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박수치기엔 좀 애매한









⊙ 저자
최규석
⊙ 펴냄 사계절



이번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만화책이 아닌 우화집이다
. 앞서 울기엔 좀 애매한에서 멋진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린 나로서는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생각지도 못한 우화집이라서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최규석 작가의 새로운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책의 전체적인 모양새는 3~4장의 짧은 우화들과 다양한 느낌의 삽화가 실려 있는 형식이다. 거친 붓선이 살아있는 그림에서부터 연필 소묘, 동화느낌의 그림까지 최규석 작가의 다양한 그림을 맛볼 수 있다. 가히 최규석 작가의 높은 그림내공이 느껴진다.

하지만 책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울기엔 좀 애매한”에서 짧은 일정 안에 수채화라는 노가다를 하느라 기력이 떨어진 탓일까. 이번 책은 쉬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의 문제는 우화들의 내용과 구성이 비슷비슷하다는 점이다
. 그러다보니 뒤로 갈수록 이야기의 감흥은 제곱에 반비례하고 있다. 이 비루한 현실을 비꼬고 싶은 마음이야 백날을 이야기해도 아깝지 않지만 짧은 분량 안에서 비슷한 주제들을 소화시키려보니 내용도, 형식도 비슷하고 진부해져버린 이야기들이 여럿 보인다.

물론
고래가 그랬어에서 연재했던 것을 일부 엮은 탓이겠지만 오롯이 연재분만 모은 것은 아니니 차라리 2,3개의 글을 택해 좀더 뼈와 살을 붙여 분량의 변화를 주던가 아니면, 주제의 폭을 좀더 넓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가운 것도 있는데 이 책에는 “고래가 그랬어에 실렸다가 기독교인들의 쓰나미 같은 항의를 받았다는 불행한 소년편이 실려 있다. 매우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만화 출판사도 아닌 사계절에서 ‘1318만화가 열전이라는 시리즈로 만화 단행본을 출판하고 있다. 이 책은 이 시리즈의 두 번째 권으로 첫 번째 권은 역시 최규석 작가의 울기엔 좀 애매한이었다. 사계절의 새롭고 긍정적인 시도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나올 다음 만화가들의 작품들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겠다. 특히 앙꼬 작가님꺼~!



영진공 self_fish

“7년의 밤”. 독자라서 행복한, 스티븐킹보다 서늘한, 그러나 뜨거운 소설


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진공 라이

“유령 여단”(The Ghost Brigades, 2009),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




* 저자: 존 스컬지
* 역자: 이수현
* 펴냄: 샘터

1부 [노인의 전쟁]이 회춘한 노인들의 군대 이야기였다면, 2부 [유령여단]은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다. 1부 끝물에 등장했던 일당백의 살인기계들인 ‘유령여단’의 눈물겨운 활약상이 전작에서 주인공과 이런저런 관계였던 ‘유령여단’ 제인 세이건의 반가운 얼굴과 함께 펼쳐진다.

작가는 ‘유령여단’을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싸구려 대패 삼겹살처럼 여러 사람의 DNA를 모듬한 신체에 의식을 주입해서 만든 인간들로 그리고 있다. 이들의 이런 독특한 제조방법(?)은 그들의 주옥같은 활약과 함께 자연스레 ‘의식’이란 철학적 소재가 따라나오게 만든다.

이런 ‘유령여단’의 대척점에 서있는 존재로 ‘오빈’이란 종족이 등장한다. ‘콘수’라는 초지능종족이 의식을 제거한 체 지성만 주입하여 만든 종족으로 그려지는데 작가는 ‘지능’만 존재하는 종족을 자의식이 없는, 어떤 ‘욕구’가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의식(영혼)이란 ‘창조’며 ‘욕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오빈’종족은 똑똑하지만 그 지식을 이용해 다른 것을 창조하지 못하며 무엇에 대한 욕구가 없는 존재다. 즉 일종의 움직이는 컴퓨터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 덕에 ‘오빈’종족은 작품의 주된 악당중 하나임에도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반면 돌맹이 주제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령여단’ 소속의 한 군바리들은 짧은 등장에도 많은 대사빨과 함게 자신의 등장을 어필한다.


그러나 작가는 컴퓨터와도 같은 ‘오빈’종족이라 설정했음에도 정작 영혼을 ‘갈망’하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니 모순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류를 외계인 나부랭이에게 팔아먹으려는 과학자 ‘샤를 부탱’으로 인해 좀 매우 많이 곤란해진 우주개척연맹의 처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샤를 부탱’의 복제된 의식을 DNA모듬신체에 주입하여 만든 ‘재러드 디랙’이란 유령여단 군인을 이용해 ‘샤를 부탱’의 음모를 까발리고 황천길로 보낸다는 줄거리다.

‘샤를 부탱’의 음모가 밝혀지면서 덩달아 우주개척연맹의 존재와 음모도 조금씩 밝혀지는데 죽기 전에 알을 까는 바퀴벌레마냥 3부에 대한 떡밥을 대량 살포하며 끝을 맺는다.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밀려오는 것은 뿌듯함과 감동보다는 MBC뉴스의 폭력성 실험장면처럼 ‘앗, 씨발. 3권은 언제 나오는거야!’라며 아쉬움에 울부짓게 만든다.

다행히도 인터넷을 불꽃검색한 결과 번역가가 1월에 초고를 완성했다고 하니 올해 중순에는 3부[Last Colony]의 낯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얌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려보자.

출처:유령 여단(The Ghost Brigades, 2009) –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


영진공 self_fish


박완서 – “꿈엔들 잊힐리야” (원제 : 미망), 15년 만에 다시 읽기


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영진공 라이

 

손홍규의 “이슬람 정육점”, 일상에 함몰되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


여러모로 작가의 전작 ‘귀신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한권짜리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서너권 이상 되는 대하소설에서나 나올법하게 수많은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고, 어떠한 지형(귀신의 시대에서는 노령산맥, 이슬람 정육점에서는 한남동)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역사, 지리적인 삶을 짚어 나가는 것 또한 그러하다.

시점을 알 수 없는 훗날의 내가 ‘어린날의 나’가 되어, 1인칭 작가시점도 전지적 작가시점도 아닌 묘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묘사해 나가는 것도 그러하다.

묘사력과 익살, 사안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나다.

‘사람의 신화’에서 ‘귀신의 시대’를 거쳐, ‘봉섭이 가라사대’까지 오는 동안 마술적인 차용은 줄어들고, 어두운 묘사는 줄어들며, 유머는 점점 증폭되어가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데, 이 작품또한 그 연장선 상에 서 있다고 본다. 거의 모든 작품의 무대였던 ‘노령산맥’에서 ‘한남동’으로 옮겨왔기 때문일가. 약간 아쉬운 것은 이번 작품은 전작에 비해 좀 더 철학적이 되었고, 좀 더 인위적이 되었고, 좀 더 설명적인 듯하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소년의 사유가 너무 깊은 나머지 소설과 철학적 사유가 따로 읽히는 듯한 느낌이 조금 있다.

인물의 얼굴을 스크랩하고, 그 스크랩으로 세계지도를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illustrative하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고, 안나 아주머니를 필두로 한 그 사람들이 돼지도축 여행을 떠나는 것 또한 너무 상징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나중에 ‘총상’과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는, 그것을 읽으면서 상상되는 ‘그 사건’을 ‘직접 언급’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며 적잖이 걱정마저 되었다. (다행이 추측만 할 수 있게 하지, 언급을 직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소설에서’아쉽다’는 ‘완벽을 기대했던 작품’에서 약간의 트집잡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데서 오는 감정이지, 영 아닌 작품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 여타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기와, 기질과 생명력이 있다.

손홍규는 정말 보석같은 작가다.

문단에서만 보석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 세대에 있어서의 보석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에서 경계세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경험을 그 어느 쪽이든 다 풍부하게 직접해보고, 역사와 생활을 씨실과 날줄로 엮어 유머가 넘치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재주 때문에 그를 보석같다고 생각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우리세대에 이런 철학과 이런 문제의식과 이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예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훨씬 우리 세대에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쉽게 용서하게 만드는 세월 속에서 나는 얼마나 경주마 같이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일천한 상상력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가.

일상에 함몰되지 않는, 징징거리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를 잃지 않는 손홍규.

개그콘서트 식으로 말하자면, ‘손홍규 포레버’다.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