를 따라나서서는 그의 모험을 함께 하고 있는 걸까요? 심지어 탠지어의 글로리아 호텔까지 로버슨부인이라고 하면서 따라와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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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슈나이더의 얼굴은 '아이'와 같아서 대단한 미녀가 아님에도 묘한 매력을 주죠.


이것은 로크나 로버슨,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로크는 자신의 ‘현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그저 여권 사진을 바꿔치기하는 것으로 너무나 쉽게 해결됩니다. 로버슨의 비행기 표를 이용하고, 로버슨의 여권을 사용하는 것으로, 데이빗 로크라는 인물은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됩니다.모두들 그를 기리겠다고, TV 프로에 출연해 그를 회고하고 심지어 그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난리를 치죠. 하지만 그 부인조차, 자신은 로크를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마틴 나이트가 로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그가 영국 출신이고 미국에서 교육받았다는 것, 그래서 편견이 덜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는 정도입니다. 오히려 로크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캐치하는 이는, 로크가 인터뷰하려 했던 어떤 아프리카 부족의 주술사입니다. 그는 로크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로크에 대한 많은 것을 읽어냈다고 말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로 인한 고독, 그리고 사회적인 누군가를 규정하는 조건들, 인간의 고독, 이런 질문들은 제가 봤던 안토니오니의 다른 두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행자>에서는 그것이 잭 니콜슨이라는 보다 익숙한 미국배우와 마리아 슈나이더, 그리고 컬러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공간도 바르셀로나 근교의 공간도, 허허롭고 텅 비어있긴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바르셀로나 시내 장면은 영화에서 아주 조금 나올 뿐, 로크가 마리아 슈나이버를 초반에 주로 만나는 곳들도 “숨어있기 좋”다는 가우디의 건물들이죠. 잠깐 나오는 뮌헨공항과 런던의 풍경 역시 한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뮌헨공항에서 로버슨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오로지 티켓팅 직원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교회당에서 아체베와 누군가를 만난 것 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합니다. 마틴 나이트와 자신의 부인은 자기가 피해다녔다곤 해도, 정작 그가 만나야 할 누군가들 – 마리온, 데이지, 또 누구, 모두 여자의 이름을 가진 – 은 결코 만나지 못하죠. 아마도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쓸쓸한 정서를 더해주는 것같습니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도 당황하며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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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니 화면의 '깊은' 공간감이 잘 살아있는 스틸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