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처연한 엽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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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 <망량의 상자>라고 대답했다.

교코쿠 나쓰히코의 책은 처음에 <항설백물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꽤나 재미있었다. 일본의 설화와 기담을 활용해서 정의를 세우고 다니는 탐정 사기단 이야기다.
 
이들은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귀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지식을 활용해서 범죄자를 처단하고 정의를 세운다. 처음에는 화자가 오락가락 하는 글쓰기 방식(아, 중간에는 이 말을 누가 하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더라고…)이나 난데없이 지팡이를 쿵 찍으며 뭐라 웅얼거리는 식의 불친절한 이야기 방식에 적응하기가 좀 힘든데,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면 대충 합리적으로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짜맞춘 전체적인 사건의 모양새가 꽤나 참신했다. 이성과 비이성이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고.


<항설백물어> <속항설백물어> <광골의 꿈> 일본어판의 표지들 …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우부메의 여름>을 봤다. 이건 초반이 엄청나게 힘들다. 난삽하다고 해야 할지, 무겁다고 해야 할지 … 의식과 경험과 감각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을 주요 등장인물인 ‘교고쿠도’의 입을 빌어 강의 형식으로 풀어내니 당연히 힘들다. 등장인물들도 꽤 많은데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그 이름이 그 이름같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동안 여기저기 널어놓은 괴담, 설화, 심리학(특히 정신분석학)적 단서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속도가 붙는다. 교고쿠도네 헌책방으로 가는 길처럼 중간까지는 엄청 힘들다가 내리막 직전에 현기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아 … 엽기적이었지만 참신했다.

마침내 <망량의 상자>에 이르러서는 전작 <우부메의 여름>이 귀여워보일 정도다.

이제는 기담과 이상심리학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사와 의학까지 곁들여지고, 벌어지는 범죄의 뒤엉킴도 한 3배쯤 복잡해지며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
“처연한 엽기”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의 뒷맛은 찜찜하고 애잔하면서 끔찍하고 기괴하기 그지없다. 한동안은 정신이 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을 정도다.

사실은 아직도 나는 ‘호오~’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 … 그 ‘호오’ … 진짜 소름끼친다. 이 평도 사실 이렇게 글이라도 써 놓으면 그 망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_-;;;


원판 소설은 표지가 이런 모양이다 …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미스테리로서는 결격사유가 많다.

원래 미스테리는 일종의 게임, 저자와 독자가 벌이는 머리싸움이다.
그래서 공평하게 게임을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이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는 것을 독자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로 나쓰히코의 미스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애매하게 반칙을 한다.

<우부메의 여름>이 특히 그렇다.
이 이야기의 화자라는 인간(소설가 세키구치)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인간이라서 남들이라면 당연히 보았어야 할 것을 못본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기만 했으면 이야기는 초반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결국 이 미스테리의 트릭은 화자의 눈이 삐꾸라는 점에 있었던 거다. 그러니 사실 이야기의 결말은 꽤나 허탈하고 싱거운 셈이다.

하지만 그 미스테리가 풀린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이 워낙 상상을 뛰어넘게 엽기적이라 … 독자들도 그 반칙 트릭을 보고서도 (세키구치 처럼)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벌어진다.

<망량의 상자>는 또 다른 주변인 주인공 기바 형사가 주요 화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얼빠진 소설가 세키구치도 화자로 끼어들고 … 그 와중에 서로 다른 계열의 두 싸이코가 한데 만나서 정말 엽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소설의 중반쯤 되면 누군가가 유괴(?)되는데, 나도 그 사건의 트릭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내 상상의 수준을 한두단계쯤 뛰어넘고도 또 끝까지 아주 비릿한 엽기의 향취를 풍기며 끝낸다.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처음 책에 등장하는 소설에 담겨있다. 그걸 처음 읽을 때의 느낌과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었을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

망량의 상자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는 특별한 범죄라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깐씩 망량의 손길이 닿는 순간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줄을 놓는 순간이다. 저자에 따르면 범죄는 악인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상황의 겹쳐짐에 의해서 발생한다. 우리들 모두는 성장하면서 각자의 욕구를 축적해간다. 그 중에 일부는 몇몇 우연한 만남 탓에 그 욕구가 조금 특이한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축적한 욕구의 충족이 완벽하게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이 엽기적인 범죄가 되기도 하고, 행복의 완성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둘 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망량의 상자에 등장하는 범죄는 모두 끔찍함의 엣지를 달린다. 하지만 알고보면 거기에 진짜 끔찍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한, 알고보면 조금씩은 처연하고 조금씩은 안타까우며 조금씩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은 범죄자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에겐 정말 별다른 죄가 없다. 그는 그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짧은 순간 그가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의 맛을 보면서 그는 엽기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교고쿠도가 말했듯,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이기를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오른쪽이 저자 교고쿠 나쓰히코

이 책의 저자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미술디자인과 소설을 병행하는데, 공식석상에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기모노를 입고 나타난다. 거기에 일본의 고대 근대 역사와 각종 기담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거기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름의 깊은 이해까지 녹여냈다는 점에서 이 양반은 일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은 에코보다 한 두 수 위다. 특히 엽기적인 면으로 … 일본에서는 아마도 A급과 B급을 두루 망라하는 문화계의 스타인듯 하다.


이 소설은 만화와 애니매이션,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엔 소설보다는 만화가 더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검색하면 나오는게 이런 이미지들이니 …


하지만 기왕 읽으려면 소설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영진공 짱가