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와 덴트, 너는 내 운명!


<다크 나이트>는 여타 슈퍼히어로물과 비교해 여러 모로 진화한 텍스트다. 볼 때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 곱씹어보는 재미를 준다. 처음 봤을 때는 미국이 처한 정치적 현실의 은유라고 생각했다. 배트맨의 출현이 더욱 강한 적을 부른다는 설정 때문에 세계 영웅을 자처하다 아랍권의 거센 반발로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의 모습과 겹쳐졌다. 두 번째 감상에서는 배트맨과 미국을 동일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어둠의 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미국 영웅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알레고리로 읽혔다.  

세 번째는 또 달랐다. DVD로 다시 본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로 해석됐다. (여담인데, 미국 내부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 감독은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아메리칸 뷰티>(1999)의 감독은 영국 출신인 존 슐레진저와 샘 멘데스였고, <아이스 스톰>(1998)의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배경이 시카고이고 둘째,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가 중요하게 언급되며 셋째, 하비 덴트가 혼란한 고담시를 구원해줄 영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크 나이트>가 시카고에서 촬영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전작 <배트맨 비긴즈>는 세트 촬영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제 로케이션 장소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말 그대로 고담은 허구의 장소였던 셈. 그랬던 고담이 <다크 나이트>에서는 세트를 박차고 나와 시카고 시내에서 영화의 60%를 촬영했다. 놀란의 인터뷰에 따르면, “브루스의 내면에 집중한 <배트맨 비긴즈>와 달리 <다크 나이트>는 한 인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뤄야 했기에 고담 시의 물리적 범위를 더욱 크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시카고였을까? 고담은 뉴욕의 옛 이름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실제 로케이션 장소는 뉴욕이 돼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나는 <다크 나이트>가 결국 버락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뉴욕이 아닌 시카고를 촬영 장소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일 뿐 아니라 정치생명의 꽃을 핀 자궁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등에 업고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영화는 배경을 시카고로 삼을 뿐 아니라 지방검사로 등장하는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차기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심지어 선거가 3년 뒤에 실시됨에도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시장 선거 후보로 후원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이에 덴트 왈, “선거는 3년 뒤인데요.” 그러자 웨인 왈, “내가 후원하면 당선이나 다름없다고.”)

안 그래도 덴트는 무너진 고담시의 법치질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지역 마피아와 손잡은 공권력의 부패가 고담시를 더욱 나락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강조하며 악의 퇴치에 앞장 설 뿐 아니라 잠시지만 조커를 생포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고담시를 구원할 차세대 영웅 하비 덴트 등장이요!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하비 덴트를 후계자 삼아 고담시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듯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적 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목격한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라는 새로운 영웅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를 전략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해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임을 은연 중에 환기시킨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데,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버락 오바마를 모델로 했을지 모른다는 심증을 들게 한다. 그리고 오바마는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며 새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2008 미국 대선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의문도 든다.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덴트 역의 배우를 백인인 애론 엑하트가 아니라 흑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냐는. 그럴지도. 사실 내가 덴트와 오바마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이미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난 후 <다크 나이트>를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다. <다크 나이트>의 전 세계 동시 개봉일은 2008년 8월 6일.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은 민주당 전당대회는 한 달 뒤인 9월에 있었으니 정말로 놀란 감독이 오바마를 모델로 덴트를 캐릭터화했다면 그것은 모험에 가까웠을 터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의 미국적 상황을 고려하건데 부시의 이념과 반대되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거다. 덴트 역에 애론 엑하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놀란 감독이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할 영웅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건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그러니까 덴트 역의 모델은 현 시점에서 보면 버락 오바마이지만 개봉 당시를 고려하면 미국 차기 대통령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글 초반에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덴트와 오바마의 연결성은 제쳐두고 질문을 다시 해보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무엇을 충고하고 싶었던 걸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했을 영화에 굳이 하비 덴트를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극단적인 가치 추구는 광기와 같다, 즉 “진실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조커의 말을 빌린 놀란 감독은 흡사 ‘흑과 백’의 구도로 흐르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사이에 ‘투 페이스’ 하비를 끼워 넣고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켜 현실 정치의 회색빛 진실을 알려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조커가 절대 악을 상징하고 배트맨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외형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은 정확히 대립을 이룬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과 검은색 슈트, 질서의 파괴와 수호, 익살스러움과 심각함, 부랑아와 부자, 그리고 과장과 은신까지. 극단적인 선은 악과 닮은꼴이듯 조커와 배트맨은 노골적으로 다르지만 그래서 같은 인물이다. (극중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라고 말한 대사를 상기하라!)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캐릭터는 어느 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하비 덴트, 즉 투 페이스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물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정세의 판도가 달라질 것임은 자명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앞면? 뒷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전 세계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다크 나이트>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크 나이트>는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며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란 광기와 같아서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자신까지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고담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이었다가 희망이 꺾이자 곧바로 조커의 영역에 투신하는 하비, 아니 투 페이스의 행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바꿔 말해,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악을 뿌리 뽑을 필요가 없다. 굳이 뿌리 뽑지 않아도 되니 적절히 용인하는 가운데 그 스스로가 악역을 맡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배트맨처럼. 누구에게?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그러니까, 버락 오바마에게.

이와 관련, 최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자 세계의 이목은 다름 아닌 오바마에게로 향했다. 동전 앞면을 선택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 뒷면을 선택해 전쟁을 묵인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지. 이스라엘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오바마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약속합니다. 위협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합니다”라고 이스라엘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요, 현실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하게 ‘배트맨’이 제목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다.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는 별명과 함께 배트맨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망토 입은 십자군’(Caped Crusader)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슬람에 파견한 군대. 세계 평화를 가져오겠다며 대선 전부터 기염을 토한 현실의 하비 덴트는 어둠의 기사가 되어 고담으로 변모한 가자 지구에서 망토 입은 십자군으로서의 맹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바마를 향한 충고는 멋지게 들어맞은 셈이 됐다. <다크 나이트>는 보면 볼수록 무시무시한 영화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